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묘사지적(妙事之迹)
함석헌
이번 달엔 법에 관한 것을 말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부탁드렸던 여러분들이 못 쓰시겠다고 해서 본래 생각했던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왜 법을 전문으로 연구한 학자들이 법에 관한 글을 쓰려 하지 않습니까?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법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에 이미 법을 밝히자는 생각이 많이 있어서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지러워 날마다 나는 신문이 모두 법 제정하는 것과 법 고치는 것과 법에 따라 끔찍한 처벌을 하는 일과 그것이 억울해 울부짖는 일로 가득 차는 세상인데 그 법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를 꺼리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 어느 옛날보다도 모든 것이 발달했다는 시대요, 문명이다 문화다 하는데, 법학자, 법 전문가가 못하겠다니 그러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것을 한 나라의 일로 본다면, 제가 만든 법을 제가 싫어하고 제가 거기 걸려 죽는다, 그런 말이 됩니다. 모순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나라는 여러 사람이 하나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순된 일은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 데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는데, 법 제정한 사람과 법 깨뜨리는 사람이 서로 딴사람이요, …한마디로 전체에도 개인에도 통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중대한 문제가, 법을 만들기는 왜 애당초에 만들면서 또 깨치기는 왜 깨치느냐? 요약해서, 법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새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에 대한 특집호를 내자는 생각을 한 것도 이 때문이요, 원하는 대로 글을 얻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요, 그러기 때문에 법이란 무엇이냐 반드시 밝히려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법이라는 우리의 옛날 말은 알 수 없고, 이제는 ‘법’이 그대로 우리말이 됐습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사람이란 다 그런 법이야” 할 때의 ‘법’입니다. 그 뜻은 ‘본 때’, 혹은 ‘그어놓은 금’, ‘세워놓은 말’ 혹은 ‘난길’, 그런 뜻입니다. 한문 자전에서 ‘法’자를 찾 아 보면 그 글자 뜻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法’을 본래는 ‘灋(법)’이라 썼는데 내려오다가 간략하게 써서 ‘法’으로 됐다는데, 氵는 물(水)로서 물은 언제나 수평(水平)한 것이기 때문에 그 공평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去는 음을 표하기 위한 것이고, ‘廌(치)’는 설명에 신수(神獸)라 했습니다. 무슨 영스러운 힘이 있는 짐승으로서, 잘못이 있는 사람에 가까이 가면 곧 그것을 알아낸다고 합니다. 그래 옛날 사람들이 죄 인을 잡으려 할 때는 의심스러운 사람을 그 짐승 앞에 끌어다 놓아서 그 죄 있고 없음을 알아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자를 붙여서 썼다고 합니다. 요새말로 한다면 거짓말 탐지기입니다.
그와 같이 해서 법(法)은 맨 첨에는 잘못, 형벌 그런 뜻으로 썼는데, 인문이 발달함에 따라 그 표준이 되는 법률의 뜻으로, 나아가서는 이론적으로 진리라는 뜻으로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불경에서 다르마(dharma)를 법(法)으로 번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장자는 그「재유」(在育)편에서
천하지만 맡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몬(物)이요, 낮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씨이며, 가리워져 있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이요, 거칠지만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이며, 멀지만 거기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의(義)요, 가깝지만 넓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랑(仁)이며, 마디가 있지만 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禮)요, 가운데지만 높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덕(德)이며, 하나지만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길(道)이요, 검스럽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늘이다.
했는데, 곽자현(郭子玄)이, 거기 주를 놓으면서 그 법 조목에서 법이란 ‘묘한 일의 자죽’ (法者妙事之迹)이라고 했고, 관자(管子)도「임법」(任法)편에서 법이란 ‘천하에 다시 없는 길’ (法者 天下之至道也)이라 했는데, 그 주에도 역시 ‘법자묘사지적(法者妙之迹)’이라고 했습니다.
