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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45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사순 제4주간 수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DnC9pDyEo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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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 측의 메시지 ‘주님 탄생 예고’ 앞에 보여준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 그러나 부담스럽고 두려운 초대 앞에 마리아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으로 응답합니다. 나자렛 소녀의 응답의 말씀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나 단호한 결기로 가득한 마리아의 응답 앞에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표현이 아마도 총애(寵愛)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죽어도 못합니다?”라며 도망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하직할 나이라 죄송합니다!”
“제 나이 이제 열 여섯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께서 보인 응답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예라고 응답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시련이 엄청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저를 원하시니,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주님께서 저를 초대하시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예! 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귀, 영적인 귀, 마음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관계로, 초대의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음성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음성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잘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망설인다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쁘게, 즉각적으로 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측의 적극적인 호응과 응답과 협력, 그것이 참된 영성 생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는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영성생활의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니, 기쁨에 찬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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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를 낮추는 말보다 나를 높이는 말이 믿기 더 어렵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커다란 믿음의 시험을 받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믿음의 도전입니다.
어찌 보면 그냥 “아멘!”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말보다 높이는 말을 더 믿기 어려워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만약 누가 “나는 네가 어젯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섬뜩할까요? 이것이 나를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높아지면 그 높은 수준의 삶을 살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낮추려 합니다.
즈카르야는 예언자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수행해야 하는 소명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남과 다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영국의 살아있는 비너스, 앨리슨 래퍼’의 이야기입니다. 래퍼는 두 팔이 없고 기형적으로 짧은 다리를 지니고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19년 동안 복지시설에서 자랐습니다. 스물한 살 때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 때문에 9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몸으로 혼자서 아들 패리스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불편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작품의 소재로 삼는 등 적극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극복했으며, 2003년에 스페인 ‘올해의 여성상’과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세계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행복하다. 장애인을 일컫는 ‘disable’이란 말은 사회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앨리슨, 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래퍼는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장애인의 몸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다름이 내 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했으며, 나아가서 자부심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출처: ‘안식일학교; 교과토의 자료, 제9과 자존감, 다음 카페]
사람의 삶의 질은 ‘자신이 어느 만큼 귀중한 존재이냐는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교회라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나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에 “아멘!” 하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교리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면, 그분의 뜻을 따라주기는 해야겠지만, 하느님의 유일한 자녀와 한 몸으로서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누구를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이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나의 정체성만큼 변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핵심이 담긴 교리를 하나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하느님께서 저희를 하느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와 분명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된다는 것까지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닮으신 것입니다.
공지: 유튜브 강론을 보시려면 유튜브 검색창에 “삼용 묵상”만 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해당하는 날짜의 강론을 찾아 클릭하시면 됩니다. 묵상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날 저녁 6시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동영상을 통해 여러분을 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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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마리아의 하느님의 뜻에 대한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복음: 루가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에게 내려와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신 성령께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의 양식인 빵과 포도주에 내리시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거룩한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믿는 이들의 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마리아의 잉태는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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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메시아의 탄생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는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제 이 예언은 나자렛에 사는 한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예언의 성취이자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천사의 인사말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기쁨의 실현이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힘이 되는 약속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거나 그들이 전쟁에 나설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이제 천사는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 그 기쁨을 전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리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개인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의 희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에 합당한 응답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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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순종, 응답>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응답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잉태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날이고, 실질적으로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날입니다. 따라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성탄절만큼이나 중요한 대축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응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또 얼마나 위대한]일이었는지를 강조하면서, 그 응답과 순종을 본받자는 말을 자주 하는데,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하고 위대한가?”라고 의문을 품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마리아가 처한 상황보다 더 심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마리아보다 더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 응답 덕분에 이루어진 일의 위대함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응답한 그날은 인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날이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날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관심도 없겠지만, 구세주께서 세상에 들어오심으로써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고, 구원받을 길을(또는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던 인류가 그 길과 진리로 나아가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자신의 응답과 순종의 위대함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충분히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48ㄴ-49) (아무 생각 없이, 즉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응답하고 순종한 것이라면, 응답과 순종의 의미와 가치가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응답하는지, 그리고 응답의 결과로 어떤 일이 생길지를 잘 알고 있어야 응답의 결과로 이루어진 일의 위대함만큼 응답 자체도 위대한 일이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 때문에, 혹시 “하느님의 뜻이니까(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은, 실제로 자유의지 없이 명령에 복종만 해야 하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종이 주인의 뜻에 따르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유의지 없이, 즉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라면, 그 복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자유의지는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순종을 선택했고,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데, 신앙생활은,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은, 아무에게도 강요되지 않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 예고’ 소식을 전한 일은,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명령을 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전한 일입니다. ‘부르심’은 ‘초대’입니다.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닌데, 응답했을 때 얻게 될 ‘큰 은총’을 얻지 못하는 일이 됩니다.)
