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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부제(副題):일제(日帝) 식민지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식민지개발론(植民地開發論)·식민지산업혁명론(植民地産業革命論)·식민지시혜론(植民地施惠論)에 대한 비판
▶해설자:신용하(愼鏞廈)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학술원 석좌교수
Ⅰ. 머리말:문제의 한정
최근에 일본 정계와 학계 일부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식민지 지배는 한국을 ‘개발(開發)’시켜 ‘혜택(惠澤)’이 크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든 세대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다. 과거 일제(日帝)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온갖 선전매체와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인(朝鮮人)’들에게 홍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의 주장이 다른 점은 뉴라이트전국연합(Newright全國聯合) 계열의 한국 지식인들이 학자의 지위를 갖고 ‘학설(學說)’을 표방하면서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의 학문과 언론적 자유의 혜택을 명분으로 내세워 공공연히 구일제총독부(舊日帝總督府) 주장(主張)의 현대판을 홍보한다는 점에 있다.
8·15광복 후의 한국 학계는 조선총독부와 그에 복무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주장을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이라고 규정하고 설명하면서 비판했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 학계에서 일부 논자(論者)들이 총독부의 주장을 계승하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한국을 ‘개발(開發)’, ‘근대화(近代化)’시켜 ‘혜택(惠澤)’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논점은 다양하지만, 그 초점은 크게 두 가지에 집중된다.
하나는 일제의 1910년~1918년 기간에 진행된 조선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토지사유제도를 성립시키고 토지제도를 근대화시킨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 식민지 정책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한국에서 토지사유제도는 이미 15세기 조선왕조에서 법제적으로도 확립되어 사적 지주제도까지 형성·발전하게 되었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이러한 근대적 개혁사업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통치권력으로 한국 토지의 50.4%를 무상으로 약탈한 토지약탈 정책임을 밝힌 바 있다. 다시 1990년대에 일본에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홍보를 계승하려는 신식민주의(新植民主義)적인 주장이 나오자 박명규(朴明奎) 서울대학교 교수가 이에 대한 예리판 비판을 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조선의 ‘공업화(工業化)’를 추진하여 1930년~1945년 기간에 한국의 ‘광산개발’, ‘공업발전’, ‘산업혁명’, ‘산업화’가 눈부시게 달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 사실이 통계상 계량적으로도 증명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통계수치를 들며 주장하고 있다.
이 두번째 주장은 총량통계만을 볼 때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것같이 그럴듯한 주장으로 들리기 쉽다. 그러나 그 내부구조와 내용의 실상을 보면 그러한 주장은 전혀 진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글에서는 문제를 한정하여 위의 두번째 주장의 내용을 이루는 1930년~45년의 일제 식민지 공업정책과 그 결과에 대해 분석하기로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일제의 조선인 노동력 정책 가운데서 ‘징용(徵用)’문제와, 그리고 ‘여자 정신대(女子挺身隊)’문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한 방대한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미루어두기로 한다.
Ⅱ. 대륙침략 병참기지의 설치정책 결정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1931년 ‘만주침략’으로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른바 ‘15년 전쟁’의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대륙침략의 병참(군수보급)기지를 조선 땅에 설치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일제(日帝)가 감추려고 한 식민지 정책이 아니라 공공연히 떠든 정책이었다. 예컨대 이것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이 1940년 8월 각도 산업부장회의에서 조선 산업정책의 지침이 ‘대륙전진(大陸前進) 병참기지(兵站基地)’ 설치임을 명백히 한 다음의 훈시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제국(帝國)의 대륙전진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사명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있다. 현 사태에서 우리 조선은 대지나작전군(對支那作戰軍)에 대한 식량, 잡화 등의 군수물자를 공출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오히려 불안하며, 장래 어떠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만약 어느 기간 대륙 작전군에 대한 내지로부터의 해상 수송로가 차단될 경우가 있더라도 조선의 능력만으로 군수물자를 보충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 산업분야를 다각화하고 특히 군수공업(軍需工業)의 육성에 역점을 두고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 이것이 그 내용이다.”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유럽에서 잠수함이 발명되고 그후 개량된 상황에서 만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잠수함에 실전에 배치되어 활동할 것을 정확히 예견하였다. 일제는 만일 잠수함이 일본본토와 대륙 사이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는 경우, 만주·몽골·중국·시베리아 침략군의 작전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선에서 육상 수송로로 대륙침략 일본 작전군에 공급하는 병참기지를 조선에 설치하려고 조선의 특정 지역에 군수공업단지 설치를 추진한 것이었다. 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이후에는 미국군 등 연합군의 공중폭격에 해상운송이 매우 취약하게 되므로 조선에 설치한 ‘대륙침략 병참기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대륙의 최후의 전쟁 거점’이라고 표현하였다.
