사랑의 유리잔 / 강길용
나의 방안엔 3개의 유리잔이 있다. 하나는 불투명한 잔이고 다른 것은 반투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투명한 유리잔이다. 세 개의 잔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해 본다. 한번은 투명한 유리잔을 사용하고 또 한번은 반투명의 잔을, 그리고 불투명한 잔을 가지고 물을 마시고 음료수를 마신다. 그럴 때마다 야릇한 느낌을 받는다. 투명한 유리잔이 주는 느낌과 불투명한 것이 주는 느낌, 그리고 반투명의 잔이 안겨 주는 감정의 싹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부어 마시면 깨끗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에선 초라하고 지저분한 모습을 보기도 한다. 담긴 물이 맑고 투명하면 마음도 따라서 깨끗하게 되고 그렇지 않고 작은 이 물질이라도 들어 있을 땐 너무나 뚜렷이 보이기 때문에 무척 보기 싫다. 담았던 물을 버리고 다시 담아서 마시게 된다.
반투명의 유리잔은 물이 들어 있다는 것만을 느낄 뿐 밖에서 보면 물속에 작은 티나 머리카락이 빠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선 반드시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물론 커다란 이물질이 들어가 있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가끔은 물을 마시려 내 입을 잔의 입술에 대었을 때야 알아차린다.
그럴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하기만 하다. 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었다면 입에 대는 수고는 덜었을 것을, 차라리 아예 보이지 않아서 물이 찬 것을 몰랐다면 물을 다시 붓기 위하여 들여다보고 닦아 내기라도 했을 텐데…. 왠지 모르게 유리잔이 나를 속였다는 생각이 들지만, 투명한 잔과 같이 심한 불쾌감은 느끼지 않는다.
완전히 속이 보이질 않는 불투명한 잔을 쓸 때는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몰라서 음흉한 느낌이 든다. 속에 마치 무슨 독약이라도 들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물을 따른다. 그리고 마시기 전에 한 번쯤 안을 살펴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때도 있기는 하다. 내가 무척이나 목이 말라 있거나, 급히 마셔야 할 일이 없을 때 말이다. 그래도 물을 부어 마시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속이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야 한숨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이런 것은 사람과 사람이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깨끗한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다. 유리잔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과 같이 작은 갈등이나 불신이 들어가 있어도 금방 표시가 난다. 그러면 속에 들어 있는 물을 다시 서로 보기만 하고 버려야 한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말이다. '너무나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라는 말과도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올리는 것이 완전한 사랑,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깨끗한 물과 같은 사랑을 그리게 된다.
반투명의 사랑은 보일 듯 말 듯 하기 때문에 서로가 약간의 믿음이 없어도 별 탈이 없이 즐거운 사랑을 한다. 유리잔 속의 이물질과 같은 완전한 변심을 확인하기까지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래 갈 수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못이 있게 마련이다. 그 잘못이 아주 커다란 것이 아니면 반투명한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서로 약간의 양보를 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포옹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사랑에 대해 투명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다. 서로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의심한다. 이것은 마치 '의부증'이나 '의처증'과 같다. 늘 서로를 믿지 못하여 확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확인을 하고 나서도 꺼림칙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남자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모르고 여자의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서로 속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두 눈을 부릅뜬다. 그러나 유리잔을 들여다보듯이 볼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점이다. 그래도 투명한 사랑보다는 오래 갈 수 있어 보인다. 서로가 신경전을 벌이지만 서로가 꼭꼭 감추기 때문에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그렇다.
내가 가장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랑은 투명한 유리잔과 같은 오직 맑고 투명한 모습의 사랑이 아니다. 그렇다고 언제나 믿지 못하여 안절부절하는 불투명의 사랑도 아니다. 바로 반투명의 유리잔과 같은 사랑이다. 투명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서로에게 조심을 하지만 그래도 '옥의 티'는 있게 마련이다. 너무나 믿기 때문에 아주 작은 티끌도 보인다. 그렇게 되면 아주 작은 불신의 틈만으로도 '사랑의 잔에 균열'이 생긴다. 유리잔을 완전히 깨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솟구친다. 또 단 한번의 실수도 포용하지 못한다. 마치 결벽증 환자와 같아진다.
그래서 그냥 보기에는 투명한 유리잔 속의 물과 같은 사랑이 아름답지만 오래도록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꽃이 필 수 있는 반투명의 유리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다. 불투명한 사랑은서로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불신을 하게 되는 아주 불행한 사랑이다. 늘 가슴을 조리며살아야 하고 서로가 조그만 티끌이라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는 사랑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가슴이 병든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가장 인간다운 사랑, 가장 오래 가는 사랑, 가장 포용력이 있는 사랑, 반투명의 유리잔 같은 사랑, 나는 이런 사랑에 매력을 느낀다. 아마 과거에 너무나 투명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다 깨어진 사랑의 유리잔을 앞에 놓고 울부짖어야 하는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거나 사랑은 아주 투명해서도 안되고 아주 불투명해서 미래가 암흑과 같아서도 안된다. 반투명이 주는 삼투압 작용이 적절히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1996. 6. 24 月 山 康 吉 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