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고등학교 16회 동문회가 창립 38주년을 맞이했다. 1985년 첫발을 내디딘 이래 동문들의 끊이지 않는 열정과 자발적 참여가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여타 동기회에 비하면 기금의 규모는 소박할지 몰라도, 서로를 향한 마음만큼은 그 어떤 모임보다도 넉넉하다. 이번 제주 여행은 동호회가 발족한 이래 처음으로 떠나는 뜻깊은 여정이다. 3박 4일의 경비 중 개인 부담을 덜고 부족한 부분은 동문회 기금에서 기꺼이 지원하기로 뜻을 모으니, 총 37명의 반가운 얼굴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6월 19일 월요일,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푸른 바다를 건너
제주공항에 내린 시각은 오후 2시 30분. 약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비행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이국에 와 있는 듯 설렜다. 이번 여행길을 든든하게 이끌어 줄 이영호 성남시 걷기협회장과, 성동고에서 15년간 제자들을 가르친 한백철 동창과의 반가운 상견례를 마치고 청구관광버스에 올랐다. 첫 목적지는 제주 남동쪽 해안에 우뚝 선 송악산. 버스로 1시간 20분을 달려 오후 4시 15분경 송악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웅장한 송악산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남기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은 뒤, 본격적으로 둘레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진 송악산은 여느 화산과는 그 생김새부터 달랐다. 높이 104m의 주봉을 중심으로 서북쪽에는 시원한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분화구 속에는 검붉은 화산재가 여전히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탁 트인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니 가슴 한구석에 쌓였던 답답함이 단번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제주올레길 10코스이기도 한 이 길은 아름다운 풍광 뒤편에 아픈 역사의 흔적을 함께 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 패전을 앞에 둔 일본군이 연합군을 향해 자살 공격을 감행하고자 제주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동굴진지들이 해안 절벽을 따라 17기나 뚫려 있었다.
송악산 일대에만 60여 개가 넘게 남아있다는 이 진지들은 참혹했던 전쟁의 실상과 일제 침략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전망대에 오르자 푸른 제주 바다가 넘실거렸고, 그 너머로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아련하게 눈에 들어왔다. 한편, 송악산 자락의 목장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은 세월의 아픔은 잊은 듯 평화롭기만 했다. 아쉽게도 공사 중인 구간이 있어 전체를 다 둘러보지 못했지만, 1시간 반 동안 바닷길을 누비며 걸은 뒤 저녁 식사 장소인 '난드르포구'로 이동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들'이라는 제주 방언처럼
운치있는 이름의 포구에서 싱싱한 잡어회와 칼칼한 매운탕으로 푸짐하게 입과 배를 호강시켰다. 오늘의 유쾌한 여정을 마무리하고 여장을 푼 곳은 '제주 와일드라는 숙소였다. 여느 호텔이나 모텔과 달리 일하는 이들이 잠시 머물며 쉬어가도록 조성된 정갈한 곳으로, TV나 전화기 대신 싱크대가 설치된 구조가 독특하면서도 정겨웠다. 2인 1실로 배정된 깔끔한 방에 누우니 오늘 하루 함께 걸었던 동문들의 웃음소리와 제주 바다의 바람 소리가 귓가에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창밖의 깊어가는 제주 밤하늘을 등지고, 소중한 추억을 품은 채 스르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