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8번째 시간으로서 “참되신 하나님 말씀” 真実なる神のことば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3장 3절~4절
“3.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4.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3章3節~4節
“3.では、どうですか。彼らのうちに不真実な者がいたなら、その不真実は神の真実を無にするのでしょうか。
4.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たとえすべての人が偽り者であるとしても、神は真実な方であるとすべきです。「それゆえ、あなたが告げるとき、あなたは正しくあられ、さばくとき、勝利を得られます」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항상 그랬습니다만, 이 말씀을 보면 적지 않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선 이 <미쁘다>라는 말이 좀 애매하게 들릴 수가 있겠지요.
일상생활에서는 잘 안 쓰이는 말입니다만, 이 말은 그 어감 상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오해하실 수가 있는데, 사실 이
뜻은 그게 아니라, <참되다> <진실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좀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에 나온 성경구절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판 로마서 3장 3절~4절
“3.그런데 만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디
가겠습니까?
4.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성경에도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해하시는 데에 그나마 좀 낫지 않을까 합니다.
자, 오늘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두 가지 측면, 상대방의 믿음과 나의 믿음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먼저 첫째로는 상대방의 믿음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聖書はすべて神の霊感によるもので、教えと戒めと矯正と義の訓練のために有益です。
神の人がすべての良い働きにふさわしく、十分に整えられた者となるためです。
히브리서 4장 12절~13절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神のことばは生きていて、力があり、両刃の剣よりも鋭く、たましいと霊、関節と骨髄を分けるまでに刺し貫き、心の思いやはかりごとを見分けることができます。
神の御前にあらわでない被造物はありません。神の目にはすべてが裸であり、さらけ出されています。この神に対して、私たちは申し開きをするのです。
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일반 책들처럼 단순히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책들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것입니다만,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쓰여진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활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지게 된다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이 변화합니다. 우리 생각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완전히 변하게 되어서, 사람만을 의지하고 세상 만을 의지했던
삶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それから、イエスは彼らに言われた。「全世界に出て行き、すべての造られた者に福音を宣べ伝えなさい。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しかし、聖霊があなたがたの上に臨むとき、あなたがたは力
を受けます。そして、エルサレム、ユダヤとサマリアの全土、さらに地の果て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ります。」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땅 끝이 어디입니까. 저기 먼 나라. 아프리카나 이름도 잘 모르는 먼 곳이 땅끝인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곳만이 땅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먼 나라까지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킬 수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의
땅 끝은 그런 먼 나라, 먼 지역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복음을 전파한 적이 없는 우리 이웃, 그 곳이 바로
땅끝이라고 하겠습니다.
꼭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 그 곳에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이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전하라고 했으니, 아직 믿음이 없는 우리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했더니 정말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린 땅처럼, 바싹 마른 땅이 옥토가 되어가듯이,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구나 하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지요.
하지만 전도를 좀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항상 그렇게 되나요? 아니요. 그게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사람한테는 전도 하기가 쉬울까요?
어떤 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전도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전도 중 하나가 바로 가족 전도라고 합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까운 존재라고는 해도, 이 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리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아니, 하나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런 식으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41절
“38.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そこで、ペテロは彼らに言った。「それぞれ罪を赦していただくために、悔い改めて、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バプテスマを受けなさい。そうすれば、賜物として聖霊を受けます。
この約束は、あなたがたに、あなたがたの子どもたちに、そして遠くにいるすべての人々に、すなわち、私たちの神である主が召される人ならだれにで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ペテロは、ほかにも多くのことばをもって証しをし、「この曲がった時代から救われなさい」と言って、彼らに勧めた。
彼のことばを受け入れた人々はバプテスマを受けた。その日、三千人ほどが仲間に加えられた。
베드로 말씀을 한 번 전했더니 그 날에 신도 수가 3천 명이나 늘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 게 내가 말씀을 전하면 전혀 사람들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아요. 말씀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서요? 마귀 사탄이 방해해서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요?
제가 예전에 한국에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크게 붙여놓았던 글씨인데, 거기에는 뭐라고 적혀 있었냐 하면, 참 간단합니다. “손님이
짜다면 짜다”
참으로 간단명료하고도 멋진 글 아닌가요? 예전에는 식당 사장님이 왕이요, 주방장이 만드는 음식맛이 진리였는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방장이 맛있다 하더라도 고객에게 그 맛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고객 중심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만, 상황이 안 좋을 때 보면 선생님들마다
반응이 대체적으로 둘 중 하나에요.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학생 탓이나 환경 탓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공부를 안 한다는 거예요. 자기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또는 요즘 자기 수업의 학생이 적은 이유는 한일관계가 안 좋아서라는 거예요. 이 이유들을 보면 자기 탓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선생님은 그 원인을 자기 자신한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업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교재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지요.
만약에 환경 탓이나 학생 탓을 하게 되면, 그 선생님한테는 본인이 바뀔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됩니다. 자기는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을
바꾸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무엇인가 잘 안 될 경우에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자기에게 있어서 개선점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을 전할 때에 그 말씀이 전파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원인을 상대방이나 아니면 하물며 하나님 탓을
해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요? 아니에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야지만 우리
스스로가 발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전도를 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일까요. 이럴 경우를 보면 대체적으로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ホセア書 6章3節
私たちは知ろう。主を知ることを切に追い求めよう。主は暁のように確かに現れ、大雨のように私たちのところに来られる。地を潤す、後の雨のように。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자고 합니다. 그것도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힘써 알자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로마서를 공부하고 있는 이유도 다름아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될 때에, 우리의 말씀이 이웃에게 전파되어 우리 이웃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지역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둘째로는 나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기에 여러분의 믿음은 강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약한
믿음입니까.
