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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후서 주석 ♡
본서의 수신자들은 1절에서 나타난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만 되어 있어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3: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로 보아 전서와 다름없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신자들에게 보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록목적은 고난 받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인데 베드로전서는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를 다루었지만 본서는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과 배교(背敎), 이단사상에 대해서 경고하고(벧후2:1-3), 부도덕한 향락주의 생활(벧후2:4-22)에 빠지지 않도록, 대처하기 위한 권면으로 기록되었다. 본서는 가짜교사들에 대한 경계를 주로 다루면서 하나님의 심판, 주의 교훈과 그에 따른 사도적 정통, 이단의 위험을 의식한 참된 지식의 강조, 주를 따르는 성결한 삶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는 내용이나 문체 또는 영어와 사상에서 부분적으로 유다서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한 것은 "거짓 선생에 대한 경고(벧후2:1-3, 유1:4), 범죄한 천사들(벧후2:4, 유1:6), 소돔과 고모라 멸망(벧후2:6, 유1:7), 천사와의 비교(벧후2:10-12), 발람 선지자를 통한 교훈(벧후2:15-16, 유1:11), 악인의 물 없는 샘(벧후2:17, 유1:12), 사도들의 권면을 기억할 것(벧후3:2, 유1:17), 정욕을 좇아 기롱하는 자들(벧후3:3, 유1:18)"을 들 수 있다.
1:1-2 인사와 성도가 지녀할 덕목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저자 자신의 소개를 두가지 호칭으로 소개한다. 먼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종' dou'lo"(둘로스)는 당시 사회의 풍습은 자신의 주인에게 속한 노예이다. 베드로가 이 호칭을 사용한 것은 오직 자신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속해 있음을 말한다. '사도' ajpovstolo"(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은 자"로 그리스도께 사명을 부여받은 대리인임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시몬' Sumew;n(쉬메이온)은 히브리어 @/[m]vi(쉬므온)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Pevtro"(페트로스)는 아람에서 유래한 khfa"(카파스)와 동일한 뜻으로 "반석"을 의미하는 별명을 뜻한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tou' qeou' kai; !Ihsou' tou' kurivou hJmw'n.)는 원문대로는 [우리 하나님이시여 구주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번역될 수 있다. 전자를 택할 경우는 성부와 성자 두 분을 가리키는 것이 되지만 후자를 택할 경우 성자 한 분만을 가리키게 된다. 원문의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하나의 관사인 tou'(투)에 의해서 수식을 받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가 바른 것이다. '하나님'이란 칭호는 비록 드물게 사용되었어도 이곳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요1:1, 18, 요20:28, 히1:8, 9,). 또한 '구주'라는 단어도 기독론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벧전1:11, 벧전2:20, 벧전3:2, 눅2:11, 요4:42, 행5:31, 행13:23, 엡5:23, 딤후1:10 딛1:4). 의를 힘입어 ejn dikaiosuvnh/(엔 디카이오쉬네) 원문대로는 [의 안에서]이다. '의'는 '보배로운'과 연결되어 믿음을 가진 모든 자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공정을 의미한다(벧후2:5, 7, 8, 벧후3:13).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동일하게 보배로운' ijsovtimon(이소티몬) "동일한 가지, 영광의 가치가 동등한"으로 믿음에는 차별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 안에서는 동일함을 말한다. 2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앎으로' ejpignwvsei(에피그노세이) "인식, 완전히 식별, 인정, 승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알게되는 완전한 지식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됨을 말한다(엡1:17, 골1:10).
1:3-11 주를 좇아 성결한 생활을 하라
3절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th'" qeiva" dunavmew" aujtou')는 원문대로는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라고 해야 한다. 표준새번역은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권능으로' 번역했다. dunavmew"(뒤나메오스)는 '희한한 능력'(행19:11)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수22:22, 시50:1, 사9:6, 겔10:5).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경건' eujsevbeian(유세베이안)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존경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그 뜻을 좇는 생활을 말한다. 이 용어는 목회서신의 특징적인 단어로 10번 사용되었다(딤전2:2, 딤전3:16, 딤전4:7, 8, 딤전6:3, 5, 6, 11, 딤후3:5, 딛1:1). 그 외에 행3:12, 본서 벧후1:3, 6, 7, 벧후3:11에만 사용되었다. '주셨으니' dedwrhmevnh"(데도레메네스) "선사하다, 증정하다"로 현재완료형으로 이미 준 상태로 강하게 표현한다면 주지 않아도 될 대상에게 선물을 줌을 말한다.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보배롭고' tivmia(티미아) "존귀한, 고귀한, 귀중한, 값비싼" 큰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약속을 말한다(벧후3:4, 9, 12, 13).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피하여' ajpofugovnte"(아포퓌곤테스) 부정과거 분사로 [피한 이래로] 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의 재림의 큰 약속을 기억하면 세상의 정욕은 자연스럽게 가까이하지 않는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참예하는 자' koinwnoi;(코이노노이)는 고전적으로는 "동업자, 결혼 계약, 동반자"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 성령과의 교통(고후13:13), 성령과의 교제(고전1:9, 빌3:10), 소유를 나눔, 공유(롬12:13), 동참(빌3:10) 등을 의미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으로 므드셀라(창5:22), 에녹(창5:24), 노아(창6:9), 아브라함(창22:6) 등이 있다.