일제는 군수공업단지를 크게 세 지역에 설치하였다.
하나는 조선에서 광산자원이 가장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고 만주·대륙에 근접해 있으면서 일본과의 해상운송이 편리한 지역인 함경남도 영흥만 일대 흥남·함흥지구를 이미 1920년대 후반기에 ‘대륙전진 병참기지’ 제일 후보지역으로 선정하여 설치준비를 했다가, 1930년대부터 본격적 광산채굴과 공장설치를 추진한 것이었다.
다음은 평양·진남포·겸이포·신의주 일대를 ‘서선(西鮮) 공업지구’라고 호칭하면서 병참기지화하여 군수공업을 배치하였다.
다른 하나는 방적공업 등 경공업과 기계수리 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인(京仁) 공업지구’라고 호칭된 경공업 제품생산 공급지역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홍보 때에는 흥남·함흥지구만 병참기지인 것처럼 말하기도 했지만, 자기들의 내부책자에서는 세 지구가 모두 ‘대륙전진 병참기지’라고 설명했으며 아예 조선 공업부문 전체를 대륙전진 병참기지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조선에 대륙침략 병참기지를 설치하려고 계획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지만, 이를 ‘대륙전진 병참기지’라고 이름을 붙이며 본격적으로 군수공업단지를 설치한 것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킨 193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때부터 조선의 ‘공업화’를 떠들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의 핵심에 있던 것은 물론 이 대륙침략 병참기지 ‘군수공업’이었다.
Ⅲ. 일본 독점재벌을 동원한 군수공업 설치
일제는 대륙침략 병참기지를 만들기 위해 일본 독점재벌들에게 일본 군부의 대륙침략 전쟁준비를 돕기 위한 일제의 조선 군수공업 설치에 투자할 것을 종용하고,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보장·약속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신흥재벌 노구치[野口]와 기존 재벌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蒙], 동척(東拓) 등 독점재벌들이 일본의 군수공업 설치에 투자하였다. 1935년 현재 일제의 조선 병참기지화 정책에 호응하여 투자한 일본 독점재벌의 일람표를 보면〈표 1-1〉과 같다.
1942년의 공업 설비자본 투자액을 보면,〈표 1-2〉와 같이 일본 안에 본점을 둔 회사의 공업투자 비중이 74.1%이고, 조선 안에 본점이 있는 자본계통이 25.9%이다.
일본 안에 본점을 둔 회사 가운데는 노구치가 26.1%, 훨씬 떨어져서 다음이 일산(日産)의 8.9%이고, 다음이 동척(東拓)의 8.1%, 다음이 미쓰비시와 가네부치[鐘淵]의 각각 4.4%, 다음이 미쓰이와 일본제철(日本蹄鐵)의 각각 3.0%, 다음이 스미토모[住友]와 대일본방직과 동양방직의 각각 1.5%이다. 노구치 재벌의 큰 비중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안에 본점을 둔 회사로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7.5%, 일제의 특수회사가 4.4%, 기타 일본인 경영회사들이 12.4%였다.
1942년의 공업 설비자본 투자액을 민족별로 나누어보면, 일본인 자본이 98.4%이고, 한국인 자본은 겨우 1.6%로서 일본자본의 거의 완벽한 독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Ⅳ. 군수공업 설치를 위한 일제의 통제정책
일제는 대륙침략 군수공업단지를 조선 안에 설치하는 작업을 일본 독점자본 재벌들에게 맡기면서, 이를 ‘시장경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제의 직접적 ‘통제경제’를 통해서 실시하였다.
일제는 군수공업 설치를 목적으로 일본 독점재벌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본토 내에서 1931년 8월 ‘중요산업통제법’ 실시로 카르텔이 금지되어 폭리획득에 제한을 받게 된 독점제벌에게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식민지 초과이윤(超過利潤)’의 폭리를 보장해주고 이를 위한 각종 법률·명령·규칙을 실시할 것을 보장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헌법은 적용하지 않고 총독의 명령을 ‘제령(制令)’이라고 하여 총독의 전제적인 파쇼적 통치가 자행되고 있었으므로, 조선에서는 총독의 명령으로 일본 독점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었다.
일제 총독부는 군수공업단지 설치를 위한 한국인 토지를 극히 저렴한 가격으로 수용하도록 일본 독점자본에게 특혜를 주었다. 군수공업단지의 철도·도로·항만 등 사회간접자본 부설을 총독부가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군수공업·공장설치에 필요한 부족자금에 대해서는 ‘임시자금조정법’ 등 각종 법령과 규칙을 제정해가면서 지원하였다. 일제는 군수공업을 중점 육성하기 위하여 ‘중점산업 근융지원’을 실행하였다. 군수산업 이회의 비군수산업과 조선인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기업정비’를 행정 강제하다가 1942년 아예 ‘기업정비령(企業整備令)’을 제정 공포해서 비군수공장을 군수공업화하고 민수용 조선인 중소기업을 거의 도태시켰다.