또 사람들 가운데에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말 때문에 “혹시 마리아는 즈카르야처럼 천사가 전하는 말을 안 믿고 의심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믿었더라도 응답하기를 망설인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했던 말,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 1,18)”라는 말과 마리아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은, 뜻이 완전히 다릅니다. 즈카르야의 말은, “제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과 엘리사벳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아기를 낳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말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인 자신이 아기를 낳으려면 약혼자인 요셉과의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라는 천사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네가 따로 할 일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동정녀를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실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하고 응답했더라도, 묵상과 기도도 하지 않고, 고민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응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아마도 천사의 말과 마리아의 응답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충분히 기도하고 묵상한 다음에 응답했을 것이고, 천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천사가 한 말들은 전부 다 마리아로서는 상상한 적도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마리아 자신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고, 청한 적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놀라고 당황하고 망설이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은 위대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특별한 부르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제직에 대한 부르심이나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뿐만 아니라, 본당에서 어떤 직책이나 임무를 맡는 것도 모두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그런 ‘부르심’을 받았을 때, 신앙인으로서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고, 동시에 내가 큰 은총과 큰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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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품고 낳으신 어머니>
주님 탄생 예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필리 2,7) 자신 전부를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려줍니다.
마리아의 ‘예’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는,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을 알려주시면서, 그녀의 협조를 요청하십니다.
마리아는 납득할 수 없는 놀라운 통보를 받고 몹시 당황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하며, 깊은 믿음과 강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순응으로 구원과 행복의 문이 열리게 된 셈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의 신비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친히 비우시고 낮추시어 유한한 인간 조건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기적으로 보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 가까이 오신 것이지요.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뜻과 몸짓이 바로 우리의 생활양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들로 채우는 것을 멈추고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비워내야겠지요. 그래야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이 머무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낮추심이 강생의 신비를 사는 우리 삶의 기본 태도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 탄생의 신비를 사는 법을 복되신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두렵고 떨렸으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한 순간도 하느님과 무관하거나 의미 없는 경우는 없지요.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리아처럼 탄생의 신비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과 생명의 오심을 믿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억울함과 불의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영적 메마름이 덮칠 때 포기하지 말아야겠지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의 의미를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복되신 마리아는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응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매순간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고 순응하며 응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베들레헴에서의 시련, 이집트로 피난, 나자렛 성가정의 가난한 생활, 골고타에서 아드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묵묵히 겪어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이런 순간마다 그것을 사랑으로 견디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을 낳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낳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다른 이들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마음과 몸에 주님을 모시고 다님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되고, 거룩한 행위로써 주님을 낳게 될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신자 편지 53절)
한마디로 가슴 절절한 사랑을 품고 세상 안에서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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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동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람을 찾는 하느님>
교황 요한 23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평범한 시골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신부가 교황이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분의 겸손한 품성이 잘 표현된 감동적인 영화였다.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도와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당신 스스로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동의를 구하고, 인간을 통해 당신의 일을 수행하려 하신다. 인간을 하느님의 일을 함께하는 협력자로 삼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무릇 신앙생활이란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깨달아 아는 것이며, 그 깨달은 바를 온 몸과 마음으로 응답하는 삶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이 그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동정 마리아는 천사가 알려준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분의 도구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이다.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에(37절)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그분의 뜻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필요가 있다. 교황 요한 23세는 그런 신앙 행위로 복자품에 오르셨고, 시골 처녀 마리아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요 세상의 어머니가 되셨다.
하느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면 그분의 뜻이 우리의 삶으로 육화된다. 이로써 우리의 삶은 거룩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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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수락은 고통>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축일은 하느님 편에서 보면 통보 축일이고, 마리아 편에서 보면 수락 축일인데 무엇을 하느님은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무엇을 수락한 것입니까?