5-7절 이러므로 kai; aujto; tou'to(카이 아우토 투토) 원문대로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이다. 너희가 더욱 힘써 '더욱 힘써 ... 공급하라' ejpicorhghvsate(에피코레게사테)는 원문에는 5절에 나타나는 단어로 5-7절은 한 문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용어는 공연을 하고 무대를 사용한 비용을 충분히 치룰 때 사용되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치는 여덟까지 미덕들은 세련된 수사학적 표현에 의해서 두 가지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 각 짝의 뒷 단어는 다음 짝의 앞의 것으로 배열되었다. 이와 비슷한 구조로 이루어진 성경은 (잠6:17-19, 롬5:3-5, 8:30, 10:14, 약1:2, 비슷한 목록은 고후6:6, 갈5:22, 골3:12-14, 딤전4:12, 6:11, 딤후2:22, 3:10)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절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절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믿음 : pivstei(피스테이) 이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엡2:8, 9). 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밑바탕이 된다(롬5:1, 히11:1). 이 믿음은 구원을 받게하며(마9:22, 막10:25, 눅5:20, 눅7:50),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게 한다(마15:28, 마17:20, 막2:5, 눅17:6, 요20:27).
덕 : ajrethvn(아레텐)은 a[rjrJhn(알흐렌) "남자"에서 유래한 말로 "남자다움 도덕적 선양, 미덕"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도덕적인 미덕을 샇아감을 시사한다(빌4:8, 벧전2:9).
지식 : gnw'sin(그노신)은 행함이 따르는 실천적인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 통찰력을 말하는 것이며(롬15:14, 고전13:2) 이러한 지식은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얻어진다.
절제 : ejgkravteian(엥크라테이안)는 "자제, 극기" 등을 뜻한다(행24:25). 절제는 고대 그리스 사상과 헬레니즘의 철학적 윤리학에서 높이 평가되는 덕목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방 종교의 지나친 방종과 성적 남용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로 나타난다(갈5:23).
인내 : uJpomonh'/(휘포모넨) "지속적 견딤"으로 신앙의 핍박으로부터 견디는 저항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눅8:15, 롬5:3, 히12:2). 이렇게 인내하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는 약속을 주셨다.
경건 : eujsevbeian(유세베이안) 벧후1:3을 참고하라
형제 우애 : filadelfivan(필라델피안) 베드로는 이미 (벧전1:22, 벧전3:8)에서 언급했다. 이러한 덕목은 롬12:10, 살전4:9, 히13:1, 요일5:1에서도 나온다.
사랑 : ajgavphn(아가펜) 믿음으로 시작된 덕목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친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실천하시고 보여주신 것이며 늘 제일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요3:16, 롬5:5, 요일3:16). 바울은 고전13장에서 사랑을 정의하고 제일 중요한 것으로 마감했다.
8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있어' uJpavrconta(휘파르콘타) "생기다, 행하다"로 실제로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게으르지' ajrgou;"(아르구스)와 '열매 없는' ajkavrpou"(아카르푸스)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함은 게으른 삶으로 안일하고 나태하게 산 연고이다. 이러한 권고는 이미 대하 29:11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미 너희를 택하사 그 앞에 서서 수종들어 섬기며 분향하게 하셨느니라"에서부터 권고한 것이며 잠언서의 주요 주제이다(잠6:6, 잠10:4, 26, 잠12:24, 27, 잠15:19, 잠19:15, 24, 잠20:4, 잠21:25, 잠22:13, 잠24:30, 잠26:14, 15, 16). 예수께서는 마25:26의 달란트 비유에서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고 말씀하셨다.