일제는 노동력도 자유로운 노동시장에서 구입 공급한 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행정력과 강제력에 의한 ‘알선’과 ‘강제동원’의 방법에 의거하여 공급했다. 노동자의 임금도 시장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행정력으로 ‘극히’ 저렴하게 책정되었다. 예컨대 1941년 12월 조선토건협회(朝鮮土建協會)가 전국 17개 공사장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총 사용인원 589만 9천 834명 가운데 ‘총독부 알선’이 212만 3천 426명으로 46%에 달했고, 다음이 보국대(報國隊)가 89만 449명으로 15%, 기타가 288만 5만 959명으로 49%였다.
일제는 군수산업의 노동임금과 노동조건이 극히 열악하여 노동력 부족에 당면하자 총독부가 직접 군수산업에의 노동력 원활 동원에 나섰으며, 1939년 10월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을 제정 공포하여 강제 징발된 노동력을 군수공장, 군수광산, 군수시설 등 군수산업에 직접 투입하였다.
일제는 1939년 8월에 ‘임금통제령’을 제정 발표하여 최저임금제로 조선인 노동자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최고임금제를 용인하여 기아임금과 노동력 수탈을 합법화해서 일본 군수산업 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더욱 튼튼히 보장하였다. 일제의 조선 군수산업은 조선인 노동자 수탈로 설치 확대된 것이었다. 1930년대 조선공업의 ‘생산액에 대한 임금비율(임금비중)’을 보면, 1933년의 9.34%에서 1939년에는 4.3%로 급락하였다. 일제의 조선인 노동자 수탈에 의한 조선공업의 생산액 증가를 바로 알 수 있다.
일제는 뿐만 아니라 ‘식민지 초과이윤’을 더욱 폭증시키기 위해 조선인 ‘유년 노동자’를 더욱 많이 투입하여 착취하였다. 1943년 6월 전체 노동자 가운데 겨우 15세 미만의 유년 노동자가 10.3%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일본인 소유자가 맡은 30인 이상의 공장의 유년 노동자의 비중은 남자 유년 노동자 12.1%, 여자 유년 노동자 50.8%, 합계 24.1%에 달하였다. 1931년을 기준으로 할 때, 공장노동자 수는 1943년까지 3.88배 증가한 데 비해서 유년 노동자 수는 무려 7.46배 증가하였다. 일본 독점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의 폭리가 조선인 노동자, 유년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일본 독점재벌의 조선 군수공업을 위해 ‘원자재’가 비군수산업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였다. 일제는 1938년 9월 ‘수출입품 등 임시조치법’을 제정 공포하여 철강 등 32게 품목의 군수산업(중점산업) 이외의 사용제한을 규정했으며, 1939년 3월에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군수공업에만 원자재가 특혜 공급되도록 하였다.
일제는 1944년부터는 아예 ‘명령경제’ 체제로 완전히 들어가 ‘군수공장 책임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인들에게는 강제 ‘공출제도(供出制度)’를 실시해서 군수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강제로 빼앗아갔다. 일반 민간회사들에 대해서도 일제는 ‘군수회사법의 조선 및 대만 실시건(1944년 10월)’을 적용하여 철강·경금속·석탄·시멘트 등 27개 회사를 총독부가 접수해서 명령 관리하고, ‘군수회사 징용규칙(1944년 12월)’을 만들어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를 투입해서 무상으로 사역하였다.
일제의 통제정책은 시장에서의 가격과 교환을 통한 자원의 합리적 배분은 처음부터 추구하지 않았다. 일제는 처음부터 ‘통제가격 체제’를 실시해서 처음에는 ‘지정가격제’를 시행하다가, 그것이 어려워지자 단일단가제도의 ‘공정가격제’를 강행하였다. 이때 책정된 ‘공정가격’은 조선 농민과 생산자의 생산비는 보상하지 않고 일본 군수산업 독점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만 충분히 보장하도록 책정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통제가격제도 아래서 이중가격과 암거래가 성행하자, 일제는 ‘경제경찰’, ‘경제 판·검사 회의’라는 탄압주체를 만들어 조선인들을 압박하였다.
