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악마
[Bye, My devil]
그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를 사랑했다.
그는 나에게 뭐든지 해주었고 나는 그걸 당연스레 받아들였다.
그는 나의 곁에 항상 있어주었고 나는 그가 내 뒤에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우린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행복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고 그는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손에서 놀아나 바보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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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 악마를 보낸다.
안녕, 나의 악마
Written by. 김디엠
***
퇴근시간은 다가왔고 회사식구들은 하나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몸에 걸쳤다.
퇴근 할 생각에 싱글벙글이신 팀장님도 밤색 외투를 몸에 가볍게 걸치셨다.
"어휴- 팀장님. 이제 외투 하나 사입으셔야 겠다. 내가 입사한지 4년 째인데 어떻게 4년 째 저 밤색외투는 변함이 없어."
패션에 한 감각하는 한 여자 회사원이 팀장님의 밤색 외투를 보고 한마디 하니, 퇴근 준비를 하던 모든 팀원들이 하나같이 와하하-하고 웃었다. 그 중 한 남자사원이 그녀의 말을 되받아쳤다.
"따님이 처음으로 돈모아서 사준 외투라잖아. 아마 팀장님 따님이 다른 외투 사줄 때 까지는 계속 입으실껄?"
"아이구- 외투에 정들겠수."
사람들의 말이 하나 둘 꼬리의 꼬리를 물어갔다. 나는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팀원들 사이에 슬쩍 빠져나온 뒤 회사 앞에 서서 항상 변함없이 마중나와주던 그를 기다렸다.
아침부터 회색 구름들이 하늘을 지나다니더니 기어코 물방울을 쏟아내고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 그리고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발자국 회사 앞 낮은 계단을 내려가 조금 머리를 적셔보았다.
내 젖은 머리를 보면 그는 나의 머리를 콩-치면서 부드러운 말과 함께 내 머리를 털어줄 것이다. 머리를 털어주던 그의 손길을 생각하니 미소까지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서 있는데 회사 입구가 시끌벅적-해지면서 회사원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어? 체르니 씨. 아까 먼저 빠져나가는 것 같더니 아직 안갔네?"
"네. 데리러오기로 한 사람이 있거든요."
그 말을 하는데 얼마나 뿌듯하던지. 옆에있던 팀원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 그 지극정성의 애인? 언제 한 번 소개시켜줘요. 체르니 씨 우리랑 점심도 안먹고 매일 나가서 먹고오는게 그 애인이 도시락을 싸와서라지?"
"어머, 정말? 부럽다, 부러워."
그들의 말에 내 어깨는 더더욱 펴졌고 조금은 쑥스러움에 얼굴도 살짝 빨게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부끄럽긴하나봐?'라며 놀려댔고 나는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집에나 가시죠."
"하하. 알았어, 알았어. 그럼 먼저 갈께. 애인이랑 오붓한 시간보내~"
눈까지 찡긋 거리는 그 사람의 모습에 나는 피식-웃어버렸고 회사 사람들의 뒷모습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우산들도 저 멀리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 머리뿐만 아니라 옷까지 다 젖었다. 하지만 그런것들 모두를 신경쓰지 않는 이유는 한가지.
나의 애인.
그는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나에게 입혀줄 것이고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줄 것이다. 그리고 따뜻한 곳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내밀것이고 얼굴이 창백하다며 내 볼을 자신의 따뜻한 손으로 감싸줄 것이다.
다음 날, 감기가 걸리면 내가 회사에 못나간다고 손수 전화해줄 것이고 새벽에라도 약을 사가지고 와서 꼭 먹여줄 것이다. 죽은 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야채죽으로 만들어 줄것이고 내 열을 모두 빼앗아 가버리겠다며 감기가 옮아도 모른다는 투정을 부리며 내 이불속에 파고들어 나를 꼭 안아줄 것이다.
회사에도 데려다 줄것이고 데리러 와 줄것이다. 점심시간에는 꼭 점심을 싸가지고 올 것이고 내 휴대폰 알이 떨어질 때 쯤이 되면 알을 선물해 줄것이다. 최신노래가 나오면 나에게 최신 벨소리를 선물해주며 내가 하고 싶은것은 꼭 해줄 것이다.
내가 우울해지는 날이면 재미있는 비디오를 빌려와 함께 웃어줄 것이고 내가 외로워 할 때는 내 곁에서 손을 잡고 시내 방방곳곳을 돌아다녀 줄 것이다. 내가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날은 비가 오지 않더라도 꼭 우산을 챙겨 올 것이고 우리집에 생필품이 떨어질 때가 되면 자기가 먼저 나의 손을 이끌고 마트로 갈 것이다.