9절 이런 것이 없는 자는 5-7절에서 말한 8가지의 덕행이 없는 자를 말한다.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소경' tuflov"(튀플로스) "소경, 불투명한"것을 말한 것으로 제대로 사리 분별을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마15:14, 마23:16, 눅6:39, 요9:40, 롬2:19). '원시치' muwpavzwn(미오파존) "눈을 감다, 멀리 볼 수 없다, 근시가 되다"는 의미로 '소경'과 함께 사용되어 단순한 소경보다 그 상태가 훨씬 더 심한 상태를 말한다.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옛' pavlai(팔라이)과 '깨끗케 하심' tou' kaqarismou'(투 카다리모스)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전에 세례를 받았던 자임을 언급한 것이다(행22:16, 고전6:11, 엡5:26, 딛3:5). 전에 세례만 받았지 그 다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과 덕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가리킨다.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은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말한다.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벧전1:15, 벧전2:9). '굳게 하라' bebaivan(베바이안) "안정된, 확고한,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법률 용어로는 '무엇을 확실히 한다'는 의미이다(롬4:16, 히3:14 '확실한', 히6:19 '견고하여').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실족' ptaivshtev(프타이세테) "넘어지다, 죄를 짓다, 헛딛다"로 원래 말(馬)이 디딤돌에서 미끄러지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혹자는 범죄를 의미한다고도 하고, 실수를 말한다고 보기도 하나, 구원을 받지 못함을 뜻한다. '행한즉' poiou'nte"(포이윈테스)은 현재형 능동태로 사용되어 현재로부터 계속해 지속적으로 이러한 덕목들을 행하면 역설적으로는 구원이 있다는 뜻이다. 눅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갈6:9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함으로 행함의 지속적인 믿음이 있을 때 열매가 있음을 말해준다. 11절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영원한 나라' aijwvnion basileivan(아이오니온 바실레이안)은 '영원한 왕국'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이다. '넉넉히' plousivw"(플루시오스) "풍부하게, 충분하도록"과 '주시리라' ejpicorhghqhvsetai(에피코레게데세타이)가 함께 사용되어 그 의미가 더 강조되고 있다. 이 용어는 7절에서는 '공급하라'로 사용된 단어와 같다. 즉 7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으로, 본 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으로 사용되었다. 마16:27절의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을 베드로는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1:12-21 믿음의 근거
12절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진리' ajlhqeiva/(알레테이아)는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글개역성경은 '도(道)'(마22:16), '진리'(요1:17, 요5:33, 요8:32, 요14:6, 요16:13, 요17:17, 19, 요18:37, 38, 롬2:8, 고전13:6, 고후11:10, 걸2;5, 7, 엡4:21, 엡6:14, 살후2:12, 딤전2:7, 딤후3:8, 요일1:8), '진정'(요4:23, 24) '진실'(엡5:9), '참'(고후7:14, 빌1:18, 골1:6, 요일3:18)으로 번역되었다. '섰으나' ejsthrigmevnou"(에스테리그메누스)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눅22:32 "형제를 굳게 하라"고 권면 하실 때 사용하신 것과 같은 용어로 베드로 자신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적 진리로 굳게 선 그리스도인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줄로 여기노니 '장막' skhnwvmati(스케노마티)은 고대 근동에서 유목민들이 임시로 거주하기 위해 사용한 '천막'이다. 본 절에서는 베드로가 자신의 육체(잠시 있다 없어지는)를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14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본문은 요21: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께서 베드로가 순교하게 될 것을 예고한 것이다. (*주) 본 절은 베드로가 본서의 저자임을 뒷받침해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되고 있다.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임박한' tacinhv(타키네) "신속한, 곧"으로 갑작스런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15절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떠난 후에라도'는 로마에서 떠남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말한 것으로 세련된 완곡 어법이다(눅9:31, 히11:22). '떠난' e[xodon(엑소도스)는 눅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에서 사용되었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나 예수님처럼 죽음 후에 부활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나게' mnhvmhn(므네멘) "회고, 기억"으로 자신이 본서를 기록하는 목적을 밝힌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던 적이 있다(막14:72).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것이 '강림' parousivan(파루시안)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사용되었다(마24:3, 27, 37. 29, 살전3:13, 4:15, 약5:7, 요일2:28).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Ouj ga;r sesofismevnoi" muvqoi"(우 가르 세소피스메노이스 뮈도이스) Ouj(우) '아니다'와 ga;r(가르) '왜냐하면'으로 궤변을 늘어놓거나 허구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 말은 신약에서 진리, 복음에 반대되는 의미로 대조되어 항상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딤전1:4, 4:7, 딤후4:4, 딘1:14).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거짓 선지자들처럼 꾸며낸 말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것이며 친히 본 것을 증거하는 것임을 말한다. 베드로는 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으며 복음서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사건을 직접 체험한 장본인이다. 그 중에는 변화산상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했다.
