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곡 단테의 질문과 베아트리체의 대답, 정의로운 복수,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 형
단테는 경외심에 베아트리체에게 의문을 질문하지 못하나 베아트리체는 미리 알고 빛나는 미소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결코 틀리지 않는 내 직관으로 보면 그대는
어떻게 하면 복수가 의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단테는 어떻게 하면 복수가 의롭게 이루어지는지(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정의로운 복수인지)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담에 의해 지은 원죄 이후 인류들이 고통 받아 왔습니다. 그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의 의미에 대해 베아트리체가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보다 더 위대한 정의가 없을 테지만, 그 본성을 지니고 고난을 당하신 것만큼
불의한 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사건에서 여러 결과들이 나온 것이지요.
하나의 죽음을 하느님과 유대인이 함께 원했으니,
그 때문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열렸던 겁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여러 가지의 결과가 따라옴을 뜻합니다.
모순을 통해 진리를 찾는 철학 방법인, 스콜라 철학의 변증법적 역설을 요약한 시구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담과 나아가 인간 모두의 죄를 구속(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십자가 처형이) 하느님의 기획하신 일의 일부로써 바람직했고 하느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은 유대인도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다른 측면에서 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했던 그들의 동기가 사악했고 그들이 느낀 기쁨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제 공정한 복수가 공정하게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을
그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하실 겁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상들입니다.
십자기에 목 박히는 그리스도, 알폰소 카노, 마드리드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 스페인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성인들, 프라 안젤리코, 피렌체 산 마르코 미술관
프랑스 콜마르 운터린덴 박물관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보러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프랑스 콜마르로 갔습니다. 독일 자동차 여행이어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프랑스 콜마르까지 52Km 밖에 되지 않아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를 보러 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콜마르의 운터린덴 박물관, 이젠하임 제단화, 프랑스
박물관 2층에서 본 제단화, 2010년 독일 30일간 자동차 여행 중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전쟁에 파괴된 교회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구 교회를 파괴된 모습 그대로 두고 곁에 새로운 빌헬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 구교회 카이저 빌헬름 교회 신교회
구 교회를 나가 마주보는 신교회 입구로 들어서면 또 깜짝 놀랍니다. 푸른색 배경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있습니다. 성당 밖 외관의 모습은 꼭 벌집처럼 생겼는데(위 오른쪽 사진) 그 벌집의 하나하나에 푸른 유리가 들어가 사르트르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고 있습니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의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와 예수상
카이저 빌헬름 교회의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와 예수상
스페인 코르도바의 등불의 그리스도 상입니다.
코르도바 등불의 그리스도 상, 스페인
골목 양쪽에 수도원이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마한 광장이 있는데 '등불의 그리스도 광장(Plazuela del Cristo de los Faroles)이랍니다. 바카추치노스 성당 벽면에 둘러싸인 카푸치노스 광장이라고도 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둥불의 그리스도 상 앞에 와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는 분이 없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여인 두 분이 아주 오랫동안 간절하게 기도를 하여 기다리다 기다리다 할 수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블로그에 이 사진을 올리다 딸과 캄캄한 밤에 이 그리스도 상으로 보고 호텔로 가면서 무서웠던 생각, 어떤 친절한 아저씨가 당신의 집에 가는 길이 아니면서도 가는 길인 척 하며 우리를 바래다 주던 일이 생각이 나 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여행했던 일이 이렇게 아름답고 가슴 설레는 추억이 될 줄이야! 2014년 스페인 코르도바 여행중 -
또 다른 질문은 하느님은 굳이 ‘예수의 탄생과 십자가형’이라는 방식을 썼는가(하느님의 최상의 선택) 하는 점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서 베아트리체는 설명을 해 줍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분을 닮으며 그분을 기쁘게 합니다. 하느님의 빛은 자기 형상을 더 닮은 것 곳에서 가장 밝게 빛이 납니다.
인간은 불멸성, 자유의지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특권을 누렸으므로 이 중 죄를 하나만 가져도 그 고귀한 상태에서 떨어집니다.
그대들의 본성은 그 씨앗 속에서 처음 죄를 범했을 때 이러한 존엄에서 추방되었고 낙원도 잃어 버렸지요.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면 알 텐데,
하느님께서 친절을 베풀어 용서를
내리시거나,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씻는, 그런 통로들 중
하나를 지나지 않고서는
어떤 길로도, 잃어버린 것을 찾지 못할 겁니다.
죄에 대한 올바를 보속이 없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없는데 인간의 안전한 삶을 되찾는 방법은 두 가지뿐입니다. 자애심으로 용서하던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 매듭을 짓도록(어리석음을 씻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곤란하고 하느님은 너그럽게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은 인간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말하자면 두 길들(자비와 정의) 중 하나로,
혹은 두 길 모두를 통해
인간이 완전한 삶으로 이르는 길을 마련하신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추어 죽을 육신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 어떤 수단으로도 정의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물, 불 공기, 땅, 그리고 그것들이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니 썪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입니다.
베아트리체는 창조와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천상의 세계와 천사들은 실체를 고스란히 지닌 채 하느님이 직접 창조해 그대로 유지되지만 지상의 질료(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물체의 생성과 변화의 바탕(substratum)이 되는 재료)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물체는 창조되는 힘(하느님이 아니라 이차적인 원인이 부여된 것)에 의해 형상을 갖춥니다. 이들은 하느님이 직접적인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썩어서 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동물과 식물의 영혼은 별들의 빛과 그 빛의 운동으로 생겨난 것이고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만들어 육체에 숨을 불어 넣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최후의 심판 때 아담과 이브가 세상에 왔을 때처럼 부활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