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는 영화 ‘슈퍼맨’의 성공 이후 짜증이 나 있었다. 영화 배역이라고 들어오는 게 액션 영화 히어로. 바이킹 영화에서 반나체 바이킹으로 출연해 달라고 하자 그는 폭발하고 만다. 그러다가 로맨스 영화의 주연으로 맡아달라는 요청에 개런티 불문하고 허락한다. 주연 여배우는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저예산 영화치고는 스타급 주연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영화 음악은? 제인 시모어는 당시 유명 작곡가 존 배리John Barry를 개인적인 친분으로 어찌어찌 설득하여 참가시킨다. 영화 제작이 어째 친목회 같다. 그런데 이것이 이 영화 성격을 설명해 준다. 프로페셔널한 영화라기보다 아주 사적이고 친밀하고 은밀하다. 영화배우가 공식 인터뷰에 나와 자기 사생활을 약간의 조미료를 섞어 이야기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그 배우의 집에서 친밀한 대화를 나누며 그의 내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로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대학생이다. 한참 파티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데, 어느날 나이 지긋한 귀부인이 다가와 그에게 다
짜고짜 시계를 다짜고짜 건넨다. 그러더니 한마디 속삭인다. "Come back to me…." 처음 보는 할머니인데? 하지만 젊은 크리스토퍼 리브는 할 일이 많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이 일은 곧 잊는다.
크리스토퍼 리브는 나중에 극작가로 성공한다. 하지만 애인도 떠나고 새 각본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고 슬럼프다. 그래서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시골길에서 저 멀리 거대한 호텔을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투숙한다.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는 호텔 박물관에 들른다. 시간을 죽이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어느 여배우의 흑백사진이다. 저 멀리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한눈에 황홀에 빠진 그는 사진을 떠나지 못한다.
이 영화 속 크리스토퍼 리브는 말하자면 젊은 베르테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청년이다. 영화의 원작자 리처드 매드슨 Richard Matheson의 실제 경험이 바탕이다. 매드슨은 유명 여배우 모드 애덤스Maude Adams의 흑백사진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1950년대에 80세 나이로 사망한 모드 애덤스는 자기가 죽은 후 30년 뒤 어느 소설가가 자기 사진을 보고 사랑에 빠져 역사에 남을 소설을 쓰고, 어느 영화감독이 자신을 영화화해서 역사에 남을 로맨스 영화를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리브는 이 운명의 여인을 만날 방법이 없다. somewhere in time. 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 어딘가에 이 여인이 있기는 한데, 어떻게 찾아간단 말인가? 일단 그는 앨리스라는 이 여배우에 대해 조사한다. 1930년대에 엄청난 여배우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사건인지 모를 사건이 발생한 후 그녀는 수십 년간 철저히 은둔생활을 했고, 그 사건 이후 원래 쾌활했던 그녀는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게 연극사의 수수께끼다.
그는 앨리스가 은둔했다는 집으로 찾아간다. 맙소사. 앨리스는 그가 대학생 때 만났던 그 귀부인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뭔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 같은 느낌도 주고, 암튼 이상하다. 그런데 앨리스는 크리스토퍼 리브를 만난 그날 밤 조용히 죽었다고 한다. "이제 됐어. 내가 할 일은 다 했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아주 평온하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정말 수수께끼투성이다.
영화가 대책 없이 감상적이다. 크리스토퍼 리브나 제인 시모어나 젊은 베르테르처럼 감상적이고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상업적인 영화라면 절제하는 미덕도 있어야 하는데 센티멘털 과잉으로 영화가 흘러간다. 영화음악을 맡은 존 배리는 원래 프로페셔널하게 작업하는 사람인데, 이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청 슬펐다고 한다. 그래서 그도 센티멘털한 음악을 작곡한다. 배우도 감독도 영화음악가도 원작 소설가도 다 센티멘털하다. 이렇게 해서 저 포스터 사진에서도 엿보이는 센티멘털과 탐미주의 영화가 나오게 된다.
이 영화가 인기 있는 이유도 이거다. "완성도니 현실적인 거 따위 몰라. 아주 슬프고 아주 아름답고 아주 아련하고 아주 환상적이고 아주 질풍노도의 그런 영화를 만들겠어" 하고 대놓고 선언하는 영화이니. 영화적 완성도는 몰라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아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영화 팬들 중에는 다 버리고 이 영화 무대인 맥케나 섬에 가서 사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영화적 완성도가 중요할까, 이런 정서적 힘을 갖는 것이 중요할까? 웬만한 완성도 있는 영화보다 이 영화가 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것만은 분명하다.
크리스토퍼 리브가 타임 슬립을 통해 앨리스와 만나는 장면도 유명하다. 처음 만난 크리스토퍼 리브를 본 앨리스의 첫마디가 "It's you…." 앨리스는 어느 점쟁이의 예언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미래에서 어느 남자가 와서 그녀를 파괴할 것이라는 말. 앨리스는 한눈에 크리스토퍼 리브가 그 사람임을 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운명을 느낀다.
영화가 탄탄한 구성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대책 없이 센티멘털한 것인지 아리송하다. 아마 둘 다인 듯하다. 둘은 운명적인 사람들이다. 둘이 만났으니 누구도 떼놓을 수 없다. 둘이 시속 10000킬로미터로 격렬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앨리스는 크리스토퍼 리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지금까지의 커리어까지 버린다.
극단은 호텔을 떠나면서 앨리스에게 택일을 재촉한다. 여배우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크리스토퍼 리브를 택할지 아니면 여배우로서 자기 지위를 지킬지. 앨리스의 선택은 뻔하다. 그녀는 크리스토퍼 리브의 작품에만 출연할 생각이고, 크리스토퍼 리브는 영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자기 머리로 훌륭한 각본을 써서 앨리스에게 걸작을 안겨줄 생각이다.
부럽다. 완벽한 결합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둘이 행복하게 이것저것 계획을 짜고 있는데, 크리스토퍼 리브는 실수로 자기 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아마 앨리스는 이 사건 이후 모든 것으로부터 은둔하고 크리스토퍼 리브를 다시 만나는 일에 수십 년을 바쳤으리라. 크리스토퍼 리브도 마찬가지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여자가 50년 전에 있다니…. 그는 자기가 속한 세계와 점점 더 접점을 잃어가고 죽음에 다가간다.
마지막 장면은 시간을 초월한 크리스토퍼 리브와 앨리스가 영원 속에서 재회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웬만한 걸작보다도 더 큰 감동을 준다.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렇다.
* ‘somewhere in time’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 대신에 우리나라에선 ‘사랑의 은하수’라는 이상한 번역 이름이 붙었다. 이 영화를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정도로 보이게 하고 싶었나 보다. 코미디적인 요소는 없다. 100% 정통 멜로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