일제는 자원의 군수공업에의 집중으로 생활필수품 생산이 부족하게 되자, 조선인의 내핍을 강요하면서 생활필수품 ‘배급증’ 제도와 ‘배급통제제도’를 실시하였다. 일제가 조선인 총력연맹 등 어용친일단체를 통해 ‘배급증’을 발급하면, 배급증을 가진 조선인만이 배급조합이나 특약점(지정점)에 가서 생활필수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일본인들은 각종 배급증을 충분히 받아 여유 있게 생활했으나 조선인들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배급증을 거의 받지 못했으므로 더욱 생필품 부족과 기아선상에서 헤매게 되었다.
1931년~1945년 기간 일제가 조선에서 실시한 주요 통제법령과 규칙의 일부를 간추려보면〈표 1-3〉과 같다.
일제의 1930년대 이후의 이른바 ‘공업화(工業化)’는 시장경제를 통한 국민경제 순환발전 속의 공업회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대외침략군의 대륙침략 병참기지를 조선 광산지대 부근에 설치하려는 일제의 ‘통제경제’, ‘명령경제’를 통한 군수공업단지 설치정책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대륙침략 병참기지의 군수공업은 일반 시장경제의 ‘공업화’와는 전혀 판이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갖고 당시 조선 사회의 ‘공업화’·‘산업혁명(産業革命)’·‘경제개발(經濟開發)’·‘근대화(近代化)’ 운운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실제성과는 전혀 다른 황당무계한 것이다. 당시 일제 군부나 어용학자까지도 이 대륙침략 병참기지 설치를 놓고 누구도 ‘공업화’·‘경제개발’·‘산업혁명’·‘근대화’라고는 감히 말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 경제의 ‘시장경제’·‘공업화’·‘경제개발’·‘산업혁명’·‘근대화’는 완전히 포기하고, 일본 군대의 대륙침략 때의 군수물자 생산공급을 위해서 ‘통제’와 ‘명령’으로 일본 군대의 보급 총동원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Ⅴ. 전력생산과 철도부설
⑴ 전력생산
일제가 흥남·함흥지역에 대륙침략 군수공업단지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광물자원 채굴과 군수공장 설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력인 전력(電力) 확보가 선결문제였다.
일제는 이에 장진강과 부전강에 댐을 막아 수력발전을 추진하였다. 일본군부의 앞잡이 역할을 한 신흥재벌 노구치[野口]가 1926년 1월 부전강 유역의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조선수력전기회사(朝鮮水力電氣會社)’를 설립했고, 1930년에는 부전강 발전소(20만 kW 능력)가 완공되었다. 이어서 1930년대에 장진강 발전소(32만 6천 500kW 능력), 허천강 발전소(33만 8천 800kW 능력), 부령강 발전소(2만 8천kW 능력)가 완공되어 송전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부전강 수력, 장진강 수력, 허천강 수력, 부령강 수력 이외에도 함남 수력, 압록강 수력(수풍), 동양합동(청천강), 금강산 수력, 한강 수력(청평 등), 운암 수력, 보성 수력, 울릉도 수력, 제주도 수력 등이 이어서 설립되었다.
그 결과 발전능력은 1931년엔 66만 8천 206kW로, 1942년엔 124만 38kW로 증가했다. 일제강점 말기인 1944년의 발전능력은〈표 1-4〉와 같다.
이러한 발전력은 조선인의 민수용이나 시장경제를 통한 민간공업용으로 공급 증가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일본군의 군수공업용으로 공급되었다. 이 사실은 몇 가지 사실에서 거듭 확인된다. 우선 1942년의 경우 이 발전력의 58%가 일제 군수공업단지로 설치된 흥남지구의 화학공업에 사용되었고, 10%가 광업에, 8%가 금속공업에 사용되었다. 그밖의 공업부문 사용량은 극히 미미하였다. 1942년의 경우 일본군부의 앞잡이 재벌인 노구치의 한 계열 군수공업이 사용한 전력이 전체의 58.5%에 달하였다.
또한 이것은 당시의 발전시설이 일제의 군수공업이 배치된 북한 지역에만 치우쳐 설치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표 1-5〉에서 보듯이 일제가 설치한 발전시설의 96.4%가 북한(38도선 이북)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오직 3.6%만이 남한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제는 침략전쟁의 확대에 따라 그래도 전력이 부족하게 되자, 1943년 ‘조선전력관리령(朝鮮電力管理令)’을 제정 공포하여, 일제의 총독부가 총독부 재정자금에서 보조금을 전력생산에 지급함과 동시에 조선인 민수공장에의 전력공급을 제한하고 군수공업에 우선적으로 전력공급을 하도록 규제하였다.
