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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 허백련(1891-1977)
서울을 벗어난 전라도 땅에서 전통 회화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소치 허유의 방계 집안으로 허백련은 진도에서 태어났다. 소치가 종고조부가 된다.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에게 그림을 배웠다.
서울로, 일본으로 떠돌이를 하면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일본에서는 남종화를 하는 소실취운에게 배웠다. 서울에서는 인촌 김성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다.
제 1회 조선미전(1922)의 동양화부에 1등이 없는 2등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소림과 심전의 제자가 아니면서 선전에 2등을 하였다. 6회까지 선전에 출품하였다. 이후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나 꾸준히 전통 산수를 그렸다.(약 2만 점은 되리라고 추정한다.)
선전으로 이름을 날린 화가였으나 서울은 그의 태생지가 아니었다. 소림과 심전의 제자도 아니었다. 1930년대 후반에 광주로 내려가서 무등산에 자리 잡았다.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면서 전라도에 나름대로 남종화풍의 화단이 형성되는 데 받침이 되었다. 그의 화풍은 작은 시도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남종화풍을 벗어나지 않는다. 전라도 땅에 남도 미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전라도에는 소치 허유의 직계 손인 아들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목포에 자리잡다)이 한 계열을 이룬다. 따라서 의제의 전통 회화와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전라도에는 두 계열의 화가들이 많이 활동한다. 6대가 중의 1명이다.
의제 허백련
(1891 - 1977)
의제 허백련을 말하려면 먼저 소치 허련의 남종화풍을 이야기 해야한다. 추사 - 소치로 이어지는 남종화풍이 전라도에서 전통을 이어 현대에 이르게 한 화가가 의제 허백련이기 때문이다. 허백련은 소치와 같은 진도 태생이고, 먼 집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치가 20촌 할아버지이고,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이 21촌 할아버지가 된다.
8세 때에 진도에 유배 중이던 유학자 정만조로부터 한문을 배우므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의제(毅齊)라는 호도 정만조가 15세 때 지어주었다. 11세 때 운림산방을 찾아가서 허형에게 그림을 배웠다.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굳세고 튼튼하며 기운과 성질이 단단하고 과감한 것 생김새가 질박하고 표정을 꾸미지 않으며 말씨를 더듬는 듯 느린 것은 仁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의(毅)자를 따서 의재(毅齋)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1905년에 진도의 광신학교에 입학했고, 1910년에 서울로 유학갔다. 서울에서 현 중앙고교의 전신인 기호학교에 입학했다. 1912년에 일보의 교토(경도)로 유학을 떠나서 1913년에는 동경으로 옮겼다. 동경에서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사귀었다. 1913년에는 메이지 대학의 법과에 청강생으로 강의를 들었으나 1915년에는 법학 공부를 그만 두고 그림 공부로 바꾸었다. 그는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고무로 소이온을 찾아가서 다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일본에서 인삼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했다. 고무로 소이운은 2회 조선미전의 심사위원을 맡으므로 일정시의 한국 동양화풍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도 허백련은 3등을 했다. 그러나 유학 중에는 가난하여 신문배달도 했다. 인상 장사도 가난 때문에 하였을 것이다.
일본서 공부할 때에 말을 많이 더듬어서 교정받기도 했다.
유학 중에 일본 니키타에서 개인전을 두 번이나 가졌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개인전을 두 번이나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강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1918년에는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귀국했다. 다시 일본으로 가기 위해 목포에 들렸다가 미산 허형을 만나서 미술 교류를 했다. 그러면서 목포와 광주에 개인전을 가졌다. 이후 근거지를 서울로 옮겼다. 서울에서 생활은 인촌 김성수가 뒤를 봐 주어서 그림을 계속하여 그릴 수가 있었다.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동양화부에 2등으로 입선했다. 동아일보가 후원하여 개인전도 가졌다. 선전이 그가 화가로 두각을 나타내게 해준 바탕이었다. 그는 6회(1927)까지 계속하여 출품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출품하지 않았다.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동안에 관학파 미술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서울의 흐름과 거리를 두었다. 대표적으로 전라도에서는 진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소치 허련의 전통이 아들인 미산 허형에 이어졌고, 허형은 의제 허백련과 아들인 남농 허건을 제자로 두어서 아버지의 남종화풍을 전수해주었다. 이로서 남화풍 그림이 목포, 광주로 퍼져나갔다.
1922년에 허백련은 서울 보성고보에서 88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의 평이 한국의 산수가 아니고 대부분이 중국 강남의 산수라는 것을 보면 전통 산수화라면서 중국화를 모방하는 형식을 그렸다. 조선미전에 2등을 한 허백련의 소감도, ‘물형(物形)을 취하기 보다는 정신을 풍부하게 그린 그림을 숭상’한다고 함으로, 그가 지향하는 그림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미전에 출품한 허백련의 작품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작품이 뛰어났다고 볼 수 없다는 좋지 않은 평도 있었다. 왜냐면 그의 일본인 스승인 고미로 소이온이 심사위원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런 평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선미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허백련은 전라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후원회를 조직하여 광주에서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
1931년에 화가를 평한 글에는 허백련을 호남에 숨어 있는 대가로 표현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1932년에는 서울에서 김은호-허백련 2인전을 조선일보가 소개했다.
광주에 내려와서 뿌리를 내린 허백련은 연진회를 조직하여 제자를 양성하면서 광주 화단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에 와서 4년을 살던 변관식에게 배운 정운면은 의제와 다른 화풍으로 서로 대립적인 경향을 보였다. 일부에서는 허백련의 그림을 ‘너무 고답적이고 중국 냄새가 강하다.’라는 평도 하였다. 정운면이 1948년에 타계 함으로 광주 화단은 허백련 중심으로 구성되어갔다.