17절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실 때 사용된 히브리적 용법이다(출16:10, 민14:10, 겔1:4, 마17:1-9, 막9:2-10, 눅9:28-36).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도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다(마3:17). 이 사건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아들에게 나타내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18절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하나님의 이러한 임재는 베드로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야고보, 요한도 함께 목격한 것이다. '거룩한 산' tw'/ aJgivw/ o[rei(토 하기오 오레이)는 산의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신 산을 말한 것이다(출3:5, 사4:3, 시68:17). 이 산이 어떤 산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6세기 이전까지는 다볼산(Tabor)으로 이해되었으나 현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이 산은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너무 먼 곳에 있다는 것과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당시 산 정상에는 요새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다볼산은 해발 560m로 '높은 산'이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근래에는 빌립보에서 가깝고 해발 2,743m인 헬몬산(Hermon)으로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다.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베드로는 자신들만의 증거가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말씀임을 강조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어두운 데서 밝히 비추이는 등불로 비유되고 있다(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등불은 날이 새어 빛이 비추이면 필요 없어지는 것처럼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고 이제는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것이 되었다. 비유적으로 '날'은 재림 때를 말하는 것으로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추어 떠오르게 되는 재림 때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20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ijdiva" ejpiluvsew"(이디아스 에필뤼세오스), 베드로는 거짓 교사나 선생들을 염두해 두고 성경에 예언된 모든 해석들을 자의적으로 함부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벧후2:1, 벧후3:16). 21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성경을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풀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 사람의 생각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대로 풀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반대로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기에 성령의 감동으로 풀어져야함을 말한다. 베드로는 성경은 이중적인 저작권을 암시한다. 성령께서는 영감을 주셔서 기록자들에게 오류가 없는 성경을 쓰도록 도우셨다(고전14:37, 딤3:10-17). 구약의 예언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삼하23:2, 렘1:7, 9).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부정했다(벧후1:16절).
2:1-22 거짓 선지자들
1절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민간' ejn tw'/ law'/(엔 토 라오) 원문을 직역한다면 [민중들 사이에]이다. laov"(라오스)는 "백성, 민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롬15:11, 유1:5).
'거짓 선생들'과 구약의 '거짓 선지자' yeudoprofh'tai(프슈도프로페타이) '위장한 예언자'를 대조하여 일치시키고 있으며, 베드로는 이러한 자들이 구약시대에도 있었음을(신13:1-5, 18:20, 왕상18:19, 22:6-, 렘5:31, 23:9-18, 겔13:1-10, 미3:5-12) 상기시키면서 현재도 이와 같이 미혹하는 자들이 있음을 말한다(고후11:13-15, 갈1:7, 2:4, 3:1, 5:10, 살후2:3, 11, 딤전4:1-3, 6:5, 딛1:11).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 마음대로 해석하며 말하는 자들로(신18:20, 렘14:14, 렘23:21, 겔13:2-7) 하나님의 계시적인 뜻보다는 백성들의 기대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사사로이 말하는 자들이다.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멸망케 할 이단' aiJrevsei" ajpwleiva"(하이레세이스 아폴레이아스) [멸망케 하는 이단들]로 이단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멸망으로 끌어들인다는 뜻이다. aiJrevsei"(하이레세이스) "이단, 당파"라는 말인데 aiJrevomai(하이레오마이) "자신이 선택하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다. 원래는 명예로운 뜻으로 자신이 선택한 어떤 신념이나 행동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후 플라톤(Plato)의 하이레시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플라톤주의자들을 의미하는 데 불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그 뜻이 변하게 되었다. 바울의 사상에서 이단들과 종파들은 함께 비난받아야 할 것들이었다(고전11:18, 19). 이렇게 변하게된 데에는 베드로는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 유일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을 저버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론을 따름으로 그리스도인들로부터는 이단으로 명명된 것이다. 2절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호색하는 것' ajselgeivai"(아셀게이아이스)은 이방종교에서 행해지던 온갖 성적행위로서 음란과 방탕함의 집단적인 타락을 지적한 것이다. 이 용어는 '방탕'(롬13:13, 벧전4:3), '음란'(벧후2:18)으로 나온다.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진리의 도'의 '도' hJ oJdo;"(헤 호도스)는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말이다(행9:2, 행19:9, 행24:14, 22). 예수께서는 이 용어를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에 사용되었다. 3절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탐심' pleonexiva/(플레오넥시아) '타인에 대해 가지는 어떤 이익'을 말하는 것으로 남의 것에 대한 소유욕으로 이웃에 대한 희생정신이 아닌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리킨다(롬1:29, 엡5:3). 엡4:19에서는 '욕심'으로 번역되었다. '지은 말' plastoi'" lovgoi"(플라스토이스 로고이스) 이 용어는 이곳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날조된 말'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이렇게 없는 말을 꾸며내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심판' krivma(크리마)과 '멸망' ajpwvleia(아폴레이아)이 이들에게 임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빌3:19). 이런 심판에 대한 예로 베드로는 4절부터 10절까지 들고 있다. 