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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 임직자들 가운데 간증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 먼저 김동욱 집사님, 그다음에 이흥 집사님 이어서
입직을 앞두고 간증문을 쓰라고 하여 많은 기대 받아왔다. 이런 내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하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다. 평온한 마음과 용기를 사 투닥투닥 리는 나를 이해해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은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가은이 대학 졸업식 차 안에서 가은이 기도를 하며 자꾸만 나의 입에서 그의 가는길에 주여 주고 있으리라. 난 함께 가던 가은이에게 엄마는 너를 위해서 기도하면 자꾸만 참아 졸업식을 하겠다. 졸업식이 끝난 얼마에 취업을 준비하던 강이가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은 할 수 있다 하신 나의 능력에 준하는 찬양을 주셨다.
신기하게도 경력직을 뽑는데 신입인 가은이가 채용되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찬양으로 응답해 주신 것이다. 감사할 뿐이다. 또한 요즘 힘든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찬양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찬양을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찬양을 좋아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해 주시고 위로해 주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날들의 감 감사하며 앞으로 걸어갈 날들 또한 기대합니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될 수 있도록 기도 많이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개인 택시를 하면서 참 냉정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너무 힘든 사람들을 보면서 좀 냉정하게 집이 아내가 경찰에 신고하 막 이런 좀 막연한 삶을 살았었는데 어느 날 정자들 사랑해 붙잡고 사랑하는 손자도 사랑해 거기에 기도 제목을 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불행자를 보면 천 원짜리를 주고 싶었는데 너 택시비가 없으니 그런 마음을 내 이를 수 아니었을까 하는 사랑스러운 실천을 계속할 것으로 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동안 스마트한 교회의 스마트한 미래, 앞으로도 참신하고 똑똑한 그런 교수 동력자들을 보면서 살겠습니다. 다짐 감사드립니다. 위에서 더욱더 여러분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에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환경을 만든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이렇게 볼 때 쉽게 첫 인상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아요. 근데 그 첫 인상이 맞는 경우도 많지만 또 틀린 경우도 많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첫 인상이라는 것만 가지고 뭔가를 관계라는 것은 좀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 사람이 살아왔던 환경을 좀 들어보면 이해가 돼요. 현재의 모습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뭔가를 이렇게 쉽게 판단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이 가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왜 저러지 오해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또 그 사람의 능력을 보려면 그 사람이 어떤 환경 가운데 있었는데 그 환경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소그룹 모임을 할 때 여러분들 안에 이러한 나눔들이 이루어지길 원해요. 지금 현재의 모습만을 보는 게 아니라 과거에 쓴 뿌리들을 또 내어놓고 또 과거에 여러분들 가운데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으로 내어놓고 그것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들이 나누어지고 또 앞으로의 소망의 이야기들이 함께 공유되면서 우리 공동체가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정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해하지 않고 함께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요 사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사복음서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말씀인데 똑같이 한 사건을 보고 기록한 말씀들도 있지만 어떤 복음서는 어디에만 기록돼 있고 막 이런 식의 내용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한 청년이 누구인가라고 하는 내용이 여러 학자들의 왈가왈부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마가일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성경 추석가들이 참 많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이렇게 좀 뭔가 부끄러운 이 상황을 직접 알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디테일한 내용까지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마가는 이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하며 자신이 그렇게 연약했었던 모습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싶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이 그 십자가의 사건 그리고 예수님의 그 고난의 현장 가운데 부끄럽지만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마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여러분 마가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좀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 말씀을 보면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을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아멘 마가라 하는 요한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마가라고 하는 것은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일반적으로 마가 요한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마가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당시에 큰 도시에 살았고 또 나름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마가의 집이 집회 장소로 사용될 정도로 집이 규모가 있었어요. 최후의 만찬, 또 오순절 성령의 임재가 이루어진 다락방 이게 다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마가의 집에서 이루어졌어요. 베드로가 군인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모여서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했던 그 장소도 바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가의 집의 규모나 또 이런 마리아의 집안을 보면 초대교회 때 나름 교회 안에서 나름 비중을 가진 가정이었다라고 우리는 예측할 수 있죠. 