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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회님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아침 햇살처럼 빛난다 " 라는
어느 사랑의 글귀처럼
우리 님들의 마음은
고운 햇살의 봄날같이
향기로운 꽃향기를 날리고
무더운 여름날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쉴 수 있는 쉼의 공간을 마련해 주며
청명하고 맑은 가을 햇살같이
우리 님들의 정감어린 사랑의 마음은
맑고 깨끗합니다
추운 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주고 안아주는
넓고 깊은 우리 님들의 배려함에
너그러움도 없고 늘 채워짐이 부족하고 미흡한
아직 두 잎 밖에 안 되는 내가
우리 님들에게 " 고맙다 " 는 말을
미소와 함께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메울 수가 없다 "는
옛 말이 있듯 두 잎이 세 잎 되고
세잎이 " 행운의 네잎" 이 되어도
다섯 잎을 채우려는 끝없는 욕심을
맑고 청명한 가을 문턱의 아침 햇살을 받으며
행운의 네잎 에서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멈출 수 있는
그래서 소박하고 아름답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날이 우리 회원님들 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앞에 올수 있기를..
행운의 네 잎 크로바를 드리고 가렵니다
* 우리 님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
우리 님들~건강이 최고의 재산 입니다
늘 건강 하시고 즐거운 시간 만드세요~
대합단위회 박 광호
여자 친구의 눈물
저의 사랑하는 친구는 참 여자답고
그 마음 또한 온화하고 얌전한 그런 친구랍니다.
그런데 남편이 나이가 많다보니 그 삶이 편치가 않아
그 눈이 때로는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볼 땐 마음이 아프답니다.
얼굴은 고생 없이 살아온 것 같이 온화하고 곱게 생겼고
예쁘장한데 손은 정말 고생 많이 한 손입니다.
이야기 하다가도 목이 메이는 것을 보면... 손재주도 있고 머리도 괜찮은데
삶에 찌들었는지 잘 웃다가 도 기운 없어하는 모습에 안타깝습니다.
간신히 터전마련하고 한 십년 살았지만
그마져 남편이부동산에 투자했다가 날리고
나이 들어 빈손 들고 월세에서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생활이 끌어가는 친구가 안쓰럽습니다...
남편이란사람은 삼년동안 간신히 밑천조금 만들어서 해주면
한 달도 못 다니고 작네 힘드네 하면서 나오고
이래저래 빈손 되고 아무것도 안하는 남편이 미워서 못 참겠답니다.
믿음 생활에서 위로받고 매달리고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못 참고 살겠다네요. 명목상 보기만 부부지
물질로나 부부의 의무란 것은 아예 없는 모양입니다.
생활에 조금만이라도 도움만 주면 다 접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도 원망도 않겠다는
친구가 넘 안스러워서 도와줄 수도 없는....
내 삶이 또한 넉넉지 못해서 그렇답니다. 그 친구 남편이 오십 중반 이지요
대학생아이 하나남았구요
멀쩡한 사람이 왜 그렇게 쓸 때 없이 세월만 죽이고 사는지 이해가 안 돼 더군요.
마누라 모르게 쌀을 40kg 주었지요 세 번인가 ?
도와주자니 밑도 끝도 없기에 아예 단념을 했지요
친구가 참 안스럽워서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오십이 되기 직전인데
외모나 마음이나 빠질 것 없이 참 예쁜데 어쩌나 여~~
참고 살아야 한다고 위로를 하지만 더 이상 어떻게 참고 사냐고
반문하는데 할 말이 없더이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답이 생각나질 않습니다.
참 세상엔 별사람 별스럽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루속히 안전한 생활에서 마음 편히
살아가는 친구의 얼굴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대합단위회 김 무현
고향친구
같이 힘든 길을
걸어 온지도 어언 50년은 됨직 하구나.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언 반세기
사랑방에 나란히 누워 우리의 미래를 설계를 하며
배고프면 라면에다 김치의 그 맛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추억이 정말 재미있었지
싸움도 한번 했었지 어머니의 말씀이 두 번 더 싸워라
그래야 친한 친구가 된단다
가슴이 뭉클했었지 호된 꾸지람을 할 줄 알았지 !
서로의 주장으로 깨어지기 일보 전 까지 갔던 친구!!
서로 오가는 정 멀리 울산까지 놀러갔던 친구
많은 돈은 아니더라도 음식 값은
서로 내겠다고 짜증까지 내던 친구!!
집안의 숟가락 숫자까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허물없이 지냈던 친구!!
남자들이 친해지니 각시들도 따라서
어느 누구보다도 친했던 친구!!.
친구의 촉촉한 눈을 나는 잊지 못한다.
친구야 ~~그 공 표내지 않고
친구 자존심 다독거려주는 친구야~~
부디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정 나누며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매곡로 43 호반아파트 201-402
박 동석
봄 비
오랜만에 봄비가 촉촉이 내려주네요
새벽부터 내리드니 늦은 오후까지
봄을 재촉하는 비
계절은 우릴 버리지 않았나 봅니다
하필이면 정월대보름날 !
이제 버들강아지 움트고
개나리 진달래꽃이피겠지요
후레지오도 곱게 피어나고요
삶이 우리에게 고통스런 속내를 주기도 하지만
산다는 게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울 수가 없네요
내리는 비와함께 좋은 저녁 보네세요
대합단위회 김 봉순
3월의 향기
삶의 영양제가 되는 봄비 !
우리 농부는 씨 뿌리고
자연은 봄비 맞으며
나뭇가지 에 물이 올라
고로쇠나무는
지난해 아픔을 잊고 긴긴 겨울에
몸속에 물을 가득 모아서
여름의 가뭄을 준비하는데
사람들은 염치없이 해마다
구멍 내여 호수 곱고
실 피줄 뽑아가지요
봄 향기 매화꽃 지고 나니
연두색 잎 파리 기름칠 한 것처럼
윤기 나는 잎 새가 마법 같은
청량제가 되었읍니다
대합단위회 문 정순
마른입술
마른 입술로도 그대를 부르면
가슴까지 젖어옴 을 느낍니다.
이슬처럼 촉촉한 그대의 눈빛에
사로잡힌 것은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를 가슴에 안았을 때
어린 새 가슴처럼 고동치는
사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고독한 세상
서로를 기댈 수 있는 사랑을 위하여
마음의 빗장을 풀었습니다.
둘이서
하나가 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 호박 같은 친구 야**
얼마 만인가 오랜 만이구나
화사한 얼굴 로 마주 앉은 너의 모습
너무나 행복해 보이는 구나
따뜻한 차 한 잔에 우리는 우정은 깊어가고
우리들의 살아온 인생과
이야기속이 꽃을 피운다
너와 나와 살아온 인생의 의미는 다르지만
그래도 너와 나와 우정은 변함이 없겠지
한잔의 차속에 우리는 따뜻한 우정을 마신다
한번 씩 만나 깔깔 대면
맘껏 웃을 수 있는 친구
얼마나 좋으니 나 이 순간 행복 하단다
난 -너를 사랑 한단다 우리 오래 오래 ,,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
마음을 다스려야 길이 보인다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어느 한 산꼭대기에서 한 소년이 약간
평평한 곳을 골라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돌탑을 쌓고 있었다.
그 소년의 일은 무거운 돌덩이를 산 밑에서부터 가지고 올라와
산꼭대기에다가 탑을 쌓는 것이었다.
놓여 진 돌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기 위해선 한 나절이나 걸렸다.
소년은 밥을 먹는 것도 거르고 돌탑 쌓는 일에만 전념 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걸렸다.
심신이 녹초가 되고 정신이 혼미해질 쯤 돌탑은 드디어 완성되었다.