하나마나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수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것이고 당신 아들을 보내니 수태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보내며 내 자녀로 키워 달라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닥칠 때 누가 나보고 그것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그게 과연 하느님 뜻인지 긴가민가하여 고민케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듯 늘 수락의 어려움과 식별의 어려움이 있고 마리아의 잉태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진주의 생성과정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지요. 진주는 조개가 생성하는 것인데 진주는 이물질이 조개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생성이 시작됩니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온다는 것은 눈에 티가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고 이물질이 날카로운 것이면 조개에 상처를 입혀 조개를 썩게도 합니다.
그럼에도 진주를 생성하려면 이물질이 들어오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물질이 상처 주지 못하도록 이 이물질을 감쌀 물질을 분비해야 하는데 이 락카라는 물질을 분비할 때 동반하는 통증도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경우 수락은 수난입니다.
그리고 수락이란 이런 것이기에 쉽지가 않은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 그나마 쉬운데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러실 리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진위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지만이 고통을 주심도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란 고통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고, 주님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받았기에 수락도 식별도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기 쉬운데 믿음의 은총을 받은 것이지 고통이 없는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님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만 하고 이런 수락을 우리는 본받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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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무선 이어폰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활동이 자유롭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렴한 무선 이어폰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가격은 만족스러웠지만 기능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충전이 잘 안 되기도 했고, 음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오른쪽은 되는데 왼쪽이 안 되기도 했고, 이유 없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이웃 본당 신부님과 무선 이어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부님의 지론은 이왕 구입하려면 비용이 들더라도 좋은 걸 구입한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금 비싸지만 ‘정품’을 마련했습니다. 역시 정품은 달랐습니다. 디자인이 깔끔했습니다. 외부의 소리도 들리면서 음량이 좋았습니다. 한 번 충전하면 10시간 이상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사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십니다. 자리에 앉으면 상석을 권하곤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곤 합니다. 식사에 초대하시면 가능하면 좋은 음식을 권합니다. 강론을 조금만 잘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선물해 주십니다. 사제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사제의 제의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복장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독신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순명에서 그리스도의 열정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넘어질지라도 포기하기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의 잔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였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정품 사제인가?’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는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게을렀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저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사제는 세상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어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벼락을 맞아야 하는 피뢰침처럼, 거친 바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등대처럼 사제는 고독과 침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사제가 ‘정품’사제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합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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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남>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만남>
하느님께서
내게 오신다네
그저 함께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향하시는
나만을 바라본다면
뒷걸음칠 수밖에 없다네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내게 하느님께서
한걸음 더 다가오신다네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바라본다면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다네
하느님께
내가 간다네
님 뜻대로 함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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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 무렵, 아무 이유 없이 다리에 통증이 있어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앞으로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의 어머니께서는 눈물을 잔뜩 쏟으시고는 쉴 새 없는 기도에 들어가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구역 반 내의 많은 어른 분들이 오셔서는 누워있는 저를 두고 많은 묵주기도를 해주셨던 장면입니다. 그리고 천만 다행히도 저는 다리에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회복되어 잘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때 꿈속에서 하느님처럼 느껴지는 빛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순간 내 아들의 다리만 성하게 해주신다면 아들을 사제로 바치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불행인지 다행인지 너는 꼭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강요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장래희망 란에 ‘신부님’이라고 적으면 참으로 기뻐하셨고, 사제의 삶이 얼마나 의미있는 삶인지 재차 강조 하셨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어머니의 강요가 성소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기가 되었고 어머니의 기도대로 이렇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왜 그때 그런 기도를 해서 내 미래를 일방적으로 봉헌했냐고 농담처럼 투덜거리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이며, 고생을 담보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원하셨음에도 신학교에 입학을 할 때 혹은 사제서품을 받을 때 흘리시던 눈물, 그리고 사제가 된 지금도 노심초사 밥은 잘 챙겨먹고 있는지 여자는 조심하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 건강은 어떤지 걱정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사제의 어머니란 참 피곤한 삶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소중한 아들이 몸만 성하게 해주신다면 그 소중한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어머니의 간절함. 이러한 저의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순명’의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순명과 복종을 혼동하곤 하지만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참으로 큽니다. 복종이 ‘내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것’이라면 순명이란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야기 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나타난 믿을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천사의 모습 앞에서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의아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이어서 천사는 처녀인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합니다. 이 순간 역시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게 될 갖가지 인간적인 어려움들이 마리아의 머리를 온통 에워쌌을 것입니다.