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본문의 처음에는 3절의 내용을 연결시키는 Eij ga;r(에이 가르) '그렇기 때문에'가 있다. 이 말은 9절에서야 귀결된다. '범죄한 천사'는 아담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 반역한 천사들을 가리킨다(창6:1-4, 유1:6, 계12:7, 계20:1-3). '용서치 아니하시고' oujk ejfeivsato(우크 에페이사토)는 직설법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종결된 상태임을 말해준다.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지옥' tartarwvsa"(타르타로사스)는 원문성경에서 이곳에만 기록된 단어로 헬라신화에서 반역하는 신들이 형벌을 받는 곳인데 베드로는 여기서 타락한 천사가 심판을 받는 장소로 언급한다(유1:6). 타락한 천사의 심판에 대해서 요16:13, 고전6:3, 계20:7-10에 언급되었다. 5절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원문의 첫 부분에는 kai;(카이) '그리고'가 6, 7절에도 나타나며 심판의 예가 계속적으로 기록됨을 말해준다. '옛 세상'은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함으로 이미 타락한 세상에 대해서 심판하신 예가 있는 것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심판도 그와 같이 있을 것임을 나타낸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 ajsebw'n(아세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무관사 여격으로 사용되어 노아의 8식구 이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베드로는 계속해서 불로 심판하셨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예로 들고 있다. 이 사건은 창19장에 언급된 것으로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잿더미가 된 것처럼 '도시들' povlei"(폴레이스)로 복수로 사용되어 이 성 뿐만이 아니라 성을 비롯한 주변 도시들까지도 멸망당했음을 말한다(창19:24-28, 유1:7). 7절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tw'n ajqevsmwn ejn ajselgeiva/(톤 아테스몬 엔 아셀게이아) 문자적으로는 [그 법이 없고 음란한 속에 있는]뜻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음란한 향락만을 쫓는 그 행실 때문에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고통하는'의 어근 kataponevw(카타포네오)은 '고생하다, 압제당하다, 녹초가 되다'의 뜻으로 롯은 그들의 음란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롯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윤리적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함으로 구원을 받았다.
8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롯이 당하는 고통의 상황에 대해서 7절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blevmmati ga;r kai; ajkoh'/(가르 카이)가 "그렇기 때문에" '보다'와 '듣다'의 가운데 위치함으로 그 이유를 설명해 준 것이다. '상하니라' ejbasavnizen(에바사니젠)은 7절의 '고통하는' kataponevw(카타포네오)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로 실제로 고문을 하는 것처럼 괴롭히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롯의 모습을 하나님은 의롭게 여기셨던 것이다(창19:4-11, 전7:20). 9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경건한 자' eujsebei'"(유세베이스)는 6절의 '경건치 아니한 자들' ajsebw'n(아세본)과 대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경건'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이 있으며, 순종하는 자를 의미한다. '시험' peirasmou'(페이라스무)는 죄악 상태에 빠지는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들이 당하는 시련을 말한다(눅8:13, 행20:19, 벧전1:6).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형벌 아래 두어' kolazomevnou"(콜라조메누스)는 분사 현재형 수동태로 현재 심판이 내려져 있는 상태이며 형이 집행되기 전임을 뜻한다.
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ojpivsw sarko;"(오피소 사르코스)는 관사가 없으므로 육체적 속성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지적하는 것은 '정욕'과 '사욕'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주관하는 이' kuriovthto"(퀴리오테토스)는 '정부의 통치자'를 말한 것인데 베드로는 이 추상명사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시켜서 무분별한 성적 욕심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취급하며 그러한 자들에게 형벌이 있을 것임을 말한다.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담대하고' Tolmhtaiv(톨메타이) '건방진, 감히 ...하다'는 뜻으로 숭고한 대담성이 아닌 악을 행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철면피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유대 교사들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유1:8). '영광 있는 자' dovxa"(독사스) '거룩한, 찬양'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을 말한다. 11절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원문에는 비교 접속사 o{pou(호푸) '이에 반하여'로 10절과 대조하여 언급한 것으로 거짓 선생들의 교만을 천사들에 비교한다. '천사'는 미가엘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악한 천사들 보다 강하다(계12:9). 이렇게 강한 힘의 소유자조차도 그 심판의 권한을 하나님께 돌린다(유1:9). 12절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이미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진입한 교사들로 베드로는 말하고 이들에 대한 심판은 필연적인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성 없는 짐승은 도살하게 된다(계12:11-13).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거짓 교사들의 무지함이 부른 엄청난 결과를 말한다. 그들은 결국 거룩한 자와 진리를 훼방하는 죄를 저지르고 만다.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ejn th'/ fqora'/ aujtw'n kai fqarhvsontai) 문자적으로는 [멸망 안에서 그들은 전멸할 것이다]이다.
13절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불의' ajdikiva"(아디키아스) '불의한 행동, 정의를 방해하는 행동'을 통해서 그 값을 그대로 받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을 말한다(사3:11, 옵1:15, 마16:27, 롬2:6).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낮에' ejn hJmevra/(엔 헤메라)는 "낮, 매일, 어느 날에, 일시적인"등으로 해석되는데 낮을 포함하는 '아무 때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개의 경우 연락을 즐기더라도 낮 시간을 피하고 밤 시간에 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낮이고 밤이고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았다(전10:16, 사5:11). '점과 흠'은 이들의 오점을 찍어서 말한 것이다(엡5:27, 벧전1:19).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간사한' ajpavtai"(아파타이스) '현혹, 기만적, 속임수'로 이들은 경건해야할 연회의 경우에도 간사함으로 더럽히고 있다.