너무나 기쁜 소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스승에게 돌탑을 다 쌓았다고 아뢰었다.
스승은 소년이 찾아 와 진리의 길을 깨닫기 위해 제자 되기를 간청했을 때.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돌탑을 쌓아야 한다. 고
말한 노승이었다.
노승은 많은 사람들이 서로 그의 문하에서 배우길 원할 정도로
티베트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매우 유명한 선승이었다.
그런데 노승은 소년이 쌓아 올린 돌탑을 쭉 한번
훑으며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손으로 돌탑을 허물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향해 '다시 돌탑을 쌓아라!
그 대신 산 아래에서 새 돌을 갖다 쌓아야 한다.' 라는
말만 남기고는 산을 휘적휘적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너무도 기가 막혔지만 소년은 노승이 시키는 대로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 등에 돌을 지고 날라다가 탑을 쌓기 시작했다.
또 다시 몇 달이 걸려서야 힘들게 돌탑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노승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소년이
힘들게 쌓은 돌탑을 무너뜨려 버리고는 산을 내려갔다.
서서히 소년의 마음에는 노승에 대한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년은 노승의 제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으므로
노승이 시키는 대로 다시 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힘들게 쌓은 돌탑이 또 완성되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인정해 주겠지, 하는
마음을 갖고 돌탑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그런데 노승은 와서 보고는 또 다시 무지막지하게 허물었다.
소년의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노승에게 도대체 '스승님! 왜 그러시느냐?' 고
따지고는 배움을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 때 마음속에서 오기가 발동했다.
이왕 시작한 일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스승이므로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도 작용했다.
자신이 공들여 힘들게 쌓은 탑을 노승이 인정해 줄 때까지
기필코 쌓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돌탑을 다 쌓았다고 보고하면 노승은
다시 돌탑을 무너뜨리는 일을 반복했다.
자기와의 싸움을 하듯 소년은 자포자기의 심정과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다시 돌탑을 쌓았다.
소년이 돌탑을 쌓은 것을 무너뜨리고 내려가는
노승의 얼굴에는 서서히 만족스러운 온화한 모습이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수 없이 소년이 돌탑을 쌓고 그러면
노승은 그를 무너뜨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소년이 몇 년에 걸쳐 15번째로 돌탑을
쌓았을 때 마침내 노승은 소년에게 말했다.
"그간 고생 많았다. 이젠 내 제자로 받아주마."
소년은 노승에게 큰 절을 하고는,
"스승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쌓은 돌탑을 왜 그렇게 번번이 무너뜨리셨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미소를 지으면 말했다.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너의 마음에는 수많은 잡념,
아집이 가득 차 있었다.
그를 다스리지 않으면 너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을 훈화시키는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돌탑 쌓기를 통해 네 마음속에 가득
찬 나쁜 응어리를 빼내려 했던 것이다."
소년은 크게 깨달고는 스승의 가르침을
쫓아 정신 수양을 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에 자신의 깨달음을
더해 기공과 운행에 중심을 둔
수신 법을 체득해 자기성찰에 의한 진리를 체득하였다.
그 후 티벳 정신사에 영원히 빛나는 성자의 자리에 올랐다.
성좌에 오른 소년은 자신의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길이 보인다.' 라고
말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각자 자신의
삶을 통해 아집을 버리는 무욕이 최고의
깨달음을 달성하는 길' 임을 갈파하였다.
그 소년의 이름은 아시아의 소크라테스로
불리는 밀라레파(Milarespha)이다.
그리고 소년을 가르친 스승은 불교의 위대한
학승인 마르파(Marfa)이다.
성공은 인내의 노력 끝에 맺는 열매이다.
밀라레파가 소년시절 돌탑을 쌓는 일이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오늘 날
세인에게 회자되는 위대한 불교의 성자라는
호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하다보면 뜻대로 진척이 안 된다거나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가시적인 성과가 안 보일 때
내가 왜 이 일을 할까?' 하고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맨 처음 품은 뜻이 확실하다면 다른 것에 눈을
돌리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오로지 뜻을 관철하려는
강한 집념을 보여야 한다.
모든 잡념을 물리치고 자신이 하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 일에 몰두하다 보면 다른
일에 신경 쓸 일이 없게 되고,
그 일에만 매달리게 되어 뜻을 이룰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머문 곳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다.
포기하려는 마음 한 구석의 못된 유혹을 과감하게 물리쳐 일의
완성 끝에 다가오는 꿀맛 같은 성취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자.
그리고 자만과 오기를 버리고 겸손과 순종의 미덕을 배워
어디서나 자신이 빛나는 존재로 대우 받도록 만들자.
창녕읍 교리 260번지 신한농약 종묘사
하 낙 홍
신불산 산행
울산에 명산인 신불산 을 찾아 오르기 시작했다
시월 초입이지만 산에는 아직 가을을 느낀다.
나의 정답게 지내던 택시기사 하던 친구와 같이 산행 하였다
어쩌다 올려다본 하늘이 눈이 부시게 파래서 가을의 초입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래 만에 산행이건만 스스로 대견스러울 만큼 잘 걷고 있다.
내가 대견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산행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서 걱정을 했었다는 말이다.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것이 머리 쓰는 일 보다는 단순하기도하고
내적성에 맞는 일이라는 걸 요즘 들어 자주하게 된다
산이 좋아서 무턱대고 배낭을 둘러메고 산을 찾았다.
누군가 우스게 소리로 “내려올 산을 땀 흘려 뭐 때문에 올라가느냐”고
하는 산행을 한건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머릿속을 정리해서 버릴 것과
남길 것과 해결 할 것을 구분이라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집에서는 왠지 내키질 않고
걷다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듯싶기도 해서였다.
툭툭 떨어지는 상수리 소리가 크게 들릴만큼 평일의 산은 조용했고
어쩌다 마주치는 등산객은 그림자처럼 스처 지나 갈 뿐 내 생각을 방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것 만 전혀 생각이란 게 없다
그저 가파른 길을 오르노라면 숨이 가쁘고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내 숨소리도 평온해지길 반복하는 동안 얼굴의 땀은 바람에 말라 혀끝의 맛이 짜다.
산중턱에 오르니 몇몇 아줌마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줍고있다.
매표소 입구에 “다람쥐 양식인 도토리를 주워가지 말라”고 적혀있는걸 본 기억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의 힘 인 아줌마들이 산에서도 부지런을 줍고 있다.
내경험에 의하면 그중 몇 명이나 도토리묵을 해서 식구들이 먹을 수 있게 해줄지 의심스럽다.
도토리가 묵으로 밥상 위에 올리기까지의 수고로움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보니 길옆 숲에서 어떤 아저씨가 무언가를 열심히 캐서 비닐 봉투에 담고 있다
멀리서 볼때는 보기 드문 풀뿌리를 캐는가 했는데 다가설수록 거무 티티하니 풀 종류는 아니고 고목 뿌리라도 캐나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땅에 묻힌 비닐 쓰레기를 파서 봉투에 담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 옆에는 주워 담은 쓰레기봉투가 놓여저 있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을 하시는구나 싶기도 하고 곁에 가서 수고하신다고 인사하니 “네”
음료수와 소주를 한병 드리더니 고맙습니다 하시길레 저의 마음은 한결 편안함과 기분이 무척이나 좋은데 !
저런 분이 계시기에 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청정한 산이 유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오르막에 이어 양옆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평탄한길이 나타난다.
숨결이 잦아들며 몸이 편안해지니 마음도 평온해진다.
오르막이 힘들었던 만큼 평탄한길이 주는 편안함이 크게 느껴진다.
올라가는 산행도 오르막만 있지는 않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히 조합되어 힘이 들긴 하지만 오르다보면 정상에 다다른다.