전력생산의 증가는 조선 사회경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일제의 대륙침략 병참기지 군수산업을 위해 군수산업에 종속된 것이었다. 발전량의 증가는 조선인과 민간산업 경제의 발전증가에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일본군 군수산업과 침략팽창에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⑵ 철도부설
일제는 구한말 때부터 1945년 8·15광복 때까지 철도부설권을 독점 장악하여 한국침략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원래 제국주의 시대에 철도는 큰 수익을 내면서 철도 소유국에게 식민지 침략획득의 기반을 닦아주기 때문에 열강은 후진지역에서 이권(利權)으로서의 철도부설권 침탈에 열중하였다.
일제는 한국침략의 이권도구로 1899년 경부선 부설을 시작했고, 러일전쟁[露日戰爭] 군사용으로 1904년 경의선 부설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자, 한국지배와 원료·식량의 일본수송을 위해 호남선·경원선·함경선을 부설하였다. 일제는 조선에 대륙침략 병참기지를 설치하게 되자, 대륙침략 군수용 철도부설을 공공연히 추진하였다. 일제 조선총독부 철도국장[山田新十郞]은 조선철도의 특징이 대륙침략 병참기지의 군사용·군수용임을 1939년 소급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조선철도의 특이성을 말하자면, 하나는 조선내에서의 여러 수송이라는 것도 있지만, 특히 최근 만주(滿州)·지나(支那) 방면과 내지(內地)와의 교통이 빈번을 더하고, 또 군사상의 이른바 병참기지로서 조선철도의 지위가 비상하게 중대성을 더해왔다…즉, 조선철도는 내지와 만주 혹은 북지 방면과의 수송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내지·만주·북지 방면과의 교통이 원활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실로 이 조선철도의 설비 내지 수송의 원활여하에 관계되는 것이고, 이른바 내지와 대륙 간의 수송의 열쇠는 정말 우리 조선철도국원(朝鮮鐵道局員)의 양 어깨에 달려 있다.”
일제는 간선철도인 경부선과 경의선은 ① 일본→대한해협→부산→서울→신의주→안동→봉천을 연결해서 일본→황해→대련→만주를 연결시키고, ② 일본→황해→대련→만주 철도본선에 연결시키는 루트 이외에, ③ 일본 관동군 사령부의 요청에 응해 제3의 루트로서 ‘북선(北鮮)루트‘를 만들어 대륙침략의 수송로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에 함경북도 회령(會寧)과 만주 길림(吉林)을 연결하는 길회선(吉會線)을 부설하고 함경북도 남양과 만주 도문(圖門)을 연결하는 ‘도문강교’를 설치하여, 일본→동해→나진·청진·웅기(북선 3항)→함경선·도문선→길회선을 연결하는 ‘북선철도’를 완성하였다.
일제는 관동군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1933년 10월 ‘북선철도’를 남만철도주식회사(南滿鐵道株式會社)에 위탁경영케 하였다. 그리하여 함경선 중에서 수성~회령, 도문선(회령~웅기), 청진선 회령 탄광선 등 329km의 철도를 만철의 위탁경영에 넘겼다. 1945년 일제패망 때까지 북선철도는 관동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으며 만철(滿鐵)이 경영하였다. 이와 함께 나진·청진·웅기의 ‘북선 3항’도 1936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만철이 무료로 관리하였다.
일제는 경부선·경의선이 함포 사격권 안에 든다고 대안으로서 대륙침략 제2수송 기간선 설치를 군부가 요구하자, 1942년에 함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는 청량리~양평~원주~제천~단양~영주~안동~의성~영천의 ‘중앙선’을 1942년에 부설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이 대륙침략 군사·군수용 철도를 한반도에 X자 남북 종단선으로 부설하고, 조선 국내의 동·서간의 단선은 사설(私設) 철도를 권장하여 부설하도록 정책화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철도부설 정책에 따라〈표 1-7〉과 같이 1930·40년대에 조선 내 철도의 길이는 현저히 증가하였다. 또한 그에 병행하여 항만과 도로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철도연장의 증가는 한국인의 시장경제·산업발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대륙침략용 군병력·무기·군수물자의 수송과 광물자원·공업원료·농산물의 약탈수송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본의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자(植民地近代化論者)’들은 이 시기 조선의 전력 발전량과 철로연장의 총량증가를 통계로 들면서, 마치 이것이 조선인의 산업경제와 복리의 발전과 연결된 것처럼 시사하고 ‘개발(開發)’·‘근대화(近代化)’·‘혜택(惠澤)’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다. 발전량과 철로연장선의 증가는 일제 대륙침략의 범위확대와 약탈의 증가를 나타내는 것이며, 한국인들에 대한 수탈과 고통의 증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Ⅵ. 광산자원의 대량 약탈
⑴ 금의 증산과 약탈
일제는 만주침략 개시 후 세계 각국으로부터 군수품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국제화폐의 기능을 하는 국제적 지불수단인 금을 조선에서 획득하기 위해 금의 증산과 대대적 약탈을 강화하였다.