마가는 좀 부유한 환경 속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그런 곱게 자라는 인생을 살았을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마가는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나약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고난을 쉽게 대처할 수 없는 고난에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게세마네 동산에서 이제 마지막 부르짖는 기도를 하시고 마치시고 가롯유다를 비롯하여 대적들이 잡으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그 모습을 마가가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 마가가 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아보고 잡으려고 하니까 자기 몸을 둘러 있었던 배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도망갔을까요? 예수님을 그렇게 3년이나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마가가 예수님이 끌려가고 지금 자기도 예수님처럼 끌려가야 할 그 위기 속에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본능에 사로잡힌 몸동작입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그때 내 본능이 나타나거든요. 순간적으로 본능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뉴스를 보면 교통사고를 내놓고 막 뺑소니 치는 사람들 있잖아요. 어떻게 저럴 수 있어 하고 우리는 손가락질하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부류가 있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사고를 냈는데 그 당황한 상황에서 그냥 그 자리만 모면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도망가버리는 거예요. 그로 인해서 더 큰 일을 경험하지만 마가는 고난의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돌파하려고 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도망가려고 하는 나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것은요. 단순히 몸을 피한 그냥 그 현실 팩트만 볼 게 아니라요. 이거는 예수님과 지금까지 동행했던 그 믿음 그리고 자기가 함께 했었던 그 공동체를 버리는 행동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자기의 생명이 더 소중했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먼저 챙기려고 하는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사건이 지나고 난 이후에 약 15년 후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마가는 그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임재 이런 과정 속에서 이제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깊이 생각했을 것이고, 또 자신이 저질렀던 그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서 정말 후회도 하고 회개도 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면서 나도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이 선교 대열에 함께하리라라는 마음으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 일행이 구브로 섬을 가서 선교를 마치고 반빌리아 지방 버가라고 하는 지역으로 가게 될 때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밑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반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지금 한창 선교 여행이 진행 중에 있는데 이 마가 요한이 그곳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왜 이탈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풍토병에 걸렸는지 또는 바울에게 뭔가 불만이 있어서 뭔가 갈등의 요소가 있어서 그 자리를 떠났는지 아니면 선교회 일정이 너무 버거워서 그 자리를 벗어났는지 아무튼 이 마가는 선교를 하고 있는 이 여정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여러분 동력하는 과정 속에서 한 사람이 이탈하는 것은요. 그 나머지 동역자들에게는 엄청난 큰 아픔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함께 가고 있는데 그냥 한 사람이 빠져나가버렸어요. 그건 엄청난 타격입니다. 마가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2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 이 바울과 바나바가 이 마가를 동행하는 것 때문에 그 동행하게 하느냐 아니면 같이 갈 수 없다라고 하는 이 두 가지의 의견이 부닥치면서 결국 의견 충돌이 일어났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져서 따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그리고 바울은 이제 신라를 데리고 각자 선교지로 이제 따로따로 선교 여행을 하게 되는 그 요인이 바로 이 마가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가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2차 선교 여행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물론 자기가 어떤 상황 때문에 1차 선교 여행 때 중간에 중도 하차해서 돌아가 버렸지만 2차 선교 여행이 자기 때문에 갈등의 요소가 일어났고 또 갈라져가지고 이렇게 선교 여행을 하는 이 여정이 마가에게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마가도 자기가 물론 저지른 행동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지만 큰 충격에 빠졌을 것 같아요.
초대교회의 나름 지금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미움받는 것도 너무나도 아픔이었고, 또 그거에 공개적인 사람들이 다들 알게 되는 상황이잖아요. 지금 그러니까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자기 때문에 이렇게 두 지도자가 갈라지는 이 상황이 공개적인 망신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15년 전 혼이불을 두르고 가다가 벗어버리고 떠났던 마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벗은 몸으로 도망해 버렸던 마가가 15년이 지난 지금도 선교를 가다가 돌아가 버렸던 이 마가의 모습을 연결점을 보면 이 마가의 삶에는 마가의 이 성향에는 약간의 패턴이 보입니다.
그건 뭘까요?
마가는 유유부단하고 어떠한 큰 고난에 견디는 힘이 약하다라고 하는 걸 볼 수 있고요. 마음의 중심이 분명하지 않아서 변덕스럽습니다. 자기 감정과 자기의 상황이 먼저 생각되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어떤 상황에서 나만 살려고 하는 그리고 어떤 상황이 생기면 도피하려고 하는 그런 도피가 같은 사람이 이 마가였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읽고 있는 마가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썼어요?
이 마가가 썼어요. 어떻게 그렇게 도망자 이미지가 가득한 연약한 이 마가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행적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록한 이 마가복음의 저자로서 그의 신앙이 세워질 수 있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끔 이런 말을 하죠.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심지어 신앙생활에도 성격은 안 바뀌는 것 같아 하나님이 그 성격 그 모양 그대로 사용하시지 성격도 신앙생활한다고 쉽게 바뀌는 게 아닌 것 같아 우리 이런 말들을 가끔 하곤 합니다.