산행의 묘미는 오르막만 있거나 내리막만 있지 않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적으로 연이어진다는 것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내리막이 나타나 고점에서 저점으로 자연스럽게 전환시켜준다
내리막은 오르막으로 인해 기쁨이 더 크고 오르막은 내리막이 있어서 견딜만하다.
사람 살아내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싶다
힘든 시기가 있었으므로 지금의 삶에 감사할 수 있고 지금의 삶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굴곡 없는 삶이 편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인생의 묘미는 굴곡진 삶 뒤에 얻은 평온한 삶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산행을 하면서 해보았다.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상진2길 29 세진빌라202호
신 용수
대문 앞에 소년
옛날 한양근교에 자리 잡은
어느 기와집 대문 앞에는 해질 무렵이면
한 낯선 소년이 말없이 서 있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년은 옆구리에 항상
책을 끼고는 대문 앞에서 글 읽는 소리 듣고는
돌아가곤 하였다
그 집은 한양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진사 댁으로 사랑채에서는 이 진사의 가르침에 따라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소년이 그러기를 한 달이 지나던 어느 날
그 집 하인 하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것도 날마다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소년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이 진사에게 알렸다
이 진사도 대문을 드나들며 소년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매일 찾아오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진사는 직접 소년을 만나려 나갔다
“너는 날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서 있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예, 저는 진사 어른께 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말씀 드릴수도 없는 처지라서 안타까운 마음에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래 ? 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 들어보자”
이 진사는 사랑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들어갔다
“주 상호라 하옵고 나이는 열 두 살입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글방 선생을 하고 계신데 저는 열 살에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서울에 왔습니다“
이 진사는 주 상호라는 소년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이며 태도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결정을 내렸다
“오냐.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내일부터 내 집에 와서 공부해라”
그 소년은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일년만에 천자문을 다 외우고 남달리 머리가 띄어났다
명심보감 등 선생님이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던 그 소년이 먼 훗날
한글 연구의 선구자가 된 주 시경 선생님이시다
그의 업적은 찬란한 가운데서 피어났다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갈마치로 302 성님우림라이온스밸리5차A동805호
대합하이프텍 대표 박 재 룡
안 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총성이 울린 후
세상을 향해 포효한 목소리.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을 저격하고
대한 만세를 외친 조선 청년 안중근.
불공정한 일본 법정에서 고작 공판 7일 만에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의 마지막 부탁은
한 가지였습니다.
"사형집행 날짜를 한 달 남짓만 늦추어 줄 수 있는가?
꼭 완성하고 싶은 책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무시했습니다.
이제 막 서문과 첫 장을 마친 1910년 3월 26일
광활한 대지가 눈물에 젖어
하늘도 슬퍼서 봄비의 눈물을 흘리던 그 날
안중근 의사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써 내려간 '동양평화론'
'수백 년 동안 유럽 열강을 이끈 것은
도덕을 상실한 마음이며 귀중한 생명이 무수히 희생되니
이들의 시체로 바다를 이루는 날들이 끊이지 않는다.
서양이 동양을 침탈하는 암울한 현실에서 힘을 다해
방어하는 것이 제일가는 방법이다.'
안중근 의사는 조선, 중국, 일본 등
모든 아시아 민족들이 서로 이해하고 도와 가며,
서구 열강의 부당한 침략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화합을 열망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테러리스트다.'
2014년 1월 20일
일본 관방장관 정례회견에서 일본인들은
안중근 의사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습니다.'
대한제국을 강제 침탈한 조선 총독부와
독립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일본군
독립투사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본 경찰 등
안중근 의사는 명확한 대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항일투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안중근 의사는 한·중·일을 비롯한
모든 동양 민족이 협력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의 부당한 억압 속에 죽어가면서도
그들과의 화합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평화사상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싶습니다.
울산광역시 북구 진장동 641-2 지오자동문
신 상 규
깨진 두레박의 지혜
옛날 어느 마을에 성질이 포악하고
하루하루 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항상 마을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남자는
'나처럼 쓸모없는 놈은 노력해 봐야 소용없어'라고
말하며 그냥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어느 날
남자가 마을 대로에 서서 술을 내놓으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거친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남자를 피하는 가운데
한 노인이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술을 원하거든 내 부탁을 잠시 들어주게.
그러면 자네가 원하는 술을 대접하지."
술을 준다는 말에 남자는 노인을 따라갔습니다.
노인은 바닥이 조금 갈라져서 물이 새는
두레박을 남자에게 주며 우물물을
길어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어르신. 주신 두레박이 깨졌습니다.
이런 거로 물을 어떻게 담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으면 술을 주지 않겠다는
말에 남자는 물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깨진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두레박의 물은 반이 새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남은 절반의 물이라도 계속 길어 올리자
어느 세 물독이 가득 찼습니다.
드디어
가득 찬 물독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노인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들고 있는 깨진 두레박이 쓸모없어 보여도
꾸준히 노력하면 물독을 가득 채울 수 있네.
자네도 조금은 흠이 있는 사람이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것이 있을 터이니
삶을 쉽게 포기하지 말게나." 노인은 부엌을 보며
“할멈 농주 한 사발 가져 오렴”“네”
“술을 준다고 약속을 했는데 꼭 지켜야지” 하니
젊은 청년이 “할아버지 저 술 안 해도 괜찮아요”
무름을 꿇어 머리를 숙여“제2의 인생을 다시 살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하며 잘못 살아온 것을 눈물을 흘리면서
할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그만 할아버지를 안고 엉엉 울었읍니다
불가능은 없다고 말하지만
절대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해버린 일은 절대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로 영원히 남아 버립니다.
제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시도에서 나옵니다.
시도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그 가능성이 0%입니다.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양지5길67 금탑
성 종 대
가난한 시인
편집부장 김 판 일
아직은 성숙하지 못한 필력
가방끈이 짧은 탓으로 배우지 못한 나는
가난한 시인이어도 좋다
화왕산 산봉우리에 떠오르는
아침에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조그만 한 소망을 기도하며
저녁노을이 짙어지면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어둠을 기다리는 밤,
하나 둘 별이 빛나고
그런 밤 부를 수 있는
시골의 밤은 정말 아름답다
하루라도 정의롭지 않은 일에 물들지 않는
은혜에 배반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날 저녁에는 까만 수정체
대지위에 차분히 내리고
귀뚜라미가 부르는
밤의 노래에서 즐거움을 얻고
풀잎에 내린 이슬의 맑은 속을
바라볼 줄 아는 날
그날따라
아주 붉은 저녁이 어둠에 들고
기억이 하나둘 지워지는 밤
대나무 잎에 스치는
바람의 날개로 꿈길을 걷듯
눈부신 하늘을 찾아 사뿐히 날아간다면
내 가난한 삶이,
가난한 시가 어찌 부끄러우랴
한 세상 잠시 머물다 감을
내 어이 애달프다 하랴
우포의 저녁노을
저녁노을 내려앉은 우포늪
하나 둘 호화로운 별빛 속에
넘실대는 잔잔한 물그림자
어디선가 이름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
고요한 적막을 깨트린다
사랑의 대화를 정겹게
나눌 수 있는 연인들의
포근한 휴식처
어둠이 내려앉은 대지위에
지칠 줄 모르며 무작정 걷고 싶은
사랑의 길
산 등성이너머에 떠오른
여인의 눈썹 같은 초승달은
뭉게구름 속에 흔들리며
한 폭의 멋진 야경이였어
그렇게 멋진 하루를 마무리 하며
즐거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꿈의 나래를 펴보자
좋은 인연
마음이 통하여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참 좋은 삶의 인연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하는 참 좋은 인연으로
영롱한 아침 이슬처럼 맑고 밝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배려하는 푸른 삶의 향 내음이 가득한
참 아름다운 삶의 인연이고 싶습니다.