일제의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조선총독은 1931년 부임 직후 ‘산금증산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그 실행의 채찍으로서 1932년 8월 ‘금채광 장려금 교부규칙’을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금과 기타 정해진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갱도(坑道)를 굴착하는 자에 대해서 수평갱도를 1m 높이는 데에 15원(16원 50전 이내), 수직으로 1m 들어가는 데에 30원(33원 이내)을 보조금으로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1933년 6월 저질의 금광석 채취를 위해 ‘저품위 함금광물 매광 장려금 교부규칙’을 발표하여 저질의 광석의 채굴에 대해서도 고율의 보조금을 지불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조선총독부는 새 착암기 시설, 선광시설에도 시설비의 70%를 보조하고, 일정량의 금을 산출하는 자에 대해서 할증금을 지급했으며, 산금업자에 대해서 2억원의 자금을 대부했는데, 그 대상을 연산금액 1만원 미달의 광산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그 결과 일제의 장려금은 23개의 대규모 광산에 한정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19개가 일본인 광산이었고 조선인 광산은 겨우 4개에 불과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일본인 금광회사 중심의 보조금 정책으로 1932년 이후 조선의 금 생산액은〈표 1-8〉과 같이 증가하였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도발함과 동시에 조선 금의 약탈을 강화하기 위해 1937년 9월 ‘조선산금령’을 공포했다. 그 내용은 총독이 명령으로 조선 금광생산을 강제하고 소비를 통제한다는 ‘금의 명령·통제경제’ 실시였다. 즉, 조선총독은 금의 증산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금 제련업자에 대해 제련설비의 확장·개량·공용 기타 필요한 사항을 명령할 수 있게 하였다(제8조). 또한 이 명령은 조선은행·특정 금 제련업자에의 새 산금의 강제매입에 의거한 금 집중, 산금사업의 관리와 조성, 미개발 금광의 강제개발, 산금 장려금 교부, 민간의 금 소비의 통제를 조선총독이 명령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이 ‘조선산금령’은 또한 일제 조선총독부의 위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금광업자에 대해 그 광업권을 조선총독이 지정한 자에게 양도하도록 조선총독이 명령할 수 있게 하여 광업권을 조선총독이 빼앗는 약탈적 통제권까지도 설정하였다.
일제는 또한 1938년 5월에는 국책회사로서 ‘일본산금진흥주식회사(日本産金振興株式會社)’를 설립하고 조선지점을 서울에 두었다가, 1939년 7월에는 그 자회사로서 국책회사인 ‘조선산금개발주식회사(朝鮮産金開發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조선의 금 증산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이들은 모두 일본 정부가 출자한 국책회사로서 납입주식의 5배까지 산금장려채를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조선총독부는 거액의 예산을 편성하여 장려금과 보조금을 조성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산금정책으로 1937년 이후에 조선 산금의 수량과 액수는〈표 1-9〉와 같이 상당 기간 증가하였다.
국제화폐의 기능을 하는 국제 지불수단인 금을 조선에서 채굴하여 약탈한 일제의 산금정책은 자유시장경제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고, 조선인과 일본인 금광업자의 자유경쟁에 의거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가 처음의 동기부터 조선에서 금을 채굴해 약탈할 계획을 세우고, 조선총독부의 보조금을 받아 일본자본이 이를 담당해서 채굴·증산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얻도록 보장·보조하고, 그 생산물을 모두 일제가 본국으로 약탈해잔 것이었다. 이것은 산금정책 동기가 약탈이었고, 그 생산과정은 조선인 노동자의 기아임금·저임금 및 조선인이 부담한 총독부 조세수입의 보조금으로 식민지 초과이윤을 수탈한 증산이며, 생산의 결과물인 산금을 모두 일본으로 약탈해간 사실에서 역사과학적으로 ‘개발’이 아니라 명백한 ‘수탈’이고 ‘약탈’인 것이다.
⑵ 군수용 광산자원의 약탈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한 직후부터 광산자원 약탈을 시행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으로 군수공업용 광물원료의 수요가 폭증하자, 1938년 5월 ‘조선중요광물증산령(朝鮮重要鑛物增産令)’을 공표하여 군수용 광산자원 약탈을 대폭 강화하였다. 일제가 군수산업상 특히 중요하다고 규정한 중요광물은 금광·은광·동광·연광(鉛鑛)·석광(錫鑛)·안티몬광·수은광·아연광·선철·유화철광·망간광·크롬철강·탕그스텐광·수연광(水鉛鑛)·니켈광·코발트광·흑연·석탄·운모·명반석·중정석(重晶石)·형석·마그네사이트·사금 및 사철(砂鐵) 등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군수용 광산에 조선총독부가 지불하는 각종 보조금과 특권을 제공하며 일본 독점재벌들과 일본자본을 투입하여 광산자원을 조사·채굴·약탈하였다.