그 묘사(妙事)란 무엇이겠습니까? 천하의 씨을 하나 되게 하는 일입니다. 노자가 천하는 신기(神器)라 불가위야(不可爲也)니, 위자(爲者)는 패지(敗之)하고 집자야실지(執者也失之)라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정치란 천하의 씨의 하나 되게 하자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됨은 일(事)로는 될 수 없습니다. 일이란 물건과 물건 사이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로 씨을 묶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물건과 일이 벌어지기 전인 바탈(性) 혹은 정신에서만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속에서 되어서 밖으로 비쳐나올 것이지, 밖에서 속으로 틀어막아서 될 것이 아닙니다. 참을 말한다면, 믿음의 일이지 제도나 다스림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묘사지적(妙事之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적(迹)은 그 일이 되어진 자죽, 겉에 나타난 것입니다. 관자도 그것을 모른 것은 아니나,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계에 붙은 사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법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하나로 묶어 부리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노자의 말과 비슷한듯하면서 크게 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군자는 불기(不器)라, 그릇되려 않는다” 한 공자가 관중(管仲)을 평해서 ‘관중지기소재’ (管仲之器小哉)라 했습니다. 관중의 공적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아니었다면 나도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를 작은 그릇이라 한 것은 참(聖) 지경을 목적하지 않고 현실계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 떠난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도 “거칠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法)”이라고 했습니다. 법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상을 말하고 초월적인 정신의 세계를 목적하면서도 무정부주의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은 거친 것이지 묘(妙)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고 쓰는 사람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죽이지 산 생명 그 자체는 아닌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기관, 정치가, 법률가라는 법률가는 다 관중의 자리에 섭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못되는 일이 많습니다. 관중의 용한 점은 지극한 믿음, 사랑, 무위, 자연의 지경에는 못서면서도, 현실계를 주장하는 법칙은 법칙대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법(法)에 맡기지, 지(智)에 맡기지 않으며, 수(數)에 맡기지, 설(說)에 맡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지(智)란 꾀를 말하는 것이고 수(數)는 숫자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설(說)은 그저 구변 좋은 말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때 중국문화를 야만민족의 손에서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중의 자리에도 갈수 없으니, 하물며 성인의 하는 무위(無爲)의 정치겠습니까?
법은 씨알에만 있습니다. 말하자면 씨알에 물을 주고 밭을 갈고 김을 매는 것이 법입니다. 그 법을 쥐는 사람이 아기를 위해 고기를 지켜주마 하는 고양이나 이리의 속셈일 때 씨알은 결딴나는 것입니다. 소동파(蘇東坡)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평한 시가 있습니다.
장려과반거홀홀 (杖藜裹飯去忽忽)
과안청전전수공 (過眼靑錢轉手空)
영득아동어음호 (贏得兒童語音好)
일년강반재성중 (一年强半在城中)
명아줏대 지팡이에 밥 싸가지고 총총걸음 걸어가서, 시퍼던 새 돈 손을 거쳐 지나가는 것만 볼뿐 손은 텅 비었다. 얻는 것이라고는(서울 장안 왔다갔다) 농업자금 탄답시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이(서울 말씨 배워) 말씨가 고와진 것뿐(아무것도 없고) 일년의 절반 이상은(돈 탄답시고 왔다 갔다 하며) 서울에 와 있었구나 하는 뜻입니다.
왕안석인들 노상 생각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신정(新政)은 말을 잘해서만 되는 것 아니고, 그럴만한 인격과 사상의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인데, 자기의 재주만 믿고 신법을 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비평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의 말씨가 좋아졌을 뿐, 농사한다는 사람이 일년의 반 이상 서울에만 와 있었다는 데 그 부드러운 듯하면서 날카로운 익살이 있습니다.
씨알 여러분, 여러분의 손에는 무엇이 쥐어졌으며, 여러분 집안의 말씨는 어떠며, 여러분은 어디를 가 있습니까?
씨알의 소리 1979. 7월 85호
저작집; 9- 281
전집; 8-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