14절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음심' moicalivdo"(모이칼리도스) '간음한 여인, 요부(妖婦)'(마12:39, 롬7:3, 약4:4)로 거짓 교사들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굳세지 못한 영혼들'은 본서의 수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벧후3:16), 베드로 자신이 연약했던 당시를 기억하고 대조하고 있는 듯 하다(눅22:32). '유혹하며' deleavzonte"(델레아존테스)는 미끼로 물고기를 유혹하는 것과 같이 거짓 교사들의 꾀임은 거짓이요 간사한 것을 뜻한다.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연단' gegumnasmevnhn(게귐나스메넨)은 '훈련하다, 연단하다'로 분사 완료형인데 이것은 이들의 탐욕은 이미 진행되어 왔던 것으로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습관화 되어있는 상태이다. 이런 자들은 '저주의 자식이라' katavra" tevkna(카타라스 테칸아) 히브리식 표현으로는 [저주가 그들 위에 있도다]이다(눅10:6, 엡2:8, 살후2:3, 벧전1:14). 15절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는 가짜 교사들을 구약의 대표적인 거짓 예언자 발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또한 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발람의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돈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거짓 예언을 하고(민22:5-24:25), 부도덕한 것을 교훈한(민31:16, 계2:14) 역사적 사실을 가리킨다. 발람은 발락의 뇌물을 받지 않았지만 그가 불의 삯을 사랑한 것만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잘못 인도한 책임이 발람에게 있다고 믿었고,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갔을 때 발람을 칼로 죽여 버렸다(민31:8). 16절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발락이 주는 삯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은 백성을 거짓으로 저주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의도적으로 어긴 발람의 죄가 '자기의 불법'인 것이다.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이런 거짓 선지자의 행동을 하나님은 말 못하는 나귀를 통해서 책망하셨다. 베드로는 이러한 발람의 거짓됨과 거짓교사들을 행위가 같은 것임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17절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물 없는 샘'은 생명이 없는 거짓 교훈을 말한다(마12:43, 눅11:24, 요4:13). 물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달려간 갈급한 나그네에게 '물 없는 샘'이란 혹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땅에는 '물 없는 샘'이 많았다(창37:24, 렘14:3).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안개'는 빛이 있기 전에 마치 자신이 세상을 다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빛이 있으면 물러가야 하는 것처럼 거짓선지자의 증거는 그와 같은 것이다. '캄캄한 어두움' oJ zovfo" tou' skovtou"(호 조포스 투 스코투스)은 지옥을 표현한 것이다. '예비되어 있나니' tethvrhtai(테테라타이)는 완료형 수동태로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음을 말한다. 18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uJpevrogka ga;r mataiovthto"(휘페롱카 가르 마타이오테오스) 문자적으로는 [너무 큰 거짓말을 한 까닭에]로 과장되고 부풀린 무익한 말을 마구 쏟아내어, 거짓교사들이 미친 영향은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음란으로써' ajselgeivai"(아셀게이아이스)는 수단을 말하는 여격 복수로 온갖 종류의 '부정하고 방탕한 음란한 행위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19절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초대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 오해 했다기 보다는 베드로가 지금까지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욕심을 인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고 남용하고 있었다(요8:32, 고후3:17, 갈2:4, 갈5:1).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 증거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종들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베드로는 당신 전쟁에서 패한 국가의 백성들은 모두가 승리한 국가에 종으로 끌려가는 것을 거짓교사들에게 적용시켰다. 이미 거짓 교사들은 '종이 됨이니라' dedouvlwtai(데둘로타이) 수동태 완료형으로 종이 되어 왔음을 말한다. 20절 만일 저희가 eij ga;r(에이 가르), ei(에이) '...이라면, 만약 ...이라면'이지만 ga;r(가르)는 종속 접속사로 '저희'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본서의 수신자들로 또는 거짓 선지자나 교사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전체적으로 본서의 주제인 거짓 교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베드로가 의도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다시 언급한 것은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며 지식의 원천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더러움' miavsmata(미아스마타)은 '불결, 부정'을 말한 것으로 이들이 저지른 음란(7절)을 말한 것이다.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다시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지면 처음 이방인이었던 상태보다 더 나쁘게 변한다는 것이다(마12:45, 눅11:26, 히10:26). 21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의의 도'는 oJdo;n th'" dikaiosuvnh"(호돈 테스 디카이오쉬네스스) [의의 그 도]로 벧후2:2의 '진리의 도'와 같은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복음(마21:32)을 뜻한다. '저버리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대조하여 알지 못하는 것보다 '저버리는 것' uJpostrevyai(휘포스트렢사이)이 '뒤돌아 오다'로 배교를 의미한다. 이것은 더 큰 죄이며 회개할 기회를 다 잃어버린 상태임을 말한다(벧후2:20, 히3:12-14). 22절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는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잠26:11, 사56:10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거짓 교사들에 대한 극단의 표현으로 그것이 곧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sumbevbhken(쉼베베켄) 현재완료형 능동태로 이미 그렇게 결론이 난 상태임을 말함으로 결론을 짖고 있다. 잘못 된 교훈을 가르치거나 받는 것은 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비교하여 짐승과 같은 짖을 하고있음을 말해준다.