일제는 이와 동시에 조선인 광산노동자를 희생하여 식민지 초과이윤을 보장할 목적으로 1938년 ‘조선광업 경찰규칙’과 ‘조선 광부노무부조 규칙’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위의 중요광물 채굴에 조선인을 광산노동자로 강제동원하여 극히 낮은 임금을 지불하거나, 필요하면 국책상 무상으로 조선인을 광산노동자로 묶어둘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또한 일제는 침략전쟁의 확대로 군수물자가 부족하자, 1944년 ‘조선군수생산책임제(4월)’와 ‘군수회사법(10월)을 공포하여 광산과 공장에서 일제가 지정 요구하는 수량을 강제 생산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광산자원 약탈정책으로 주로 일본재벌과 일본인의 자본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면서 극히 저임금의 조선인 광산노동자들을 수탈하여 채굴 생산해서 일본으로 약탈해간 광물수량을 일제의 비밀자료(해방 후 공개)에 기초하여 다른 연구자가 요약 정리한 것을 인용하면〈표 1-10〉과 같다.
그러나〈표 1-10〉의 통계는 주로 1939년~44년의 수량 중심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전체의 약탈량은 이보다 훨씬 대규모의 약탈이었다.
일제는 군수용 광물자원으로 금 이외에도 철·석탄·흑연 등을 비롯하여 모든 희귀광물을 중시하여 약탈하였다.
철광은 한국에서 매우 오래된 광산인데, 일제는 이를 군수산업으로 중시하여 독점해서 집중적으로 채굴해 일본에 반출하였다. 일본은 종래 말레이시아, 필리핀, 중국 등으로부터 수입하던 철광석 수입이 어려워지자, 조선의 철광채굴 및 반출을 강화하였다. 특히 1930년대 후반 무산 철광이 발견되자 미쓰비시 등 일본 독점재벌을 동원하여 이를 독점하고 철광채굴과 반출에 광분(狂奔)하였다.
1935년 이후 철광 생산량은 1935년에 59만 8천톤, 1936년에 62만 8천톤, 1937년에 59만 3천톤, 1938년에 89만 9천톤, 1939년에 101만 7천톤, 1940년에 125만 8천톤, 1941년에 136만톤, 1942년에 226만 4천톤, 1943년에 236만 4천톤, 1944년에 333만 1천톤에 달하였다.
일제는 다급해지자 1944년도 철광생산 책임량을 478만 5천톤으로, 1945년의 생산목표량을 550만톤으로 1943년의 2·3배로 계획해 약탈에 광분하다가 패망하였다.
일제는 이렇게 채굴한 철광을 철광산 부근의 항부에 제련소를 설치하여 선철(銑鐵) 형태로 제련해서 일본 본토로 반출하였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 철광에의 투자액은 총 약 7억원이었는데, 민족별로는 일본인 자본이 99.6%였고, 조선인 자본은 약 0.4%였다. 일제가 철광을 완전히 독점하여 채굴해서 일본 본토로 약탈해간 것을 알 수 있다.
석탄과 무연탄은 주로 일제의 군수용으로, 유연탄은 국내용으로 채굴되었다. 일제는 1940년까지는 조선에서 무연탄 채굴량의 약 50% 이상을 일본으로 반출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수송선박 부족 때문에 1941년 이후 감소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뿐 아니라 대륙침략 병참기지 설치와 관련하여 조선내 일본공업의 수요격증에도 동시에 관련되어 있었다. 유연탄은 함경북도에서 총 생산량의 90% 이상이 채굴되고, 다음이 황해도 사리원과 평안남도 안주에서 채굴되었다. 함경북도 경흥의 아오지 탄광은 조선인 노무자를 탄광에 투입하여 노예노동을 강제한 대표적인 유연탄 탄광이었다. 유연탄 생산량은 1935년에 91만 9천 823톤, 1936년에 123만 140톤, 1937년에 131만 8천 75톤, 1938년에 169만 6천 61톤, 1939년에 190만 4천 829톤, 1940년에 258만 8천 409톤, 1943년에 243만 2천톤, 1944년에 250만톤이었다. 유연탄은 무연탄과는 달리 조선 내의 일본 군수공업의 에너지 자원으로 모두 약탈 투입되었다.
일제강점 말기 조선 광산물의 일본에의 총 반출량 통계가 보이기에 미흡한 통계이지만 소개하면〈표 1-12〉와 같다.