어린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 요셉이 과연 이 사실을 믿어 줄 지에 대한 두려움, 내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사랑하는 요셉과 낳은 아이가 아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부담감, 이 아들을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함, 더 이상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 저라면 ‘아아, 저는 좀 부담스럽습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순명의 대답을 통하여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류의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이 순명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이 세상에 오시게 되고,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이 과정 안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마리아입니다. 아들이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며 괴롭게 신음하며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과정을 내내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고 끝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 갖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주님께 순명하기란 너무 어렵고 특별히 나의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마리아의 모범을 기억하며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께 순명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인간을 지켜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라는 확신. 수많은 고통이 따르겠지만 결국 그 끝에는 그분의 사랑이 찬란히 빛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이기에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을 뛰어넘는 응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오로지 그분께 믿음을 둘 때, 하시고자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는 하느님의 전능이 몸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다함께 입을 모아 다음의 구절을 소리내어 읽고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주님의 뜻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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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아베’ 피정을….
어느 신부님이 쓰신 글 속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한 거룩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제는 자신의 사제관 문을 두드릴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베” “아베”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을 때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귀찮게 할 때마다, 그 사제는 “아베”하고 외치며 천사의 부르심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사제의 마음으로 고해 방에 들어오시는 신자분을 향해 “아베” 합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고운님들도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마다, “아베!”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아베, 마리라!” “안녕하세요, 마리아!”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마리아는 큰 소리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FIAT(피아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마리아였을까요? 우리는 흔히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느낍니다. 하느님은 인물을 찾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은혜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의 그릇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한 번도 ‘내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선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사랑하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은총을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퍼부어도 받지 않고 입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받았습니다. 입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 안에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신비의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 신비의 그릇은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고운님들의 마음 안에도 이런 신비의 그릇이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사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걱정과 근심을 벗어 던져 버립니다. 결국, 하느님은 마리아를 인도하십니다. 고운님들도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시고 삶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순명은 자기희생이 따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모든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고 받아드렸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운님들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를 못합니다. 귀가 막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느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힘을 내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나무는 폭풍이 불면 가지가 찢어지거나 뿌리가 뽑힙니다. 그러나 들판에 풀들은 폭풍이 불어오면 “먼저 눕거나 엎드립니다.” 그리고 “일어납니다.” 들판에 풀들의 강한 생명력입니다. 풀들은 무모하게 폭풍에 맞서지 않습니다. 가끔 고운님들의 삶의 시련이나 탐욕이 올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자신을 눕히거나 낮추십시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면 풀들이 몸을 숙이듯이 ‘아베 피정’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하느님 품에 누워보시기를 응원합니다.
이번에 또 코로나 19로 여파로 교구장님들이 심사숙고한 끝에 미사 중단이 재 연장되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를 지고 사순 시기 중반을 지내면서 하느님 말씀의 절박한 외침을 들어봅니다.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귀 기울이라고 “피정”이라는 매일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은총의 은혜로운 시간을 만들어 가보심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두레박 사제도 매일 피정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살면서 시련이나 욕심이 생겨서 힘들어질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거나 낮추시고, 아니면 눕혀지고,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매일 은총 가득한 복된 피정의 날’을 만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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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47)
♧♧ 시편 78편 24절…
"그들 위에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시고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셨다."
*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계속하여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내린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탈출기 16장 35절. 참조) 그러한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게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바위를 쪼개어 물이 강처럼 흐르게 하셨듯이(16절. 참조), 일용할 양식을 풍족하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탈출기 16장 4절. 참조).
* 하늘의 곡식을 그들에게 주셨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씨도 뿌리지 않고 뿔도 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으니, 그 양식은 이 땅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아삽은 그 ‘만나’를 ‘하늘의 곡식’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이 ‘만나’는 ‘땅의 곡식’과는 달리 인간의 욕심에 따라 저장할 수 없었으며, 날마다 새롭게 내린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도 ‘하늘의 곡식’이라는 표현을 쓴 듯합니다. 한편, 이 하늘로부터 내린 곡식인 ‘만나’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이 세상에 육화 강생하시어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요한복음 10장 10절. 참조)
♧♧ 시편 78편 25절…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다. 그들에게 음식을 배부르도록 보내셨다."
*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다.
‘천사들...’이란 하느님은 가리키는 말로, 이 구절은 과거에 이스라엘 선조들이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곡식인 만나를 먹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하늘의 곡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사실은 저들을 그만큼 존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음을 나타내 줍니다.
* 그들에게 음식을 배부르도록 보내셨다.