3:1-7 재림의 약속
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제' h[dh(에데) '바로, 이때까지'로 둘째 편지를 수식하는 것으로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기록됨을 나타낸다. '사랑하는 자들아' ajgaphtoiv(아가페토이) 수신자들을 부르는 애칭, 호격으로 사용되어(8, 14, 17) 다시 한번 독자들의 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베드로가 이 두 편지를 보내는 목적은 '진실한 마음 eijlikrinh' diavnoian(에일리크리네 디아노이안)을 일깨우기'위한 것이었다. 문자적으로는 [순수한 마음]이다. 베드로는 독자들이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절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는 거짓 교사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1:19-21),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말씀은 사실이며 이것을 기록한 선지자는 '거룩한' aJgivwn(하기온) 자들이다. 거룩한 자들이 기록한 것이 어찌 거짓일 수 있겠냐는 의미가 담겨있다.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명하신 것' ejntolh'"(엡톨레스)은 '명령, 계명, 계율'로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되었지만 원래는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령한 것이다. 3절 먼저 이것을 알찌니 tou'to(투토) prw'ton(프로톤:먼저, 첫째로) ginwvskonte" (기노스콘테스:이해하라) 베드로의 용법으로(벧후1:20), 앞서 언급한 것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말세에 ejp! ejscavtwn tw'n hJmerw'n(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문자 적으로는 [마지막 날에 대하여]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신약시대를 말한다(벧전1:5, 20, 유1:18). 이런 표현은 오순절 이후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기롱' 어근단어는 ejmpaivkth"(엠파익테스) "조소하는 자, 거짓 선생, 비웃는 자"를 말한다. 동사가 먼저 나오고 주어가 마지막에 기록되어 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4절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알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강한 부정을 말하는 질문이다(시42:3, 시79:10, 렘17:15, 말2:17). 기롱하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마24:34, 막8:38, 요14:3에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며 승천하실 때 천사가 약속했다(행1:11, 행3:20). 사도들 또한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전파했다(살전4:15, 살전5:1-11, 살후2:1).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들의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근거로 조상이 죽은 후로부터 창조부터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이다. 5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본문은 창1:3-25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창조됨을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 이들은 '부러' qevlonta"(텔론타스) '고의로, 의도적으로' '잊으려' lanqavnei(란타네이) '깨닫지 못하다, 감추다'로 사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말한다. 6절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세상이 불변하다고 주장하는 기롱자들에 대해 창세기 7장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를 예로 들어 반박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7절 이제 oiJ de; nu'n(오이 데 뉜) [그러나 지금은]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 동일한 말씀'은 5,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킨다. 다만 처음 심판은 물 심판이었고 이제는 불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불 심판은 스토아 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미 예언되었다(사29:6, 사30:30, 단7:9, 욜2:30, 31). 예수께서도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마3:12, 마13:40, 눅3:9, 17).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throuvmenoi(테로윈엔오이) '억류하다, 억제하다, 연장시키다'로 현재형 수동태로 이러한 심판이 코앞에 이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3:8-13 재림을 위한 성도의 준비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베드로는 시편90: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를 재구성하여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개념에 차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본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대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를 인간의 시간 개념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이해하고 주의 재림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나 시한부 종말론 자들에 미혹되지 말 것을 권고한 것이다.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종말은 더디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회개' metavnoian(메타노이아)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막1:4, 롬2:4). '오래 참으사' makroqumei'(마크로데메이)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지금도 참고 계심을 말한다. 10절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주의 날'은 일반적으로 심판과 관련된 주님의 재림을 말한다(사2:12, 말3:2, 행2:20, 고전5:5, 살전5:2, 살후2:2).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재림하실 것을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하신 적이 있다(마24:43, 눅12:39). 