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됐더라.
(창 2:19)
나는 목포의 두 수재를 친구로 뒀었다. 어릴 때부터 “목포의 천재”로 불렸던 친구, 목포 산정초등학교 3, 4, 5학년과 목포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짝꿍이었던 ‘이○○’는 서울대 법학과 2학년 때 사법 시험을 패스하고, 안타깝게도 1991년에 고인이 됐다. 그리고 또 한 친구는 목포고 1,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내 신앙의 첫 친구 ‘임★★’다. 목포고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는 이○○와 양◎◎이와 함께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무난히 합격할 수재”로 말씀하셨던 친구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 신앙의 첫 친구 자녀들은 아버지가 목포의 수재이셨음을 모르는 듯하다. 내 신앙의 첫 친구가 좀처럼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까닭 때문일 것이다.
목포 산정초교를 졸업한 ‘양◎◎’이는 추첨으로 ○○와 함께 목포 청호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 ○○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로 진학한 ◎◎이 삶의 목표는 단 한 번이라도 ○○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물론, 이 싸움은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는 싸움, 허무의 싸움이었다. ○○가 죽은 뒤 ◎◎이가 정신을 놔 버린 것이다.
목포 제일중학교 1학년 ‘반 편성 고사’에서 수석을 했던 ★★는 목포고 1학년 때부터 삶의 허무감을 느껴 공부를 등한시했다. 그리고 중국 선교사 꿈을 꿨던 ★★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해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정이철 목사가 졸업한) 여수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1985년 3월이었다. 그러니까 1967년생 정이철 목사가 여덟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면, 1985년에 여수고 3학년이었으니, 정이철 목사는 내 신앙의 첫 친구 ★★ 제자다.
목포 산정초교 3학년 때였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는 {옥편}을 떠들쳐 봤다. 단숨에 어려운 한자 수십 자를 암기한 ○○는 연필을 들어 그 한자들을 연습장에 적었다. ○○가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워 네살 때 천자문을 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였지만, 나에게는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실을 잊지 않은 나는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닮은 아담, 아담의 언어 능력을 생각하며 딸내미가 태어나자 ‘그림과 함께 한글이 적힌 판, 숫자가 적힌 판, 덧셈 판, 뺄셈 판, 영어가 적힌 판, 한문이 적힌 판’…, 여러 판을 동네 문구점에서 구입해 딸내미 방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젖을 먹일 때나 틈날 때마다 딸내미에게 그 판들을 읽어 주기를 아내에게 부탁했다. 동네 서점에서 동화 [병원으로 실려 간 호랑이]를 구입해 이 책도 읽어 주기를 부탁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꾸러기 곰돌이} 전집도…. 그래서 딸내미는 돌이 지난 얼마 뒤에 한글을 뗐다.
‘{유튜브} 정이철 <2022 고신 총회와 고신 교수들의 이단 사상>’1)에서 정이철 목사는 “미련하고 영리하지 못해 미국에서 20 년을 살아도 일상적인 영어 정도는 하지만, 미국 영화나 드라마나 방송 같은 것을 봐도 뭣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한 내용은 못 알아듣는다.”며 자신의 경우를 내세우는 겸손(?)으로, 1923년~1926년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고故 죽산 박형룡 목사님 영어 실력을 언급한다. 그러니까 “박형룡 목사님이 미국으로 유학 오시기 전 영어책 몇 권을 읽고 오셨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1930년대 (우리나라 현실은) 영어가 되지 않는 시대인데, 박형룡 목사님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그 얼마나 독창적으로 신학을 하셨겠어요. 간신히 흡수하는, 받아들이는 데 바쁘셨겠죠.”라고 말한다.
그 당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는 영어도 안 되는 유학생에게 신학사도 아닌 신학석사 학위를 남발하는 학교였을까?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신 고故 정암 박윤선 목사님(음력 1905년 12월 11일 생~양력 1988년 6월 30일 소천) 학력을 보면 “평양 숭실전문대학교 영어과 졸업”으로 나온다. 그리고 박형룡 목사님(1897년 3월 28일 생~1978년 10월 25일 소천) 학력을 보면 학과는 적히지 않은 채 “1916년 4월~1920년 3월: 평양 숭실대학교 졸업”으로 나온다.
그런데 박형룡 목사님 학력에서 눈여겨봐야 할 학력이 있다. “1921년 9월~1923년 7월: 중국 남경 금륭대학교 졸업, 문학사 학위 취득”이다. 비록 문학사 학위이지만, 그 당시 남경 금륭대학교는 중국어도 안 되는 유학생에게 학위를 남발하는 학교였을까?
1937년에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신 고故 최낙재 목사님, “최낙재 목사님이 고교 시절에 {기독교 강요}를 영문본으로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들은 이야기이기에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왜 정이철 목사는 ‘언어 습득 능력이 모자란 둔재’로서 자신의 경우를 내세워 박형룡 목사님을 자신과 같은 둔재로 여기는 것일까?
박형룡 목사님과 동시대 인물이신 박윤선 목사님께서 ‘첫 주석서 {성경 주석: 요한계시록}’을 펴내신 때는 1949년이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은 영어가 되지 않는 1930년대에 영어도 안 되는 실력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가셨을까? 영어가 안 되는 까닭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졸기만 하셨을까?
“독창적”??????? 하기야 개혁 교회 정통 교리 ‘행위(생명)언약’ 교리와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이단시한 ‘서철원 신학’이 무척 “독창적”이긴 하다. 또한 서철원 목사님 지도로 총신신대원에서 현대신학을 전공해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어도, 국어도, 논리도 안 되는 실력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영문본을 해석하며 올해 초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장로교회의 믿음}이라는 기괴한 해설서를 내놓은 ‘고경태 신학’도 무척이나 “독창적”이긴 하다. ㅠㅠ!
============
1) 조회수를 올려 줄 필요 없어 링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