여기서 ‘음식’은 ‘빵’과 동일한 말로 만나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그 음식을 ‘배부르도록 보내셨다.’라는 것은 광야의 황량함과 대조되어 하느님의 풍족한 은총과 놀라운 권능을 더욱 부각시켜줍니다.
♧♧ 시편 78편 26절…
"하늘에서 샛바람을 일으키시고 당신 힘으로 마파람을 몰아오시어..."
이 구절은...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신 기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민수기 11장 31-32절. 참조) 메추라기는 봄 철새로 3월 중순경에 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 아카바 만을 타고 북쪽 시리아 지방으로 이동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메추라기를 샛바람(동풍)을 일으키시고 마파람(남풍)을 몰아오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진영에 무리지어 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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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매일 피정 묵상 **
요즘 많은 분이 코로나 19로 많이 어렵고 힘들면서 좌절하고 분노하는 스트레스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의 삶 가운데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고운님들 여러분의 삶의 자리도 그렇지만, 신앙생활도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미사에 참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피정이나 성경 공부, 그리고 기도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미사 중단이 재연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 존경해왔던 안셀름 그륀 수사 신부님의 책을 읽으면서 매일 피정의 삶을 살고자 노력했고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2017년에 그해 주교품으로 전주교구장 소임을 맡고 계신 김선태 주교님이 번역하신 “피정하고 싶다.”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아주 쉽게, 피정하고 싶은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피정하고 싶다.”라는 책을 읽고 묵상하면서, 매일 피정을 원하시는 고운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그 방법을 소개하오니 참조 바랍니다. 단, 매일 피정은 하루에 편안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경을 읽기 전에 하느님 앞에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자신을 느낍니다. 그리고 고운님들이 지금 사랑하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으며, 하느님께서 온전히 고운님 자신에게만 말씀하시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십시오. 이때 기도는 서 있는 상태에서 두 손을 펴고 하느님께 온전히 높이 펴들고, 그분께서 채워주시기를 성령께 간청하는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10분)
둘째, 성경 말씀을 손에 들고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 고운님 자신에게 직접 주신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묵상한다면, 먼저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실제적으로 상상해 봅니다.(아래 기적이나 치유에 관한 성경 말씀 묵상이나 그날 영적 일기나 시편 공부를 참조) 내가 그 장면 속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분께서 측은한 마음으로 자애로이 어루만져 주시는 환자가 바로 고운님 자신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고운님 자신을 바라보고, 고운님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 고운님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예수님께 말씀드려 보십시오. 그리고 침묵 중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말씀이 안 들릴 수도 있습니다. 침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운님들은 계속해서 침묵 속에 예수님께 드릴 말씀을 마음속에 품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더는 중요하지 않고, 고운님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 만이 중요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30분)
(참고로, 안셀름 그륀 신부님께서는 예수님과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제가 예수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깨어 있게 됩니다. 그러면 고운님들의 마음은 흡족해집니다.)
예) **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요한 2, 1-11) **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 행하신 첫 기적이 바로 카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을 통하여 인간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유하여 생명을 살리심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친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카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통하여 2가지 깨달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고운님들은 항상 문제 속에 사는 인생들입니다. 그 원인은 모두 모자라고 부족한 데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성모님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실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고통이나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이 희망을 품고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운님들 여러분이 많은 문제가 있는 이 세상에서 성모님처럼 견고하게 믿고, 일꾼들처럼 순명하며 살면서, 고운님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몸과 마음이 치유와 회복이 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묵주 기도(사순시기 때에는 성모칠고 묵주 기도) 20분.
마지막으로, 부족한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묵상하다 보면 꼭 느껴지는 것이 고운님들 자신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고운님들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 자신의 부족함에도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깊은 평안을 느껴봅니다(10분)
참조)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 기적과 비유 말씀을 영적 일기 다음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리고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매일 피정 묵상”을 크게 복사하시어 매일 피정에 사용해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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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지에 봄, 가을이 되면 많은 순례객이 방문하십니다.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이곳 성지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분들이 떠나고 나서 종종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시기 때문입니다(요즘에는 성지 방문하시는 분이 없어서 깨끗합니다). 바로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순례객이 많이 오실 때면 관리를 하는 직원들이 무척 바빠집니다. 만약 이 쓰레기를 그냥 놔두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성지가 아니라 지저분한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분명 버린 사람의 잘못입니다. 또 그분들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쓰레기를 치울 필요 없다며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내게 주는 아픔과 상처를 그냥 끌어안고만 있다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모두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쓰레기는 좋은 냄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내게 건강을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빨리 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몸 전체가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쓰레기 같은 것은 얼른 버리고,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일보다 주님의 일이 먼저였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만약 세상의 일이 먼저였다면 천사로부터 들은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인하기 전에 임신한 경우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혼을 한 요셉 성인을 설득하는 문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세상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걱정에 휩싸이게 하는 쓰레기 같은 세상일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커다란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잉태하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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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불평불만을 늘 안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매사에 우울했고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마을의 현자가 물 한 잔을 가져오라고 했고 여기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근처의 맑은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아까처럼 소금 한 줌을 호수에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호수의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게 한 뒤 묻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시원합니다.”
