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봉(漢拏峰)
송호용 씨 부부에게서 ‘제주도 한 달 살아보기’를 하고 있다는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4층 규모(1층 상가, 2~4층 다세대)의 ‘머무르다’ 카페를 설계하면서 건축주와 설계자로 만난 이 부부는 나와 10년 정도 나이 차이가 있는 친구이다. 그럼에도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부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건축주와 설계자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서로의 가정사 이야기를 나누거나 지인을 소개하기도 하고 가끔 술잔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왠지 제주도에서 번개 만남을 하자는 메시지 같았다. 전에도 술자리에서 여러 번 치앙마이나 조지아에서 한 달 살아보기를 같이 해보자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던 터라 무엇인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히 친구 한 명을 포섭하고 제주에 펜션을 가지고 있는 건설사 대표님과 일정을 맞추었다. 며칠 후 우리는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다.
첫날은 건설사 대표님과 그의 따님, 그리고 친구와 함께 건축학도들답게 추사 기념관, 본테 박물관, 방주교회, 유민 미술관 등의 건축물 탐방을 하는 일정을 소화하고, 안덕면에 있는 건설사 대표의 펜션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송호용 씨 부부와 우리 팀은 송악산 입구에서 만나 송악산 둘레길과 마라도를 둘러보고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고맙게도 송호용 씨가 식사 후에 우리 숙소에서 버스킹을 해주겠다고 한다. 송호용 씨 부부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남편은 싱어송라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아마추어 가수이다.
저녁 메뉴로는 제주도 명물 흑돼지로 푸짐하게 배를 불린 후, 우리 일행을 숙소에 데려다주고 버스킹 장비를 가지러 부부가 묵고 있는 빌라로 향하였다. 숙소는 2층 규모의 복층 빌라로 설계와 시공 모두 훌륭하게 건축된 건물이었다. 부부의 안내로 내부와 외부를 둘러보았다. 건물의 전면에는 3000평 규모의 감귤밭이 펼쳐져 있었다. 한라봉이라고 한다. 그들은 빌라의 주인이자 감귤밭을 운영하는 중년의 여성을 극구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서울서 은퇴를 하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정착 하고 있단다. 그리고 감귤밭의 일부를 일반인들에게 임대를 하고 관리와 수확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의미 있는 노후생활을 준비해 가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도 무언가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송호용 씨 부부는 한 달 살아보기를 체험하면서 제주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장비를 가지고 우리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이 벌써 마당을 깨끗하게 치워놓고 버스킹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버스킹 장비라서 그런지 5분도 되지 않아 조촐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조금은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제주도의 가을 하늘을 조명 삼고, 펜션의 잔디밭을 무대로, 거실에 있는 조명등 몇 개와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멀리 석양빛을 배경으로 송호용 씨가 노래를 시작했고, 우리들은 돌아가며 노래하고 함께 어울려 갔다.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 작은 버스킹은 함께 했던 모든 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제주도의 가을은 아련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제주도에 많은 관심이 있던 시공사 대표와 꿈에 부푼 제주도 생활에 관해서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이들의 희망 사항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어려운 일도 아닌 듯했다. 단지 실천을 못 하고 있을 뿐, 그래서 송호용 씨 부부의 용기 있는 결단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날 아침. 시공사 대표의 제안으로 감귤밭의 창고를 커피숍으로 개조한 카페를 둘러보기로 했다.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검소하면서도 감각 있게 꾸며놓은 카페는 감귤밭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그런 대로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5년 전쯤 월정리 프로젝트로 한 달 넘게 제주도를 오고 갔었고, 가족휴가나 단체 일정으로 가끔 방문했던 일들은 있었지만, 이번만큼 제주도의 매력을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불현듯 감귤을 키워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도 점점 제주도에 매료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부산에 돌아오자마자 주말을 이용하여 반여동 화훼단지에 가서 한라봉 한그루를 샀다. 아파트 발코니에서 키우겠다고 하니까 아주머니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상세히 재배법을 알려주신다. 유실수로는 감나무, 매실 등을 마당에서 키워본 적은 있었지만 아파트 발코니에서 키워보기는 처음이다. 가지치기, 꽃대 잘라주기, 거름주기, 물주기 등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정성을 다해서 키우고 있다.
제주도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올가을도 서서히 깊어가고 있다.
두어 달 뒤에는 제주도 한라봉의 맛을 음미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또한 매일매일 자라가고 있다.
첫댓글 멋있고 아름다운
단막 드라마
잘 보았습니다.ㅎ
일상을 벗어남의 여유로움~
각자의 여유로움?
덕분에
나만의 미래 여유로움을 찾아 봅니다.ㅎ
네^^ 감사합니다
삶의 여유를. 찾아가야 돌터인데요.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