근데 여러분 정말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이 지금 우리가 믿고 이렇게 부르짖는 그러한 신앙이 좀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옛 사람은 죽고 세 사람으로 바뀐다라고 하는 우리는 소망을 갖고 있는데 절대 바뀔 수 없다는 게 있다면 그것도 약간 뭔가 오류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요 사람을 있는 모양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하나님은 그 사람을 고쳐서 그 사람을 잘 세워서 사용하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정말 나약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이 마가가 자기의 삶과 신앙의 변화 가운데 얼마나 몸부림쳤을까요? 그리고 자기 몸에 익은 대로 늘 어떤 문제만 터지면 도망가고 어떤 문제만 터지면 자기중심적으로 숨어버렸던 그 자신의 패턴을 이겨내기 위해서 얼마나 힘썼을까요?
마가가 어떤 과정 속에서 이런 영육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졌는지 명확하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마가는 그 삶의 여정 속에 산전수전을 겪었고 또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운데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고 다른 사도들과 더 깊은 관계, 자기로 인해서 깨워졌던 사도들과의 관계도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이루었음을 성경 부분 부분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지난 과거 속에서 있었던 연약함 실패 그것은 정말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실수와 허물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요.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실망할 때도 있고 오해할 때도 있고 뭔가 부족해 보이고 그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사 중이기 때문에 늘 고쳐지고 또 바뀌어지고 세워지기 위해서 부당하게 애써야 합니다.
그걸 우리 성결교회에서는 성화라고 말을 해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모두는 성화를 위해서 가는 사람들이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임직자들이 임직을 받고 나면 짠하고 완벽한 사람으로 임직자로서 이제 삶을 살아갈까요?
또 어떤 분들은 뒤에서 이렇게 팔을 끼고 임직 받았으니까 어떻게 하는지 보자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임직 이후에 여러분 교회 안에 문제가 일어나는 교회들이요. 제가 수없이 많이 보게 되거든요.
우리 지방의 내에 만약에 10개 교회가 임직을 했으면 제가 볼 때 8개 교회가 임직 이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심각한 기도 제목이죠. 제가 오늘 오후에 디테일한 내용들을 나눌 겁니다. 기도 제목으로 여러분 순식간에 우리가 변화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임직만 하면 그냥 아주 훌륭한 임직자가 되어서 그냥 교회 일꾼으로 세워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아니에요.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연약할 수 있어요. 부족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과정을 우리는 한 몸이고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같이 연약함이 보이면 잡아주고 끌어주고 밀어주고 함께 세워가는 겁니다.
임직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예요. 시간이 좀 흘러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때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한 장면이 골로새서 4장 10절에 나오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아까 전에 2차 선교 여행 때는 마가 때문에 선교 여행이 이렇게 갈라지게 됐고 따로따로 가게 됐다고 했잖아요.
이제 시간이 지난 이후에 이 마가가 어떻게 됐어요?
다시 바나바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1차 선교 여행 때 이 전도 여행 때 그 관계가 틀어진 이후 지금 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때인데 마가와 바나바가 서로 관계가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본격적으로 그 선교에 동행하고 있는 마가를 보게 됩니다.
심지어 이제는 감옥에 갇힐 정도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믿음이 이제 마가에게 주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모습 속에서 우리는요 우리도 소망을 품길 원합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요 아니요. 사람은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역사하시면 바뀌게 될 줄 믿습니다. 겁쟁이이고 도망자였던 이기주의자였던 마가가 이제는 죽음도 불사하고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품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인격도 우리의 관계도 변화되고 성숙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디모데에게 이렇게 또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와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다.
마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찾을 만한 그러한 존재가 되어버린 겁니다. 바울의 마지막 곁에서 바울을 보좌하고 바울에게는 없어서 안 될 존재로 마가가 세워졌음을 우리가 또 예측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는 이전에 우리가 알던 마가가 아닌 것이죠. 또 베드로전서 5장 13절을 보면 베드로도 마가를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무난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 하느니라.