이런 남자다. 내 애인이라는 사람은.
그를 생각하면 내가 지금 빗속에 서 있다는 것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고 내 정수리를 따악-하고 때리는 빗방울도 점점 더 굵어졌다. 어둠은 전보다 더 짙게 깔렸고 회사 앞 도로의 차들도 하나, 둘 퇴근시간을 빠져나가 한가해지고 있었다.
회사의 경비아저씨들도 회사의 문을 걸어 잠궜고 내 옆을 기웃거리다가 말없이 사라지셨다.
불어나는 빗줄기는 내 얼굴 위로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도 보지 못 할, 나 조차도 자칫하면 알 수 없었던 가는 눈물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 빗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뭐가 눈물인지 뭐가 빗물인지 몰랐다. 내 눈은 점점 시뻘겋게 변해갔고 내 눈앞도 점점 일그러졌다.
아- 왜 알지 못했을까.
그는 없다. 나의 애인은 없다.
뒤돌아 사라지는 팀원들의 작은 소리를 왜 듣지 못했을까.
'3년전에 체르니 씨 애인 교통사고로 죽었다면서 왜 그렇게 말하는거야?'
'불쌍하잖아. 체르니 씨 아직 자기 애인이 죽은 걸 잊어버려. 현실도피라고 하나?'
'그래서 일부러 태연한 척 애인이랑 오붓한 시간보내라고 말해주는거야?'
'안그럼 어쩌겠어? 체르니 씨 애인 죽었어요. 라고 말해 줄 수는 없잖아.'
점심시간마다 회사 휴게실에서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수근거리던 사람들의 말을 왜 듣지 못했을까.
'또 혼자 저러고 있지.'
'가끔 혼자 웃기도 해. 앞에 음식이 없는데 막 먹는 시늉도 하고...'
'저거 정신병아니야? 회사 잘 다니네?'
'벌써 월급 안들어간지 꾀 오래됬을껄. 그래도 저 사람 팀장이 정이 많아서 언제든지 와서 앉아있으라고
저 사람 자리 안치운데잖아.'
왜 이웃집 사람들의 눈초리를 느끼지 못했을까.
'아이고, 시장봐온거 다 떨어지겠네. 왜 한 쪽 끈만 잡고다닌데?'
'그 전 애인이랑 매일 장봤는데 짐을 들 때 매일 한끈씩 나눠잡고 다녔잖아.
그런데 애인 죽고도 그 애인이 아직 살아 있는줄 알고 저러는거지...'
그제서야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4년 째 팀장님은 자신의 딸이 사준 외투를 입고다녔지만 나는 3년째 그가 마지막으로 사준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눈 앞이 일그러짐이 멈췄고 나는 그제서야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좀더 삐뚤게 바라보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모두 너때문에 내가 이렇게 됬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너를 잊지못해 이런 꼴이 되지 않았을껄?"
그 때문에 행복했던건 안다. 그가 내 삶의 낙이었던것도 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친상태에서 되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넌 천사의 탈을 쓴 악마였어. 매일 나를 지켜줬고 내 뒤에서 날 받쳐주었지."
넌 항상 내 곁에 있었어. 넌 나를 길들였고 나는 너에게 길들여졌어.
그렇게 떠나버릴 거였다면 차라리 날 이렇게 길들이지 말지그랬니.
넌 악마야. 넌 나에게 행복을 줬다가 한 순간에 획-뺏어버린 지독한 악마야.
나는 비에 젖어 잘 벗겨지지 않는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외투의 양쪽 소매를 잡고 내 머리 위에 올렸다.
"마지막으로 머리 털어줄래? 너 때문에 비 맞았거든."
외투는 더이상 젖을것도 없이 흠뻑 젖어 무거운 몸으로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
철퍽-하는 소리가 빗소리사이로 들려왔고 나는 그 외투를 발로 꾸욱-밟아 준 뒤로 차 하나 없는 도로가운데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땅으로 떨어진 외투처럼 내 몸에서 힘을 뺏고 나는 털석-도로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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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에 파뭍혔던 자동차 소리는 내 바로 뒷쪽에 다가와서야 생생히 들려왔다.
헤드라이트는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알려주는 듯 나를 정면으로 비춰왔고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하기위해
두 팔을 벌렸다.
난 주인공이다.
마지막 무대에서 단독 라이트를 받는건 바로 나.
나는 나의 마지막 대사를 멋지게 읊으며 눈을 감았다.
"안녕, 나의 악마"
귓가에 파고드는 충돌음은... 마지막을 장식해주는 관객들의 박수소리.
첫댓글 문체가 너무 멋있네요. 잘 읽고 가요^^
※ 칭찬감사해요 ! 읽어주신거 감사합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