1938년에 연진회를 만들었을 때 노형규가 쓴 발기문은 이렇다.
“예술을 배움은 진경(眞境)에 드는 일이요. 양생을 진원이 이르도록 하는 일이다. 우리가 예악(禮樂)으로서 모아 놀고 값지게 보내기 위해서 연진회를 세운 것이다.”
발기문만 보아도 연진회의 성격, 나아가서 의제의 화풍을 미루어 짐작이 된다. 일제 강점기 때의 미술평은 대체로 ‘예술적인 새로운 발전이 없었다.’로 모아진다. 그러니 이런 평이 유독 의제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때 활동한 동양화가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평이이기도 했다.
1939년에 제1회 연진회의 회원전이 열렸는데 이것은 회관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허백련과 관계가 깊었던 김은호와 변관식이 찬조 출품하기도 했다. 1940년에 제2회 연진회전이 열렸다.
허백련은 회원들을 일주일에 하루씩 모이게 하여 체본을 그려주거나 써주어 이를 임모하도록 했고, 그것을 강평해 주며 회관 안에 전시도 하여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발견해서 고쳐 나가도록 했다. 이러한 그의 교육은 곧 많은 회원들을 불러 모아 연진회는 광주에서 서화교육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허백련의 지도 아래에 정운면, 허행면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김정현(金正炫), 조복순(趙福淳) 같은 뛰어난 신진 화가를 배출했다. 또한 허백련의 체본을 갖고자 하는 지역 유지들도 모여 들면서 연진회관은 교유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였던 것도 주목된다.
광주 지역에 남종화를 부흥시키며, 현대 화단에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는데 기여했다. 연진회는 1944년경에 문을 닫았다.
허백련은 남농과 함께 한국남종화를 남도의 전통화풍으로 자리 잡게 한 중심인물이다. 허백련은 중국의 전통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남도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감성이 녹아든 사의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허련에서 시작된 진도 남종화의 맥은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이 말이 전라도 지방의 화풍을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말이다. 의재의 산수에서는 밋밋한 황토산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전라도 산의 진경을 그린 것으로 1951년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수묵과 담채로 그린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해 한국적이면서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남도화풍이라는 말도 한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무등산 다원(無等山茶園)을 인수하여 축산 농장을 경영하면서 화필 생활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1947년에는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집안의 청소년들에게 농사 기술을 익히며 학업도 닦게 하는 등 사회사업에 심혈을 기울린 흔적이 양림동 등 곳곳에서 흔적을 볼 수가 있다, 1948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정식인가를 받았다.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그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 서, 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회고전을 가졌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받았으며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 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의제가 무등산에 기거하다 타계하기까지 30여년 동안 춘설헌은 그의 작은 우주이자 화실이었으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잦은 문화의 산실이다. 여기서 남화의 개척자 의제 허백련이 그 화풍을 전수하며 후학들을 길렀다. 사시사철 차향이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섞여 마르지 않는 곳이다. 의재는 이당 김은호를 비롯한 친구들이 서울에 올라와 조선미술관을 만들어 보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연진회를 생명처럼 아꼈다. 그는 항상 "그림을 그리는데 서울과 시골이 따로 있는가. 중국에서도 남종화는 강남지방에서 꽃 피우지 않았는가?" 라고 강조하며 이 곳의 화가들에게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전수하여 남화의 일가를 이루었다. 따라서 그는 호남에 남도화라는 전통이 뿌리내리게 했다.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의제는 일본에서 기법을 익혔으면서도 일본 색채에서 탈피하면서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하여 굳게 토착화하였다. 짙은 채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아 서민적이다. 화려하거나 부담주지 않고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제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도 질리지 않는 청국장 같아서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김은호와 함께 일본에서 일본 남종화를 배웠지만 김은호와는 전혀 다른 화풍의 그림을 그렸다.
작품 활동 초창기에 화조, 송하 등에도 손을 댔으나 만년에 들면서 산수화만을 즐겨 그렸으며,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 엷은 담채(淡彩)가 아니면, 묵으로 그린 그의 수묵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말년에 그를 기리는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허백련이 묵필로 세상에 이름을 얻는데는 무엇보다 이미 일가를 이룬 호남 남화 집안 내력과 타고난 기질, 더불어 그에게 정신적으로나 현실 활동에서 큰 힘이 되어 준 스승과 화우들의 격이 있는 인맥들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념관에는 허씨 화맥의 종조격인 소치 허련을 비롯, 미산 허형과 무정 정만조, 고무로 스이운 등 묵필과 예술정신을 형성하는데 큰 가르침을 준 스승들의 서화 묵적과 관련 사진자료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의제를 말하면 반드시 해야할 말이 또 하나가 있다. 차사랑이다. 의제는 산 기슭에 차나무를 가꾸어 가공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늘 차의 생활화를 강조하며
차나무의 곧은 마음을 좋아했으며 자녀의 결혼식 폐백도 술 대신 녹차를 이용했다. 차나무는 옮기면 죽는다고 한다. 이처럼 결혼했으면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면 백년해로 하라는 뜻이다.
무등산 춘설헌 주인 의제와 찻잔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이은상은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읊었다.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다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 잔 향내 맡고
다도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명예 철학박사 학위(전남대학교)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 회원이기도 하였던 진도가 낳은 의제 허백련 선생님이 말년에 광주 무등산 골짜기에서 춘설헌을 지어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 화가를 조명하기 위해서 여러 자료를 모으다 보면, 좋게 말하는 글도 있고, 나쁘게 말하는 글도 있다. 그러다보니 평이 엇갈리는 것을 흔히 본다. 이 글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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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봄에 갓다온곳 맞죠?
맞습니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