베드로는 이 주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큰 소리로' rJoizhdo;n(로이제돈) '깨지는 소리, 강풍이 부는 소리'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이 파멸될 때 나는 심판의 소리를 말한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체질' stoicei'a(스토이케이아) '연속적 구성, 순서적인 것'인데 만물의 기본적인 요소을 말한다(갈4:3, 골2:8, 히5:12). '뜨거운 불' kausouvmena(카위수메나)은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심판의 불로 '드러나리로다' euJreqhvsetai(휴르테세타이)인데 다른 사본에는 katakahvsetai(카타카에세타이) '불타리로다'로 되어있다. 이 의미는 완전히 타서 용해된다는 뜻이다. 11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풀어지리니' luomevnwn(뤼오멘온) '분해되다, 해체되다, 파괴되다'로 만물이 불에 녹아 없어짐을 말한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되어야' uJpavrcein(휘파르케인) '생기다, 존재하다, 행하다'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의 종말론적 삶을 가리킨다.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나님의 날'은 10절의 '주의 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모하라' speuvdonta"(스퓨돈타스) '간절히 기다리다'는 의미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에 빨리 응답하기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심판과 천국이 준비되어 있음을 하나님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기인한다(사11:4, 5, 사45:8, 렘23:5-7, 단9:24). 예수께서는 줄곧 자신의 복음선포에 있어서 늘 천국이 주제이며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다(마3:2, 마4:17, 23, 마5:3, 마10:7, 마13:11, 24, 38, 47, 마16:19, 마22:2, 마24:14). 이 말씀은 마태가 주로 기록하고 있어 마태복음은 '천국복음'이라 하겠다.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이곳이 아닌 분명 다른 장소임을 말한다(사65:17, 사66:22, 마19:28, 롬8:21, 계21:1). 이 세상의 심판이 임하는 때에 현재의 이곳에는 불 심판으로 남은 것이 없지만 새로운 곳이 준비되었고(요14:2-3) 그곳으로 인도하심을 '바라보도다' prosdokw'men(프로스도코멘)는 현재형으로 어근 prosdokavw(프로스도카오) '기다리다, 대망하다'에서 나온 말로 소망하며 기다리는 간절함이 배어있는 용어이다.
3:14-18 마지막 권면과 축복
14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바라보나니' prosdokw'nte"(프로스도콘테스)는 13절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는 '점도 없고' a[spiloi(아스필로이) '흠도 없이' ajmwvmhtoi(아모메토이)는 성도의 거룩한 삶을 가리킨다(빌2:15, 벧전1:19). '힘쓰라' spoudavsate(스퓨다사테) '속도를 내다, 간절히 기다리다'는 뜻으로 경주하는 자가 최선을 다해서 달음질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이다. 15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베드로는 9절에서 연결하여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얻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ajgaphto;" hJmw'n ajdelfo;"(아가페토스 헤몬 아델포스) 원문의 순서대로 나열한다면 [사랑하는 우리의 형제]로 베드로는 바울을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형제라는 호칭을 동역자를 부를 때 사용했다(고후2:13, 빌2:25, 살전3:2).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바울이 독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가리키는 것인데 정확하게 어떤 것, 어느 부분이라고 지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언급이 충분히 들어있는 서신들(데살로니가,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 소아시아에 보낸 편지 중) 로 볼 수 있다. 16절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바울 서신이 베드로가 편지를 보낼 때 이미 상당히 퍼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바울이 기록한 여러 서신에는 독자들이 싶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을 말한다. 바울이 잘못 쓰고 교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기록한 주제가 난해하게 생각되는 부분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던 사상과 다른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율법으로 해방을 받았다(롬7:4, 롬8:1, 2, 갈3:10)는 부분을 이해할 때 도덕적 폐기로 오해하는 것 등이다(롬6:1-7, 고전6:).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무식한 자들' ajmaqei'"(아마데이스)는 aj(아) 부정 접두어와 manqavnw(만다노)의 합성어로 성령을 받지 못함으로 깨닫지 못했거나(요6:45) 사도들로부터 배우지 못한 자(행2:42)을 가리킨다. '다른 성경' grafa;"(그라파스)은 구약성경을 비롯한 바울 서신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경으로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서신들도 함께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억지로 풀다가' streblou'sin(스트레불루신) '이탈하다, 비틀다, 왜곡하다'로 억지로 짜맞추는 식으로 성경을 푸는 거짓 선생들을 가리킨다. 17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본 절과 18절은 베드로 후서의 결론으로 위에서 강조한 것을 다시 종합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무법한 자들'은 ajqevsmwn(아데스몬) '하나님의 법이 없는,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들, 거짓 선생, 기롱하는 자로 베드로가 지금까지 언급한 그리스도인들을 방해하는 자들을 총칭한 것이다.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삼가라' fulavssesqe(퓔랏세스데)는 fulavssw(퓔랏소) '감시하다, 경계하다, 수호하다'의 명령형 현재 중간태로 '굳센' sthrigmou'(스테리그모위) '견고한, 확고한'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 한다. 18절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지식' gnwvsei(그노세이) '행위를 아는 것, 학식'이 처음과 같이 은혜가 주어진 상태에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체험적(성령의 역사)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영광과 은혜가 '영원한 날까지' kai; eij" hJmevran aijw'no"(카이 에이스 헤메란 아이노스) [그 시대의 날까지] 성도 개개인에게 있기를 축복하며 베드로는 서신을 맺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