“소금 맛이 나느냐?”
“전혀 나지 않습니다.”
현자는 말합니다.
“불행의 양은 누구나 똑같다. 다만 이 불행을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아니라 호수가 되어라.”
내 마음은 유리잔일까요? 아니면 호수일까요? 불평불만이 많다면 유리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기쁘고 행복하다면 호수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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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우리 모두가 ‘임마누엘’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領報 대축일’이라 불렀는데 ‘영보領報’는 성모님께서 천사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사순시기 먼저 번의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과 쌍벽을 이루는, 참 반갑고 고마운, 참 아름답고 은혜로운 축일입니다.
흡사 ‘사막’의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오아시스’ 축일같은 느낌도 듭니다. 오늘 대축일 은총으로, 성모님의 전구로 ‘코로나 사태’가 결정적으로 진정되는 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읽은 반가운 뉴스를, 즉 두 세계 지도자를 겸손하게 만든 코로나 사태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문대통령에게 “한국이 코로나19 대응을 굉장히 잘하고 있다”며 “의료장비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고, 문대통령은 “국내 여유분이 있으면 최대한 지워하겠다” 화답했다는 기사입니다. 또 하나는 아베 일본 총리가 세계 각국의 올림픽 강행시 보이콧 경고에 결국 도쿄 올림픽을 1년 연기하기로 고개 숙여 백기를 들었다는 보도입니다.’-
또 하나 “제발 말 들으세요” 란 재미있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지금처럼 역병이 창궐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요?! 집에! 순종은 우리를 보호합니다. 집에 있으세요! 잠언에도 ‘그러나 내 말을 듣는 이는 편안히 살고, 불행해질 걱정없이 평온히 지내리라’(잠언1,33)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니 제발 말 들으세요.”
성모님도 나자렛 고을의 집에서 정주의 삶에 충실하던중 주님 천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도 오늘 말씀을 요약하며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말마디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숭고한 존재이유를 깨닫게 하는 성구입니다. 무의미한, 무목적의 인생이 아니라 우리 각자 주님 뜻을 이루려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하느님의 성모 마리아 방문 축일’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당신 천사를 통해 나자렛 벽촌의 마리아를 방문하신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이 놀랍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고 다급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마침 어제 모임을 대표해 선물을 들고 수도원을 방문한 후 집무실을 청소하고 간 예수 성심회 회장 자매와 주고 받은 덕담의 메시지도 나눕니다.
-“감사합니다! 흡사 ‘성녀 수산나 자매님 방문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집무실 분위기도 상쾌하기가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아있는 느낌입니다.”-
-“아멘, 신부님, 집에 잘 도착했습니다. 수도원이 천상의 낙원같아 우울했던 맘이 치유되었습니다.”-
반가운 이들의 방문은 흡사 방문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꼬박 1년 기다렸다 피어나는 다양한 종류의 무수한 파스카의 청초한 봄꽃들의 1년만의 방문은 얼마나 놀랍고 반가운지요! 언젠가 어느 자매가 들려준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일곱 살 꼬마 아들이 ‘하느님이 오신다’ 말하기에 문밖을 나가 봤더니 한 자매가 모임차 오고 있었고 아이는 그렇게 표현했고 참 많이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방문 하신 축일인 오늘입니다. 꼭 기억하고 싶은 세 말마디 성구를 집중적으로 나눕니다. 마리아를 만나자 마자 주님 천사의 인사말입니다. 이 인사말에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곧 마음을 추슬러 침착하게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과연 관상가의 모범이요 렉시오 디비나의 대가입니다.