일제는 일본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희귀광물이 조선 안에 다수 부존해 있으므로 군수용 희귀광물 중심으로 이를 채굴하여 모두 약탈해갔다. 조선 희귀광산물로서 1943년도 일본 총 생산량에서 높은 비중을 가져 약탈당한 광물과 그 비율을 보면〈표 1-13〉과 같다.
이와 같은 광산물의 채굴생산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수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일제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강제집행된 약탈이었다.
일제는 1938년 5월 ‘조선중요광물증산령’을 공표하여 군수 중요광물에 대한 ‘증산(增産)’을 명령했으며, 1944년 9월부터는 광산 사업장별로 ‘생산 책임량’을 지시하여 그 강제집행을 명령하고, 이 수행에 필요한 노무·식량·자재·수송 등의 총독부 지원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1944년 4월부터는 일본육군과 해군의 지원 아래 총독부, 각도,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광산연맹, 각도광산연맹의 주최 아래 ‘중요광물 생산책임완수 총결기운동’을 전개하고, 중앙·각 지방·광산현장별로 총 결기위원회가 조직되어 노예노동에 시달리는 조선인 광산노동자의 노동강화를 강제하고 저항을 탄압하였다.
민족별로 보면 일제강점기에 물론 조선인 자본가들도 광산채굴에 투자하고자 하였다. 이것은〈표 1-14〉에서 보듯이 조선인의 광산설립출원수와 비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광산에 대해 ‘허가제’를 고수해서, ‘15년 전쟁’ 기간에는 이를 강화하여 조선인 자본가의 진출을 탄압하고, 그 대신 일본 독점재벌을 각종 특혜를 주며 불러들여 광산자원을 채굴 약탈케 하였다.
그 결과 실제 조선인과 일본인의 투자에 의한 광산물 생산가액은〈표 1-15〉에서 보듯이 1941년에 일본인이 96.2%를 차지해 독점한 반면에 조선인은 3.8%를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일제의 광산채굴에 투입된 조선인 노동자의 실태는 참으로 비참했다.
한국인 광산노동자 수는 1933년에 8만 4천 701명, 1935년에 14만 2천 39명, 1938년에 22만 3천 790명이었다.
한국인 광산노동자들의 노동임금은〈표 1-1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인 광산노동자들 임금의 약 3분의 1(33%)밖에 받지 못했으며, 최저는 한국인 성인노동자가 일본인 유소년 노동자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민족차별 광산노동자 임금만 갖고서도 일제의 광산에 투자한 독점재벌은 막대한 식민지 초과이윤을 착취하였다. 조선인 광산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보면, 1931년 조사(광산 213개소)에서 8시간 이내가 1.9%, 8시간~9시간이 9.9%, 9시간~10시간이 6.6%, 10시간~11시간이 21.1%, 11시간~12시간이 26.2%, 12시간 이상이 34.3%였고, 광산노동자에게 휴일이 없는 곳이 44.1%나 되었다.
광산의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하고 생명의 위험이 높기 때문에 조선인 광산노동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공장노동자나 토목·건축노동자로 전환하고 싶어했다. 일제는 부족한 광산노동력을 보충하면서 일본 독점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1939년부터 ‘징용제’를 광산노동에 가장 많이 적용하였다.
일제는 1939년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징발한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제의 광산에 투입하여 매우 값싼 극단적 최저임금을 주거나 아예 무보수로 사역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러한 수탈과 착취로 일본 독점재벌의 식민지 초과이윤은 더욱 더 극대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광산에서는 이것을 군수광산산업이라 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이직이나 탈출을 엄금하였다. 조선인 광산노동자의 숙소는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일본군이나 헌병대, 경찰관들에 의해 탈출을 막기 위한 철저한 경비가 세워졌다. 일제광산에 투입돤 조선인 노동자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생존유지의 음식만 공급받으면서 하루 12시간~13시간 강제노역을 당하였다. 병들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버려졌다. 탈툴하려다 성공하지 못하면 총살당하거나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죽기 전에는 이 처참한 ‘강제 노예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제의 광산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직접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노동의 자유도 전혀 없이 이렇게 완전히 ‘노예노동’을 강요당하고 처참하게 수탈당하였다.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아오지 탄광에 끌려갔다’는 말은 바로 노예노동에 끌려가서 죽어야 나온다는 은유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광산투자를 간단히 검증해보면, 투자의 ‘동기’도 광물자원의 ‘수탈’에 있었고 ‘생산과정’에서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극단적 ‘수탈’이 자행되었으며 생산 결과물인 채굴된 광물도 일본으로 ‘수탈’해갔다. 이러한 방식으로 광물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이 과연 ‘개발’이란 말인가? 이것은 ‘개발’이 아니라 ‘수탈’의 증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것임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