늘 함께 할 수 없지만
마음깊이 흐르는 정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삶의 기쁨과 아픔을 나누며
웃음과 눈물을 함께하는
참 따뜻한 삶의 인연이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함께하는 마음으로
마음에 남겨지는 깊은 정으로
늘 맑은 호수같이 푸른
삶의 참 좋은 인연으로 오래 기억되시길
공로는 아랫사람 실패는 나에게
편집부장 김 판 일
비인간적인 흑인 노예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치러진 미국 남북전쟁에서의 일입니다.
그중에 게티즈버그 전투는 3일간에 5만 1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처절하고 치열한 전투였지만
결국 북군이 남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전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투에 앞서 북군 조지 미드 장군은 고민했습니다.
북군에게는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전투였지만
많은 병사가 전투로 인해 죽거나 다칠 것이 분명했고,
만약 전투에 패배할 경우 전쟁의 패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조지 미드 장군에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공격 명령과 함께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존경하는 조지 미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그러나 만일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만일 작전이 실패한다면 장군은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십시오.'
전 병사는 여기서 용기를 얻었다
병사 여러분 ! 승리를 위해 앞으로 ! !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는 리더쉽에 대해서도
다양하고 복잡한 자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리더는 영감적 동기부여를 일으켜야 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미래의 비전도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존경받는 리더가 되려면
공은 아랫사람에게 돌리고 실패는 본인이
책임을 질 줄 아는 태도입니다.
요사이 공로는 자기가 차지하고
실패의 원인은 남에게 떠넘기는 세상
흔히 말하기를 누구 때문에 !. . . .
관포지교(管鮑之交)
중국의 춘추시대에 살던 '관중'과 '포숙'이라는
두 사람은 많은 것을 함께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두 사람이 젊은 시절 같이 장사를 할 때
항상 관중이 더 많은 이익금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더 어렵고
돌봐야 할 식구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제나라의 관리가 되었지만
관중은 세 번이나 파면되었는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관중은 전쟁이 벌어지면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는 것이 걱정되어
전쟁터에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관중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포숙은 여러 사정 때문에
뜻을 펼치지 못하는 관중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시던 군주 소백에게
관중을 천거했습니다.
"전하께서 제나라에 만족하신다면
신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 외에는 인물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그를 등용하십시오."
그렇게 관중은 소백의 재상이 되었고,
이후 명재상 관중의 보좌를 받은 소백은
제나라 환공에 올라 춘추 5패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관중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생아자부모(生我者父母),
지아자포숙아야(知我者鮑叔兒也)
나의 약한 모습을 부끄럼 없이
편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친구.
내가 힘들고 괴로운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
일평생 동안 이러한 친구를
단 한 명만 만들 수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할
정도로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준다면
당신의 친구도 당신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길 수 없는 괴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태어난 반인반신으로,
인간과 싸움은 물론 신과 싸움에서도
진 적이 없는 무적의 용사였습니다.
그러한
헤라클레스가 어느 숲길을 걷고 있을 때
작고 초라한 한 마리 괴물이 헤라클레스에게
달려들어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작은 괴물의 공격을
간단히 물리치고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 괴물이 다시 나타나 헤라클레스를 공격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좀 전과 같이 괴물에게 반격하려고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괴물은 처음 대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습니다.
괴물의 두 번째 공격을 가까스로 물리친
헤라클레스는 재빨리 숲을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곧 숲의 출구가 보이는 곳에서
그 괴물이 다시 나타나 공격했습니다.
이번의 괴물은 더욱 강해져 있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이 없는 헤라클레스조차
그 괴물을 더 이상 상대하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후 헤라클레스는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찾아가,
자신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그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아테나는 헤라클레스에게 대답했습니다.
"그 괴물을 맞설수록 더욱 강해지는 괴물입니다.
그 괴물을 상대하는 방법은 맞서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못 본 척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 작아져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다툼'입니다."
간단한 의견 나눔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쟁이
작은 자존심이나 욱하는 성질 때문에
터무니없이 큰 사건으로 비화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관계없는 다툼에 끼어들어
이것저것 간섭하다가 자신이 그 다툼의
주체가 되어 일을 크게 만드는 상황도
드물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싸우면 싸울수록 더 강해지고
커다란 미움과 증오를 만드는 다툼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소신을 지키는 것이 아름답다
프랜시스 올덤 켈시 박사는 미국 FDA에서
신약 허가 신청서를 평가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1960년 9월, 켈시 박사가 받은 신청서의 의약품은
탈리도마이드 성분의 임산부 입덧 방지제였습니다.
이 약은 효능이 좋아
이미 유럽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었고,
미국에서의 승인도 쉽게 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켈시 박사는 이 약이 사람과 동물에게 각각
다른 작용을 한다는 것에 수상함을 느끼고
승인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엄청난 이윤이 결린 제약회사에서는
켈시 박사에 대한 집요한 로비와 협박을 동원했습니다.
하지만 켈시 박사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후 탈리도마이드는 기형아 출산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이 약의 영향으로 12,000명의
기형아가 태어난 후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켈시 박사는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상을 수여했고,
허술했던 미국의 의약품 허가 제도도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켈시 박사 본인은
'나는 그저 서류를 깔아뭉갠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라고
말하며 겸양을 표했을 뿐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쉽게 넘길 수 있는 것들로 인해
수많은 사고와 때로는 인명의 피해가 생기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많이 발생합니다.
가장 상식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자기 일을 소신 있게 항상 충실하게 행한다는 건
참 어렵고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사랑
옛날 어느 나라에는 가벼운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거리에서 청소하게 하는 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의 수상이 마차를 타고
죄인들이 청소하는 거리를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던 수상은,
한 젊은이가 청소하는
죄인의 거친 손에 입을 맞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죄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죄인은 불순한 사상을 퍼트리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된 정치범이었습니다.
위험한 정치범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청년을
수상하게 생각한 수상은 호위병들에게
그 청년을 체포하라고 했습니다.
"왜, 죄수복을 입은 죄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느냐?
혹시 그자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수상은 체포된 청년을 계속해서 엄하게 심문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지금은 죄수복을 입고 청소를 하고 있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더 나쁜 처지에 놓이시더라도
존경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청년에게 감동한 수상은 이런 아들을 길러낸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재조사를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게 되었습니다.
고결한 인품과 착한 심성으로 세상을 대하는
당신의 행동으로 부모님의 인품과 심성도
함께 빛나는 것입니다.
자녀로서 올바르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끝없이 사랑한 부모님에게
최고의 효도이자 선물이 될 것입니다.
행복을 만드는 친절
울산에 현대백화점 에서 신사복을 판매하는 매장에
한 노인신사가 한 벌의 정장을 들고 왔습니다.
"이 정장은 아들이 생일 선물로 나에게 사준 것인데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정장으로 교환하고 싶네요."
그런데 백화점 매장 직원은 당황했습니다.
그 정장은 우리 매장에서 판매한 물건이 아니라
다른 백화점 매장의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신사는 정장을 구매한 영수증도 없고
언제 어디서 구매한 지도 잘 몰랐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직원은 노신사에게 차를 대접하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정장을 판매한 매장을 찾아서
이것저것 알아보았습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는 백화점이라서
결국에는 노신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정장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노신사는 자신이 매장을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결국에 알게 되었고 동분서주하는
직원에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이 친절한 직원의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퍼진 소문이 백화점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고
성실함을 인정받은 직원은 높은 직급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1,000원을 지급하면 1,000원짜리
물건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보이지 않는 친절을 베풀면
언잰가 나에게 보이는
큰 행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친절을 통해서 만들어진 행복은 주고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까지도 홀씨처럼 전달되어
더욱 큰 행복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작은 친절로 세상에 퍼지는 행복을 만들어봅시다.