예, 이상적으로라면 모든 분들이 강한 믿음,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냐 하면
마태복음 26장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すると、ペテロがイエスに答えた。「たとえ皆があなたにつまずいても、私は決してつまずきません。」
그는 자신이 강한 믿음을 가졌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흔들릴 때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이 때에는 과거에 기도 응답을 받은 체험이나 아니면 여러 신앙서적이 도움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이 성경 말씀이 되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위인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의 계보, 우리 식으로 한다면
족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렇죠.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족보도 완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계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까지 41대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계보에 보면 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계보에 여성이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본다면 요즘에는 족보에 여성 이름을 적는 경우도 있다고는 합니다만,
옛날에는 족보에 여자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이름이 기록된다 하더라도 여성이 시집을 가게 되면 그 남자 쪽 족보에 성씨만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여성차별이 대단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미성년자나 여성은 그 인구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것도 다섯 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그와 같은 남녀차별이 심했던 상황에서 이 신성한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여성이라고 하면 상당히 훌륭하고도 완벽한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름을 본다면, 마태복음 1장 3절에 다말(タマル), 5절에 라합과 룻, 6절에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16절에 마리아, 이렇게 다섯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남녀차별만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차별도 상당히 심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냐 하면, 아니에요.
적어도 5절에 등장하는 라합과 룻은 이방인 여성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리고를 함락 시켰을 때에 그 여리고 주민이었고,
룻이라고 하는 여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모압이라고 하는 지역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출신성분이라도 좀 괜찮았냐 하면, 이것도 꼭 그렇지가 않아요. 3절에 등장하는 다말은 야곱의 아들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를 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전반부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ユダがタマルによってペレツとゼラフを生み……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쌍둥이입니다.
그렇다면 다말이라고 하는 여인은 유다의 아내였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지요.
창세기 38장에 보면 시간 관계상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ペレツ)와
세라(ゼラフ)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성범죄가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지요.
그리고 6절에 등장하는 우리야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이는 다윗 왕이 자신의 충신 우리야로부터 빼앗은 밧세바(バテ・シェバ)입니다.
다윗의 왕위는 이 또한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얻게 된 아내인 밧세바 사이에서 얻은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이어지게 되지요.
이처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족보로서 걸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너무 부족한 족보라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완벽하지는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시요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의 족보라고 한다면, 여성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완벽한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기에는 어떠한 부자연스러움도 없는 흠이 없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으로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단히 좀 여러모로 부족한 족보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일까요.
여기서 잠시 화제를 좀 돌려볼까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혹시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책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왕조 27대 왕 중에서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해서 25대 철종 때까지의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는 한국의 국보 151호이기도 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양은 2000권이 넘기 때문에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이를 다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만, 이 책은
대단히 흥미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대궐에 있었던 사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이
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당대 왕이나 후손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볼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아무리
왕이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기록을 없애거나 바꾸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조선시대를 본다면 똑 같은 왕이라 하더라도, 권력이 강했거나 비교적 강하지 못했던 왕도 있었습니다만,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왕
중에는 조선 3대 왕인 태종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는 초대 왕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인데, 장자가 아니었던 그는 왕위를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꾸미기도 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 대한 대단히 흥미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실록 7권에 보면 서기 1404년, 태종 4년 2월 8일에 있었던 기록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 내용은 뭐냐 하면요. 태종이 말을 타고 직접 화살과 활을 가지고 노루사냥을 하던 중에 화살을 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천만다행으로 다치지는 않았는데, 이 태종의 첫마디가 뭐였냐 하면, 이 사실을 사관에게 알리지 말아라……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태종이 왜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 이유야 뻔하지요. 사관은 무엇이든지 다 기록하는 사람인데, 왕이 되어가지고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도 창피하니까, 이 사실을 사관이 모르게 해라……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이걸 사관이 알아차리고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기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이에요?
왕이 말하기를 “야, 내가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비밀로 해야 돼!”라고 했다는 사실까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당시 왕의 말 한 마디는 어명입니다. 그야말로 헌법이나 법률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역사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의 이와 같은 기록을 보았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하, 태종이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구나. 하는 단순히 그것뿐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태종 본인이 이 기록을 보았더라면 이는 99%도 아니지요. 100% 이 기록을 빼버렸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이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조작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존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당시 왕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대통령이나 총리 정도가 아닙니다. 훨씬 더 권력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그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왕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내용, 그것만이 아니라, 이걸 비밀로
하라고 하는 말까지도 여과 없이 기록되어 남아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다는 증거, 그
기록들이 모두 충분히 사실로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하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자, 이 성경, 예수님의 족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훗날 사람들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를, 우리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얼마든지 완벽한 족보, 순수한 유대인에 의한 족보, 어떠한 작은
흠결도 없는 족보로 미화하거나 조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족보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리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족보로서는 충분하지 않는 점을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 무엇 하나 미화되거나 조작되지 않은 말씀, 오로지
사실만이 적힌 책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의 제일 첫 구절.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부터 시작해서
성경 제일 마지막 구절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主イエスの恵みが、すべての者とともにありますように。
까지 모두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사실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도 사실이요, 물위를 걸으신 것도 사실이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을 보게 하신 것도 사실이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것도 사실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 뿐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게 달리시고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이자 우리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 데에는 이는 하나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야 하겠지요.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되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힘써 알고, 이로 인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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