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에 무슨 일을 했을까?
1896년 2월 11일,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조선 수도 한 가운데서 일어났다.
일국의 왕이 자기 집을 버리고 남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고종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민비가 일본인 패거리들에게 살해를 당하자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때 고종은 내시도 경호원도 믿지 못하여 파란 눈의 선교사들을 불러서 불침번을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럽 대사관으로 피신할 생각으로 의사를 타진하기도 하였다.
친일내각인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그는 2월 11일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일국의 왕이 국권 1번지인 궁궐과 근무처를 버리고 다른 나라 공사관에 자기 몸을 의탁을 한 것이다.
아래는 ⌜대한민국 징비록⌟332, 333쪽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다.
러시아공사관에 도착 첫날 고종은 유길준과 조희연과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와 이진호 체포령을 내렸다. 을미사변(민비시해 사건) 주동자로 낙인찍힌 자들이다. 을미사변 이후 내각 총리였던 김홍집 또한 체포하려했으나 “하늘의 이치가 매우 밝아서 역적의 우두머리는 처단되었다.(1896년 2월 11일 고종실록)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들어서자 김홍집은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보은으로 도주하다가 용인에서 역시 맞아 죽었다.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조희연, 장박, 이두황, 이범래, 이진호 등도 일본으로 도주하였다. 갑신정변 때 처단된 급진개혁파에 이어 온건개화파들이 아관파천 기간 중 모두 척살되었다. 이로써 조선에 남은 개화파들은 거의 절멸되었다.
13일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령을 내린 고종은 닷새째인 2월 16일 “경운궁(덕수궁)과 경복궁 수리가 끝나는 대로 환궁여부를 확정하겠다”고 했다. 그해 8월 10일 고종은 “궁내부와 탁지부가 경운궁을 수리하되 간단하게 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간단하지 않았다. 23일에는 경복궁에 있던 왕비 민씨 빈전과 왕들 초상화를 모신 진전을 경운궁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조선 왕실은 ‘이미 파천 전부터 명례궁(경운궁) 수선공사에 착수했다.
다음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결재한 것이다.
3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민영환을 파견했다.
3월 29일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4월 17일 역시 미국인 모스에게 평안도 운산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4월 22일 러시아인 니시켄스키에게 함경도 경원과 종성 사금광 채굴권을 양여했다.
7월 3일 프랑스 기업 그리러사(社)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양여했다.
9월 9일 러시아 상인 브리네르가 설립한 합성존선목상회사에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벌목과 양목 권한을 허락했다.
1897년 1월 18일 일본 황태후가 죽자 19일부터 27일까지 경운궁에 가서 상복을 입었다.
1897년 2월 20일 러시아 공사관에서 나와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고종은 아관 파천 기간에 조선의 자원과 각종 이권을 외국인에게 팔거나 양도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부국강병에 대한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실책과 부패에 대한 각성과 국민 민생복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국가 이권을 팔아먹으면서 황제로 화려하게 등극할 꿈을 꾸며 황궁을 설계하고 황제 즉위식을 폼나게 할 구상으로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1897년 10월 12일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초대 황제로 전격 등극했다. 그는 경운궁 동쪽 언덕에 설치한 원구단에서 하늘에 자신의 황제 등극을 알렸다.
황현은 황제 즉위식과 원구단 제사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어째서 굳이 궁궐을 수리하여 새롭게 조성하는 공사를 해다는 말인가. 혹자는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이 외국 공관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 의외의 변란이 발생할까 두렵다. 그러니 새로운 궁권을 짓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로 변란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궁궐만 어찌 천상에 있을 수 있겠는가.”
개혁파 지식인 윤치호는 ‘세계 역사상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황제 칭호가 있을까?’ 라고 냉소하였다.
2023.1.22.주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참고 문헌
박종인 저, ⌜대한민국 징비록⌟,와이즈맵, 2019
부 기
1. 대한제국은 가난하였지만 황제는 대부호였다.
1899년 6월 22일, 고종은 국방부 격인 군부와 별도로 황제 직속 군사조직인 원수부를 창설했다. 황제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군사, 경찰을 부릴 수 있는 장치였다. 원수부 건물은 황궁인 경운궁 대한문 옆에 설치됐다. 각 부서장인 총장은 의정부 대신보다 위였다. 고종은 원수부와 군부에 해마다 예산의 40퍼센트를 투입해 군을 육성했다. 그 군이 담당한 업무는 황궁 경비와 활빈단 척결과 소요 진압이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군부대신은 25명이 바뀌었다. 평균 재임 기간은 87,6일이었다. 원수부 각 총장도 고종 마음대로 수시로 교체됐다.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 권한도 대폭 확대됐다. 홍삼, 광산 사업 수익은 물론 동학혁명의 원인이던 각종 잡세도 전격 부활시켜 내장원이 거둬들였다. 관세까지 탁지부에서 빼내 황제 직속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당시 세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반발하고 옳은 말로 원칙을 주장하여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황제는 내장원을 통해 물고기, 소금, 선박, 인삼, 땔감, 풀, 갈대, 소나무, 밤, 대나무는 물론 완도 우뭇가사리와 서천 연어와 동해안 함경북도 염전까지 세금으로 거두게 되었고 팔도 광산에서 나오는 돈은 대부분 황제 차지가 되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서 탈취한 권력을 민 씨 척족세력과 나누다가 민비 사후 혼자 독점하였다.
1895년 조선정부 세입예산은 480만 9,149원이었다. 세출 예산은 631만 6,891원으로 150만원이나 적자였다. 정부는 이 부족분을 국채와 다른 방법으로 보충했다. 청일전쟁 이후 1907년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진 빚은 1,300만원 이었다.
일본은 이 빚을 조선에게 을사조약을 강요하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조선 백성들은 빚을 갚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으나 한강투석에 불과하였다. 고종과 그 측근들이 속을 다 파먹고 껍데기만 남은 나라를, 억눌리고 천대받으며 살았던 백성들은 눈물과 분노로 바라보았다.
2. 일본 조슈번에는 존왕양이와 국가주의를 지향하는 혁명가들이 있었다.
일본은 1854년 페리의 내항으로 화친 조약을 맺었으나 1858년 불평등조악인 미•일 통상조약을 다시 맺었다. 이에 격분하고 경악한 일본의 각 번(藩)들은 대각성하여 존왕양이와 하나의 국가주의로 개혁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1867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메이지에게 통치권을 양도하는 ‘대정봉환’이 일어났다. 1869년에는 반독립국이었던 각 번들이 토지와 백성을 천황에게 반납하는 ‘판적봉환’이 일어났다. 그럼과 동시에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다. 그 후 1875년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집적거려 강화도조약을 맺고 침략의 기틀을 다졌다. 그 후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조선은 물론이고 타이완과 중국 동북부에 까지 손을 뻗혔다.
그러나 조선은 1873년 대원군 축출 이후, 민비와 민 씨 척족세력과 고종을 위한 나라로 전락하여 멸망의 수순을 차례대로 밟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