울산광역시 동구 봉수로 270 전하아이파크 102-503
최 현 선
위대한 아버지
1910년 1월16일 경 오전 7시50분쯤
제주시 노형동 A아파트 화재 현장.
불길과 연기가 아파트를 삼키고 있는
가운데 일가족 4명이 연기에 갇혀 있었다.
119 구조대는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연기와 불길은 가족들을 향해 점차 다가오고
가족들은 “뜨겁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구조는 점차 지연되고 연기가 일가족 4명을 삼켜버리는 순간
극적으로 소방대원들이 가족들에게 도달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까지 무사히 구조됐지만,
또 다른 아들 1명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가족 4명이 있었지만 아파트를 빠져나온 것은 3명뿐.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가족들은 아들이 없는 것을 알아채고
살려달라고 119대원들에게 애원한다.
애타는 아버지.
결국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만 소방대원들이 저지한다.
다시 아파트로 뛰어드는 아버지. 말리는 소방대원들.
결국
아버지는 소방대원과 함께 아무 장비도 없이
보조 산소통에 의존한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
내가 죽더라도 아들은 구해야 한다
시간이 한참 지나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고
불길과 연기로 가득 찬 아파트를 빠져나온다.
가족들 모두 울음을 터뜨리고,
아버지는 울지 말라고 다독거린다.
불보다 뜨거운 아버지의 정을 보는 사람마다 용감한 아버지
소방대원들도 눈물이 절로 흐른다
웃으면 복이와요
김삿갓과 처녀 뱃사공
옛날 옛적에 김삿갓이 전국 유랑 다닐 적 에....
창녕지방 낙동강 강을 건너려구
처녀 뱃사공이 노 젓는 배에 올라타서는 하는말.
"여보, 마누라, 하고 부르니."
깜짝 놀란 처녀뱃사공이 하는말,
"어째서, 내가 댁에 여보 마누라란 말이요."
하고 물으니. 김삿갓 하는 말,
"당신 배에 올라 탔으니,내 여보 마누라지."
강을 다 건너서 저만큼 가는 김삿갓에게.
처녀뱃사공 하는 말,
"아들아~~~~~~하고 부르니,"
깜짝 놀란 김삿갓 하는말,
"내가 어찌 처녀의 아들인가, 하고 물으니..."
처녀뱃사공 하는말,
"내 뱃속에서 나갔으니까,내 아들 아닌감~~~"
허허허~~~김삿갓 웃음지며 하는 말.
(헉) ~~맞는 말일세 그려 허허, 으음~~~
여우고개 전설
충북 제천시 화산동에서 동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여우고개'라 하는데,
옛날에는 이 고개는 나무숲이 우거지고
여우가 많아 오래 묵은 것은 곧잘 둔갑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밤늦게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한다.
여우고개 근처에 최 진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이 혼례를 치르고, 첫날밤을 지낸
그 이튿날 아침. 계집종이 신혼부부가
시부모에게 문안드리러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리 오래도록 기다려도 기척이 없는 것이 이상해서 밖에서
불러보았으나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계집종은 꾸중을 들을 셈치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신랑은 아직 잠을 자고 있는데 후닥닥 이불을 제치고
똑같이 생긴 신부 두 사람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종은 급히 안채로 달려가
이 괴이한 사실을 어른께 고하였다.
역시 놀란 시부모도
똑같이 생긴 며느리 둘을 앞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말투며 움직이는 몸놀림이 똑같을뿐더러
입을 열면 같이 입을 열고 손을 놀리면 같이 손을 놀려
몸은 둘이지만 하는 짓은 한 사람이 하는 것과 같아,
시부모는 도저히 어찌 할 수가 없어
급히 신부의 친정에 사람을 보내 신부의 몸 어느 곳인가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이 무엇인가 물어보기로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후 신부 방에 들어가
두 사람의 가슴을 헤쳐 보았더니
두 사람 모두 빨간 점이 있어 이것으로도
어느 편이 정말 며느리인지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 소문이 밖으로 흘러나가 동네 아낙네들이
구경하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런데,
모여든 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은 필시 여우의 장난이니
늙은 고양이를 방에 넣어보라는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급히 늙은 고양이를 구해다가
신부가 있는 방에 넣고 얼른 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금새 방에서는 비명소리가 나더니
하얀 여우 한 마리가 꼬리를 말고 밖으로
도망쳐 나오더니 캥캥 울음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우고개에 살고 있던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이 되고
새색시로 모습을 바꿔 의젓이
신부 행세를 하다 끝내 고양이에게 쫓겨 갔는데,
고양이는 여우의 꼬리를 알아보고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사람들은
더욱 밤에 여우고개를 지나기를 꺼려했으나,
세월이 흘러 이 근처에 기차 철로가 놓이게 되고
기차가 요란하게 지나게 된 후로는
여우가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신불산
작천정
흐르는 물줄기 따라
계곡 숲속에 취하고 또 취해
비틀거리며 산을 오르구나
홍룡 폭포 떨어지는
물줄기에 마음을 적시고
하늘 한번 쳐다보니 맑기도 하네
칼날 같은 공룡능선
벼랑 밑이 수 십리길
오금저려 울부짖는 아낙내의 비명소리
어쩌다
정상을 바라보니
안개 자욱한 길 멀기도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사자평 갈대밭이 나를 부르고
먼 발취 간월산이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어니
섭섭다 생각마오
얼음골 사과한쪽 소주 한잔 드리리다
아~~~~~~~~~~
동해에 용왕신이여...
신불산에 산 신령님이시요..........
마음 깊은 곳에서 외치는'
고함소리 한번 들어 보소........................
선생님과 제자의 사랑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셨다.
평생 교감이나 교장자리도 마다하고 아이들 앞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하루 종일 재잘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에게는 더 없는 행복이었다.
정년퇴임을 하신 후, 아버지는 학생들이 그리운지
저녁이면 앨범을 펼쳐 들고 30년 전
처음 만났던 학생들 얘기부터
그리운 옛 이야기를 들려 주시곤 했다.
“이 아이는 정말 말썽꾸러기였지…
하루라도 안 싸울 날이 없었단다.
그래도 심성은 착하고 붙임성도 좋아서
나만 보면 떡볶이 사달라며 날마다 조르곤 했지….”
“유진이는 참 의젓하고 밝은 아이였다.
아프신 홀어머니와 힘들게 살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안았지.
아프신 어머니 때문에 늘 의사가 되겠다고 말하곤 했었단다.
내가 가끔 집에 찾아가서
유진이 몰래 고기며 쌀이며 사다 놓곤 했었는데…”
줄줄이 이어지는 추억담은
늘 우리 자식들 마음을 촉촉이 적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산책을 다녀오시던 아버지가 쓰러졌다.
폐암 말기…
“한 평생 칠판에다 쓰고 닦고 하시더니 폐암이 되셨구나.”
희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을 뒤로하고
우리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와 할 수 있는 치료를 계속했다.
종종 아버지 제자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곤 했다.
그럼 아버진 또 한참을 옛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만큼은 아버지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아버지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기침 때문에 잠을 못 이루시는 날들이 잦아지고,
가래 끓는 소리도 거칠어졌다.
마침내 대화를 나주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다.
그때 마침, 진료 받던 병원에서
의사 한 명을 보내주었다.
20대 후반의 여의사였는데, 가래가 끌면 젖은
가재로 손가락을 넣어 가래를 꺼내주곤 하면서
가족만큼이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여의사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도
유난히 표정이 밝아졌다.