1.“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최고의 인사말이요 찬사입니다. 그대로 마리아는 물론 참으로 믿는 우리 각자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얼마나 고귀하고 기품있는 존엄한 인간의 모습인지요! 과연 이 모습대로 부끄럼 없이 품위있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자체가 은총의 축복이요 기쁨이며 참 행복의 원천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함께 계신데 무엇이 부족하겠는지요. 이 성구는 제가 고백성사 보속 말씀 처방전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말씀을 써드렸을 때 수녀님의 환희 가득한 탄성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보속補贖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보석寶石 말씀입니다!” 더불어 노 수도선배와 나눈 기분좋은 깨달음의 유머도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보물寶物입니다.”에 대한 “아닙니다. 고물古物입니다.”라 답한 수도선배입니다. 겸손할 때 고물은 보물로 변함을 깨닫습니다.
두 번째 말마디 성구는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아주 예전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부분에 대한 주석도 잊지 못합니다. 이 대답이 나오기전 온 우주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인류 역사의 구원이 마리아의 응답에 달린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이었기에 참으로 하느님을 비롯하여 피조물 모두가 참으로 조마조마 긴장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마리아의 사랑의 순종의 고백입니다.
2.“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떠나갔고 하느님께서도 마리아의 순종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참 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 인류의 자부심’인 마리아란 어느 신학자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아마 하느님은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그대 마리아 나의 자랑이듯이, 나 하느님도 그대의 자랑이어라.” 하여 우리는 마리아 성모님의 덕을 본받고자 평생 매일 저녁성무일도 마지막에 마리아의 찬가를 부릅니다.
부전자전이기 보다는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거듭된 고백이 그대로 성모 마리아를 닮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은 성모님의 사랑의 순종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세 번째 주목되는 성구입니다.
3.“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영예로운 이름, 임마누엘인지요!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신 마리아도 임마누엘이고 참으로 믿는 이들이 모두 또 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은 평생 도반인 하느님과의 우정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사람만 있고 하느님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 세상 우상들이 자리 잡으니 사람은 더러운 영들에 오염되어 타락 변질되니 괴물도, 악마도, 야수도, 폐인도, 광인도, 좀비도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참으로 존엄한 인간 품위의 근거입니다. 그러니 평생공부, 평생과제가 영원한 도반이신 하느님 공부와 하느님 과제요, 참으로 함께 계신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 관계와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에 참 자유인의 참 사람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을 ‘예닮의 여정’에 이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 하느님이자 참 사람이라 칭하는 예수님은 100% 하느님을 닮은 ‘하닮의 여정’에 전무후무의 최우수생이요, 마리아 성모님 역시 분명히 90% 이상을 닮았을 것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참 나의 실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하는 하느님을 잊고, 모르고, 하여 자기를 잊고, 모르고, 평생 무지의 어둠속에서 살아가다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헛되고 억울한 인생이겠는지요!
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 원로 저명 시인의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가톨릭 신앙을 못 가졌더라면, 내 문학은 척추가 없는 동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절대자였습니다.” 하느님 빠진 삶은 영적으로 척추가 없는 동물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또 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과연 하닮의 여정중에 우리는 현재 몇% 주님을 닮은 임마누엘이겠는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참 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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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그야말로 노예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에는 그 고통을 미리알고 그것을 참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그런데 그 종에게 견디어 내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하신대로’라고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함께야) “종은 자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나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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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역사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함께 계시지 않는가"로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환난의 때에는 주님께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슬퍼하고, 회복의 때에는 다시 오신 주님을 기리며 고개를 쳐들었지요.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주님 현존을 묻는 인간에게 주시는 주님의 자상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임마누엘의 선포가 울러퍼집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이사 7,14; 8,10)
당시 유다 임금 아하즈와 그의 백성은 예루살렘을 치려는 아람과 이스라엘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와 함께 "임마누엘"의 희망을 전하십니다. 유다 임금과 백성에게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지금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위안이요 승리의 표징인 동시에, 앞으로 오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특정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9)
제2독서에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실현됨을 드러냅니다. 세상에 오신 성자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뜻은 그분의 구원 의지, 곧 사랑과 자비입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육화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몸"으로 율법에 따라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을 대신할 전존재적 희생 제사를 봉헌하시지요. 임마누엘 예수님의 현존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생생한 실재였습니다.