이 마가는 베드로에게도 사랑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가 약간 이렇게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그리고 뭔가 처음에는 서먹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다고요? 보니까 바울에게도 사랑을 받았고 베드로에게도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변화된 마가는 이제는 누군가에게도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적인 관계의 역량도 친화력도 갖춰진 것 같습니다. 마가는 어느새 이제 베드로와 바울 양쪽 사이에 중재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관계에 있는 사람, 또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균형 감각이 있는 사람, 또 양쪽의 장점을 갖추고 배울 수 있는 그런 실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마가가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남길 수 있는 이제 그러한 신앙인이 된 것이죠. 여러 번 넘어졌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과거가 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난 가운데 성숙해 또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성숙한다는 말이 정말 맞습니다.
우리가 한 번 넘어지고 두 번 넘어지면 또 일이 틀어지면 나도 모르게 쉽게 포기하거나 끝이라고 이야기할 때가 참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특히 그래요.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절대 중간에 포기하거나 낙심하거나 중간의 평가로 끝내지 않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배혼 이불을 던져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던 마가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1차 선교 여행의 중간에 도망갔던 마가가 초대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누가 상상을 했을까요? 중간 과정에 만약 마가를 쉽게 평가해 버리고 마가에게 결론을 내려버렸다면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마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 공동체도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다음 주면 우리가 벌써 7주년인데요. 7년이라는 시간이 굉장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나름대로 우리가 평가도 해야 되죠. 근데 그 평가 과정 속에 결론 내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이루어가심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지금 현재 이 부족하고 연약함을 끌어안고 주님께서 더욱더 경고해 하시고 세워가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미래에 온전케 하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소망으로 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성급한 속단 포기가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내와 소망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데 장작이 되어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마가가 정말 무익한 존재였지만 유익한 존재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속단이나 포기가 아니라 인내와 소망이었음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부끄러운 과거, 부끄러운 과거를 간증하기 위해서는요. 현재의 모습이 온전해야 과거의 부끄러움을 간증하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그 부끄러웠던 모습들, 연약했던 모습들을 간증할 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과거에 있던 것도 품어주고 지금 현재의 모습 속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현재도 똑같이 살아가면서 그냥 과거의 이야기를 해봐야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마가가 마가복음을 썼고 누가와 함께 로마 선교에 공을 세웠고, 또 이제 나중에는 애굽의 알렉산드리 의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끄러운 과거에 마가의 그의 흔적은요. 이제는 기억에 남을 이유도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옛날에 이랬었다고 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때보다 더 멋진 삶을 살 때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우리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창립 7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주요 포인트로 리셋을 외쳤는데요. 리셋을 외친 이유가 뭘까요? 우리 안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지금 이대로 가서는 안 되겠다라고 하는 위기감 속에 우리가 리셋을 외치지 않았습니까?
근데 여러분 공동체적으로 리셋을 외치고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리셋을 외치고 있지 않다면 이거는 쉽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자신의 리셋을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어제보다 그리고 7년의 지난 시간보다 오늘이 내일이 더 우리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실수와 실패 없는 삶 삶, 순탄한 삶 참 복이죠. 하지만 실수하고 넘어져 수렁에 빠졌지만 다시 일어서서 힘껏 나아가는 그 모습도 역시 복인 줄 믿습니다.
재기된 삶 재기하는 삶은 결코 넉넉지가 않아요. 그냥 평탄하게 가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재기하는 삶은요. 타인의 시선을 이겨내야 합니다. 또 예전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해야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결단과 노력이 뒷받침될 때 고난의 과정을 이겨내고 재기할 수 있습니다. 재개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어요. 그 과정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죠. 마가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재기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넘어졌고 실패했고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일어서서 끝까지 믿음의 인물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준 마가 사랑하는 동력자 여러분 지난 7년의 과정 속에 우리 안에 부끄러움도 있고요. 또 뭔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라고 하는 그런 아쉬움도 있고요. 연약했던 우리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리셋을 외치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표가 되질 않기를 원합니다.
창립 7주년 행사를 위한 과정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7주년이 지나고 난 이후에 8주년, 9주년, 10주년, 그 이후에 우리의 과정이 정말 이 시간들을 통해서 다시 점검되고 이제는 앞으로 온전히 나아가는 시작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포기는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주저앉게 하는 것은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늘 힘을 주시고 우리가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다시 시도하라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창립 기념주의를 맞이하면서 우리 안에 성령의 충만함 속에 다시금 일어서고 다시금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엇보다 변화는요 용기 있는 자 도전하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 기쁨임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지난 시간 속에 아쉬웠고 또 연약했던 것들은 주님 앞에 내려놓고 변화를 소망하며 다시 일어나서 한 걸음, 한 걸음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