한번은 아버지가 기침이 무척이나
심해져 얼굴은 핏발로 벌게지고
목은 가래가 들끓어 숨쉬기조차 답답해하시자,
손으로 가래를 꺼내던 의사는 난데없이
음료수 빨대를 가져오라고 했다.
대체 빨대로 무엇을 하려나 하고 의아해 하며
가져다주자 그녀는 빨대 한 끝을 아버지 목구멍에 넣고
한 끝은 자기가 물고 가래를 입으로 빨아내는 것이 아닌가?
자식들도 감히 못하는 일을 젊은 여의사가 하고 있었다.
폐암 환자였기 때문에 가래에서 악취가 심했다.
그러나
여의사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빨아내기를 몇 십분 정도 하자,
가래 끓는 소리가 잠잠해지고 아버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몇 달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2빅3일 장례를 치르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네??... 의사 보내드린 적 없는데요?”
“분명히 병원에서 왔다고 했는데요?”
“의사 분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 …”
“아무튼 저희 쪽에서는 의사를
보내드린 적이 없습니다.”
여의사의 이름도 몰랐던 나는
헛걸음만 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얼마 후, 외국에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온 편지였다.
"선생님, 저 유진이에요.
선생님이 참 예뻐해 주시던 유진이…,
가끔 저희 집에 쌀이며 반찬이며 놓고 가셨던 거
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차마 고맙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지만…
그 못난 제자가 의사가 됐어요.
이 소식을 알면 제일 기뻐하실 선생님을 수소문해 찾았을 때,
많이 아프시다는 걸 알았어요.
침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을 뵈었을 때
의사가운을 입은 저를 보며
비록 말은 못하셨지만 ‘어서 오렴’하고
반겨 주시듯 제 손을 꼭 잡아주신 선생님…
저 알아보신 거 맞죠?
언젠가 제 꿈이 의사라고 하자,
선생님은 '유진이 는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쳐주는
훌륭한 의사가 될 거야' 하셨죠.
그 말씀 지키려고요…
이곳,
아프리카 오지에서 환자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유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실 거죠?
사랑합니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의 병이 완쾌되길 주님께 기도 합니다
나는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그 여의사의 편지를
아버지 묘소에 고이 놓아드렸다.
어버이날
어버이날은 원래 어머니날이었다.
지난 1956년 5월8일, 자식을 낳고 기른 정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그러다가 1973년부터 어버이날로 바뀌었다.
자식을 키우는 일을 두고 아버지의 공(功)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날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미국이다.
버지니아주에 사는 안나 자이비스라는
소녀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흰색 카네이션을
가슴에 꽂게 된 것이 그 발단이다.
그 이후 1913년도부터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에는 어머니의 날로 정하고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붉은 카네이션을 꽂고
돌아가시면 흰색 카네이션을 꽂았다.
내일은 어버이날이다.
부모님 두 분이 다 돌아가신 나로서는
흰색카네이션을 꽂아야 할 일이지만,
여지 껏 흰색카네이션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에는 부모님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주는 것
대신에 광주리에 담긴 카네이션 꽃송이를 선물로 많이 하는 편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선물을 아예 현금이 대신한다.
봉투 안에 든 현금을 직접 선물하기도 하지만,
먼 곳에 떨어져있는 자녀들은 부모님통장에 입금을 시켜주기도 한다.
어릴 적 내 아이들이 만들어 달아 준 빨간 카네이션이 그립다.
귀여운 내 아이가 예쁘게 그린 그림책을 보여주던
그 날처럼 오늘밤이 기다려진다.
이번에 받게 될 선물의 내용과 무게 때문에
벌써부터 가슴을 두근 그리게 만든다.
지난 추억을 새기며
자정이 가까워 지는 시간이다 '
진 종일 요 몇일 그렇게도 세차가 불던 바람도 이젠 지쳤음인지 깊어 가는 밤이
을씨년 스러울 정도로 조용 하다 '
불현듯 평생 잊지 못할 고마웠던 사람들의 얼굴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마음에 품었던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 떠오르는 밤이다 '
검은 휘장을 두른 듯 창밖은 땅거미 살포시 내려 앉아 혼자 턱 고이고 생각 하는 나에게
실타래 같이 엉킨 옛 추억을 다독이며 잠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밤이다 '
어둠을 쓰다듬으며 홀로 포근히 내려 앉은 땅 거미를 쥐어 짜는 가로 등 하나 '
웬지 오지 않는 연인을 홀로 기다리는 눈물 먹은 슬픈 여인의 얼굴 같아 안쓰럽다 '
하루의 잡다한 생활 하나 하나를 끄집어 내어 차곡 차곡 가슴에 담아 보며 평생
노래와는 담을 쌓았던 내가 밤의 부르스를 흥얼 거린다 '
이 시간만은 나를 사랑 하여 주고 아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 하자 '
초등 학교 시절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가 장작을 한짐 지고 학교에 오는데 아버지 없는 나는
두번 지개에 지고 가야만 되었던 힘든 시절 '
그 때는 겨울 난로 땔감을 장작으로 사용 할때다 '
초등학교 5 학년이던 내가 지개에 지고 가던 장작 짐이 무거워 십리 길을 가는데 힘들어
할때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 장작을 자전거에 싫고 학교 까지 가셨던 담임 선생님 '
넘어 지고 딩굴어 손등이 까지고 얼굴에 상채기가 나 너무 쓰리고 아파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던
나의 어깨를 다독여 주시며 서럽거든 싫컷 울라 하시던 아버지 같은 선생님 얼굴이 떠 오른다 '
23 살에 혼자 되시어 47 살 까지 모진 고생 참으시고 살으셨던 불쌍 하신 어머님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는 밤이다 '
얼굴 기억조차 없는 나를 하늘나라에서 잘되시길 기도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
고학을 할때 눈 아침 저녁 마져 굶고 고학을 하여 물물 교환을 한 보리와 쌀등을 지고 오다
저녁 때 눈길에 쓸어져 정신을 잃었을 때 나를 엎고 집으로가 살려 주신 고마운
생명의 은인인 그 장 하신 어머님 생각도 함께 떠오른다 '
조금전 까지 부르던 밤의 부르스는 눈물의 부르스로 변하고 두 눈엔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
아버지 없이 홀 어머니 밑에서 어려서 부터 참 많은 고생도 가지 가지참고 이기고 살아 왔다 '
조용히 눈감으면 떠 오르는 그 많은 고마운 사람들 '
결코 애비 없는 호로 자식은 되지 말라 말씀 하셨던 어머님의 마지막 유언 '
지금껏 그 말씀 조금의 어김도 없이 잘 참으며 잘 살아 왔다 ''
'생각 해 보니 큰 흠 없이 잘 살아 온 일생이 아닌가 싶다 '
어김 없이 시간은 흘러 자정이 넘었다 '
누구에게도 말 못할 내 일생의 상채기 투성인 자신의 마음을 홀로 다독이며 이 깊어 가는 밤
누구도 들을수 없는 눈물의 밤의 부르스를 나 홀로 이렇게 입이 아프도록 부르고 있다 '
청승 맞게 졸고 있는 까아만 밤에 나 혼자 외로움을 살며시 달래 보며 만지작 거리며
하염 없이 흐는는 눈물을 훔치는 마음 괜실히 서글프다 '
결코 눈물을 다시 보이지 않는다는 큰 다짐을 한 나였는데 이젠 늙기는 늙었나 보다 '
봄이 꿈틀거리고 검은 휘장을 살며시 거두고 찾아 오는 이 조용한 시간 '
또 싱그런 생명들은 뾰족히 고개를 내미는데 이 거룩한 시간에 나 혼자 울쩍 하지는 말자 '
입술 꽉 다물고 지금 복 많은 나 자신을 생각 하며 하얀 이 밤을 껄껄 웃으며 지 새워 보자 '
'
♡머슴이 이조참판이 되고 ♡
조선 숙종 때의 일입니다.