복음 안에서도 우리는 임마누엘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임마누엘"의 공동체적 의미를 익히 들어왔을 마리아는 자기 개인에게 부여된 "임마누엘"의 축복에 몹시 놀라며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임마누엘"의 의미가 공동체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실현되기 위해 먼저 한 개인에게 주님께서 현존의 가능성을 타진하시는, 숨막히는 긴장의 찰나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마리아는 성자의 거처가 되기 위해 성 삼위 하느님께 온전히 둘러싸여 하나를 이루는 신비의 순간을 맞이하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일치하신 성령의 신부, 성령의 정배시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당신 백성과 함께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열망은 이렇듯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정결한 처녀로서 두려움도 일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두려움과 의혹을 이깁니다. 그녀는 지혜롭고 용감한 믿음의 소유자였지요. 마리아의 이 응답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서 형체를 갖추어 현존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원죄 이후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실현하러 오셨고, 마리아는 그 뜻에 자신을 던집니다. 그렇게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실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온 세상이 그분의 현존을 담고 있지요. 우리가 알아채건 못 알아채건 하느님의 뜻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섭리라 부르고, 믿지 않는 이들은 우연이라 부르는 주님의 뜻이 도처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당신 혼자서 뚝딱 이루시지 않으십니다. 그 뜻이 세상에서 사랑이 되고 온기가 되고 희망이 되도록 우리를 참여시켜 주십니다. 협력이 필요하다며 보잘것없고 불결하며 빈틈 많은 우리에게 겸손되이 손을 내미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통해 세상에 현존하고 싶단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초대 앞에 섰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혼돈과 고통의 시대에 무척 긴급하고 절박한 이 요청이 거의 호소에 가깝게 들립니다. 지금 우리게 필요한 건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단순한 믿음과 결단입니다.
"Fiat Voluntas Tua!"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교황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청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청하며 하루종일 짬나는 대로 틈틈이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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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4-35)
<거룩한 신비인 동정녀 잉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여기서 마리아가 믿지 않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하느님의 외이들을 낳도록 선택된 분에게 믿음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즈카르야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더 큰 특전인 거룩한 어머니의 특전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마리아가 즈카르야처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령을 받아 높이 기림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 큰 특권에는 더 큰 믿음이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믿어야만 하는 동시에 분별없이 그 자리를 꿰차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는 천사의 말을 믿어야 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가 히는 일인 양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물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에페 3,9; 참조: 콜로 1,26)을 쉽게 알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것은 높은 곳에 있는 권능들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거절하지도 않았으며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것은 이루어질 일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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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고통에 대한 이해
대양에서 관상용 열대어를 잡아 전 세계에 공급하던 한 회사가 아무리 좋은 조건의 수조에 넣어 수송해도 수송 도중 절반이 넘게 죽어 버리고 남아 있는 것들도 비실비실 해서 상품가치가 없었다. 회사는 한 생태학자가 제시한 해결책으로 수조에다 사나운 문어 한 마리를 넣고 바람을 일으켜 살을 만들었다.
♣그렇게 하였더니 사나운 문어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대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생태학자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자기를 해칠지 모르는 무리 속에서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명체는 너무 편하면 살지 못합니다. 항상 적당한 긴장 속에 살아야 생명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고통 그 인간적인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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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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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첫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당황은 ‘은총을 입음’과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아직 실감하지 못함이요,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에 대한 곰곰이 생각함입니다. <둘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물음은 아기의 잉태와 그 아기의 사명이 자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따라야 할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 아래 놓인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깨닫고서 이에 순명함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이 깨달음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기쁨보다 하느님의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 기쁨이 큰 까닭은 사랑이 아무리 크고 크다 하여도 그 사랑을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인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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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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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우선적 특권>
"두려워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오늘은 예수님 탄생 전 아홉 째달 되는 날로
마리아가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날입니다.
천사가 훅~ 들어오거나 툭~ 건드리며
마음을 보챌 때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어그러집니다.
이때 혼란과 갈등은
이루말 할 수 없이 힘듭니다.
시간과 에너지, 정성을 다한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내것 무시하고 주님 뜻따르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지만, 나를 꺾을 때
하늘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 됩니다.
우선적 특권이죠.
"천사의 소리를 받아들이면 더 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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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말씀을
헤아려보는
사순의 봄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우리 몸에
담아야 할 것 또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잉태로
뼈와 살이
형성됩니다.
말씀만한
탄생은 없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통합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말씀이 점점
자라고 커지고
성장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품어줍니다.
말씀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얻게 됩니다.
말씀의 잉태이며
말씀의 탄생입니다.
말씀의 때에
말씀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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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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