아직 나이가 스물이 되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의 젊은 청년이 경상도 밀양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高裕(고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 물리친
고경명의 현손이었지만, 부모를 어린 나이에 잃고서
친족들의 도움도 받지못하고 외롭게 떠도는 입장이었지요.
밀양땅에 이르러서는 생계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머슴살이를 살고 있고 학문이 짧아서 무식해도 사람됨이 신실(信實) 하였고
언변에 신중하고 인격이 고매 하였으므로 그를 대하는 사람 마다
그를 존중해 주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고도령"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박좌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박좌수는 관청을 돕는 아전들 우두머리였지만 박봉이었으며
중년에 상처 하고 가세가 매우 구차하였는데,
효성스런 딸 하나가 있어 정성껏 그 딸이 아버님을 모셨으므로
가난한 가운데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高裕(고유)는 그 마을서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덧 그 처녀의 효성과 현숙한 소문을 듣게 되었고,
먼 빛으로 보고 그 처녀를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운 처녀 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답니다.
내 처지가 이러하거늘 그 처녀가 나를 생각해줄까?
그 처녀와 일생을 함께 한다면 참 행복할 텐데!
벌써 많은 혼사가 오간다고 하는데~ 한 번 뜻이나 전해보자
그래! 부딪쳐 보자고~! 그러던 노을이 곱게 밀려드는 어느 날!
고유는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박좌수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본래 박좌수는 장기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우선 장기판부터 벌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실없는 말처럼, 그러나 젊은 가슴을 긴장시키면서 품었던 말을 꺼내 보았지요.
"좌수어른, 장기를 그냥 두는 것보다 무슨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떠리까?"
"자네가 그 웬 말인가,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구먼.
그래 무엇을 내기하려나?" 좌수는 웃어넘겼다.
이웃집에서 빚어 파는 막걸리나 파전을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생각하면서 ~ "이왕 할 바에는 좀 큼직한 내기를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좌수댁 머슴살이를 삼년 살기로 하고,
좌수님이 지시면 내가 좌수님 사위가 되기로요!"
박좌수는 그제야 고유의 말이 뼈있는 말임을 알았다.
"에끼 이사람아! 내 금옥 같은 딸을 자네 같은 머슴꾼에게 주겠다던가?.
어찌 자네따위나 주려고 빗발치는 청혼을 물리치고
스무해를 키웠다던가?" 고유는 박좌수에게 무안을 당하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되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고유가 돌아간 뒤에 박좌수와 고유가 말다툼하는 것을
방안에서 듣게 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무엇때문에 고도령을 나무라셨습니까?"
"그 군정이 글쎄 나더러 저를 사위 삼으라는 구나~
그래서 내가 무안을 주었지..." 박좌수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답니다.
그런데, "아버님, 그이가 어때서 그러셨어요.
지금은 비록 빈천하지만 본래는 명문 사족(士族)이었고,
또 사람이 듬직하고 그렇게 성실한 걸요.
" 오히려 박좌수의 딸은 처녀의 수줍음 탓에 얼굴은 불그레해졌지만
얼굴 두 눈에는 가득히 좌수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들어 좌수에게 혼인을 지내도록 하라고
권해 마지 않았습니다. 아니 따님도 싫어하지 않는데,
마치 자신들 집안의 일인양 여럿이 우겨대자 좌수도 끝내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물 한사발 떠 놓고 두 젊은 청년과 처녀의 혼례가 이뤄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 술 한동이를 받아 놓고
고기와 과일을 먹고 마시면서 그들 한 쌍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화촉동방의 밤은 깊어지고 고유와 신부는 촛불 아래서 부부의 연으로 초야를 치뤘습니다.
고유는 가난하였으나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색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꿈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러우나 배우지 못했오.!" "글을 모르시면 어떻하시나요?.
대장부가 글을 알지 못하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도 공명을 얻을 길이 없는 법입니다.
색시는 고유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년 작정을 해서 서로 이별하여 당신은 글을 배워 과거에 오르기로 하고,
첩은 길삼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해요.
그렇게 한 뒤에도 우리들의 나이가 삼십이 되지 않으므로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이제, 사랑하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쓰라리지만
훗날을 위해서 고생하기로 해요." 색시는 고유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쉼없이 흘렸습니다.
고유의 두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색시의 두손을 꼭 잡았습니다.
긴세월 접어두었던 학문의 길을 깨우쳐준 색시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지요!
아직도 동이트지 않은 새벽녁~ 고유는 짧은 첫날밤이 새자
아내가 싸준 다섯필 베(布)를 짊어지고 입지출관향(立志出關鄕)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떠나서 어느 시장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았습니다.
돈을 아끼려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사당 아래서도 밤을 새워가면서
좋은 스승을 찾아 발길은 합천땅에 이르렀습니다.
고유는 인품과 학문이 높아보이는 스승님인듯한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글을 가르쳐 줍시사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을 처음 배웠습니다.
처음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했으나 오륙년이 지난 후에는 놀라움 속에서
고유의 글은 실로 대성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도 탄복하면서, "네 뜻이 강철처럼 굳더니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구나!
"너의 글이 그만 하면 족히 과장에서 독보할만 하다.
이제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 과거나 보도록 하라."
고유는 그동안의 신세를 깊이 감사하면서 그곳을 물러나서는
다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방 한칸을 빌리고 사정을 말하여 밥을 얻어 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답니다. 어느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숙종대왕이 정시(庭試)를 보이는 영을 내렸지요.
뜻은 헛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고유는 처음 치르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금방에 그 이름을 휘날렸습니다.
그리하여 고유는 곧 가주서(假注書)로 시립(侍立)하여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날!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왕은 대신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신료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되어 알아 들을수 없구나!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고유는 초지에 받아 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 방울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주서들이 모두 글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왕은 그 쓴 글을 가져 오라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었습니다.
"신은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현손(孫)이옵니다."
"허~! 충성된 제봉이 손자도 잘 두었군. 그래 고향부모께서는 강령 하시더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있겠구나." "예, 있사옵니다."
그날 밤! 숙종대왕은 고유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을 사적으로 듣고 싶어했습니다
고유는 감히 기망할 수가 없어 그가 떠돌아 다니다가 밀양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들어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하고 집을 떠나
십년동안 공부를 한 그의 이력을 모두 아룄었습니다.
"허허~! 그러면 십년 한정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오른지가 며칠이 못되와 아직 통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를 불러들여 현 밀양부사(密陽府使)를 다른 고을로 옮기
고 고유로 밀양부사를 임명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유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 너를 밀양 땅으로 보내니 옛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보되,
과객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 보아라."
"과연 수절하며 기다리고 있는지~변심했는지
그 뒷 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대왕이 웃는다.
"하하하!" 고유는 부복사은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는 왕이 명한대로 신연하인(新延下人)들은 도중에서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 옛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지 수년의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못 믿을 건 여심이라던가?
첫날밤에 맺은 굳은 언약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박 좌수 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동네의 그 늙은이는 그가 아는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박 좌수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게 3년 전이었군요.병으로 죽었지요.
그에겐 딸이 하나 있지요. 벌써 10년 전에 이 마을 머슴을 살던
고 도령 에게 시집을 갔는데, 웬일인지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혼자되었지만~ "
허허~ 신기하게도 첫날 초야에 유복자(遺腹子)가 하나 생겼어요 참 !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하고도 어찌나 부지런한지~ 남편이 없는데도 크게 가산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하
고 저 건너 산 밑에 백여호가 넘는 대촌을 이뤄놓았어요 모두 그 낭속(廊屬)이요." 고유는 너
무도 기뻤습니다~ 가산을 크게 이뤄놓은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을 지키면서 자신을 기
다려줬다는 사실 때문에! 고유는 노인에게 사례하고
자신을 따르는 군속들에게는 곧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어슥 어슥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질렀다. '얻어먹는 인생이 한 그
릇 밥을 바라고 왔오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고 있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
고 나왔다. "들어 오세오.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밑에서라도 좋네." 라고 하였다. "아니 올라오세오. 우리 집에서는 과객을 절대 그냥 보
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 오라 하므로 못 이기는 체 올라가 웃목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 그
런데 손님의 성씨는 무엇인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들은 고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저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10년 전에 장가들
어 그도 첫날 밤을 지내고는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랄 게 있을까? 그댁호야 박좌수댁이었지
만..." 그때 박씨부인이 사랑에 웬 과객이 들었는데 성이 고씨라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다. 아들의 두 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한다. 박씨부인
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들 손을 잡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10년을 떠나 살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있는 남편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오래 그리던 회포에 쌓인 이야
기를 꺼내 놓으며 열살 먹은 아들을 인사시켰다. 고유는 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
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
보려 하였으나, 운수가 사나워 베를 판 돈은 도적을 만나 빼앗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랑 걸식
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혹 서당이 있어 글을 배우자하여도 돈이 없
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 세월만 허비하고는 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하
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지요."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민망해 하는 빛이 없이
사람의 궁달(窮達)은 운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벼로도 수천석 추수를 장만해 놓았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좋은 옷과 음식을 들여 놓으며 도리어 남편을 위로하여
주었다. 고유는 음식상을 앞에 두고 부인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눈길에 남편의 겉옷이 걸렁뱅이 옷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께끗한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허리춤에는 관리들이 차는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부인이, "서방님! 사실대로 말
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고유는 "나와 동행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 들여 함께 먹어야
겠오."했다. 그래 부인이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으로 모셔 들이라 하였다.
하인이 나가서 문 밖에 서 있는 과객을 보고 들어 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 척도 않
고 대로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胡笛)을 꺼내어 높이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수십
명의 관속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하였다. 그리고,박씨부인을 향해 문안인사를 아
뢰고 야단이었다. 문밖에 서있던 과객은 먼저 고유의 지시를 받은 군관이었다. 고유는 그제
서야, "우리부부의 사연을 들으신 상감마마께서 지시한 것이라오. 당신의 마음을 떠보려 한
것이 결코 고의가 아니었오!" 군속이 관복을 가져오니 갈아입고, 박씨 부인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니 부인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의 남녀노
소를 청하여 실컷 먹였습니다. 박씨 부인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의 스승과 해인사 중들에게도 많은 보은
의 폐백(幣帛)을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고유는 얼마 안 있어 다시 벼슬이 경상감사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니, 숙종과 영조, 정조대왕등 3대를 모시면서 그 영화로움이 말할 것도
없고, 부인도 나라에서 지정하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을 누렸다고 합니다. 고
경명(高敬命)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으로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 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
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큰아들에겐 전주성을 사수하게하고 금산(錦山)에서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존하였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에 배향되었다. 특이한 점은 고경명의 후손들은 고경명과 함께 임진왜란때 전사한 2명의 노
비들 제사도 함께 모신다고 합니다.
♥사랑과 섬김의 자리★
오늘은 바쁜 시간을 비워 놓고 요양원 어르신들 뵈러 가기로 했다.
전국에서 "메리스"로 인하여 요양원 방문하는 것을 금지 하였다.
8월 부터 방문해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 였더니 온 몸이 땀으로 범범이 된다.
버스를 두번이나 환승을 해야 요양원으로 갈 수 있어서 조금은
불편함이 있지만. 어르신들을 뵐 것을 생각하니 안하던 화장도 하고
밝은 색의 옷을 꺼내서 입고 출발 했다. 버스를 타러 가는 발걸음이 정말 가볍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임을 갖을 수 있다는 것에 세삼 옛날 연예하던 때가 생각 난다.
친정 부모님께서 멀리 살고 계시다 보니 문득 부모님 생각 날 때면 요양원 어르신들을 찾아 뵙곤 했다.
재대로 된 발가락이 하나도 없이 비틀어 지고 손과 발. 온 몸이 제대로 된 곳이 없는 육신의 몸에 하루하루의 삶을
다 빼앗기고 지나간 추억마져 잊어버린 어르신들을 바라 보면 정말 마음이 슬프다.
선생님!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눈에서는 이슬이 맺힌다. 두손을 꼭 잡아 드리며 건강하세요
어르신 하면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모습이 영역하다. 대부분 자식이 없는 어르신들이
계시는 요양원이기에 더욱 마음이 미여 질 때가 많이 있다.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르신들 이지만 해방 70년을 맞이하게 된 지금의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면 어르신들의 쓸모없는 육신의 상태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알 수있지요. 이분들을 수고와
아픔을 통 하여 지금의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감사해요.
요양원 봉사를 가기 전에는 손톱을 다듬고서야 봉사를 갈 수가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살갓은 얄은 기름종이 같이 부드렵고 조금만 힘을 주어 손목이나 몸을 만지면 살이 찢어 지곤 합니다.
그래서 항상 봉사가기 전날 손톱을 다듬고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한답니다.
오늘은 모처럼 방문해서 그런지 자주 뵙던 어르신이 보이지 않아서 직원에게 물어 보았더니
지난 주에 천국에 가셨다고 하네요.
여름철 무더워를 견지지 못하고 약해져서 많은 분들이 이별을 고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더욱 마음이 무겁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
지라 생각하며 참평안을 빌며 주는 것이 우리의 할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좋은곳에 가서 평안함을 누리시길 빌어 봅니다. 어린 여학생들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았네요.
봉사시간을 받는 이유도 있겠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예쁜 여학생들 어르신들을 위해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여러가지 봉사하는 것을 보면서
요좀 학생들 버릇이 없는 것을 보는데 참 예쁘다고 했더니 밝게 미소 짓는 모습이 지금도 저의 마음에
새로운 삶의 힘을 주는 것을 봅니다. 요좀 봉사자들이 없어서 많이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을 통하여 삶의 기쁨의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 어르신들 사랑 합니다.
어르신들 건강 하세요.
오늘은 고향 생각이 문득 나는 날.
그리운 고향을 마음속에 그리며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요
.
마침 휴가로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고향을 멀리 떠나고 보니 더욱 그리움이 많이 남아 있다.
친구집에서 어린시절 함께 즐겁게 보냈던 고향집을 마음에
그려보며 친구와 통화를 하는데.
친구의 말에 고향집을 리모델링 해서 부모님 편안하게 수리
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파오던지....ㅋ
여름이면 우물가에 안자 수박 먹었던 모습.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윗도리 벗어 버리고 등에 시원한 물을 바가지에 닮아 시원하게 씻던
모습을 생각 했는데 부모님께서 고향을 떠나시고 고향집에 가서 본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은 했지만 고향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 더욱 큰 충격 이였다.
조그마한 마루 끝에 걸터 않아 친구 부모님께서 주셨던 간식 먹던 생각.
보름이면 한자리에 모여서 지불 놀이 한다며 깡통을 주워서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준비 해 놓고 해가 지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여름에 피라미 잡기 위해 냇가에 그물을 쳐놓고 아침에 가보면 많이
잡이지는 않았지만 통에 닮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즐겁기만 했던 그 시절...!
빈대떡 붙어 먹으면서 첫번째 붙이는거 먹으면 시집 못간다는 말에 시집은 가고 싶었는지
꼭 찬장에 상보를 덥어 놓고 두번째 만든 빈대떡부터 맞있게 붙어 먹었던 것...!
지금 생각 해 보니 부모님의 대한 효를 가르치기 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