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카드 대란(大亂)’이다. 카드 때문에 나라 경제가 결딴날지 모른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고, 카드 빚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놀랍지 않다. 한 가구당 빚이 3000만원에, 신용불량자 300만명 시대가 열리고 나니, ‘카드 마감일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이 난국에 카드회사에 다니는 2535세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들로부터 요사이 ‘세상 사는 이야기’, ‘카드 이야기’를 들어봤다.
=2년 전만 해도 카드 회사 다닌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모이면 당연한 듯 ‘한 턱 쏘라’고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대기업 인사과에 있는 동창에게 ‘너 잘리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전화가 오더라. 격세지감이다.
=어른들도 옛날에는 “회사 잘 들어갔다”고 뿌듯해하시더니, 요사이 ‘카드 빚 자살’이나 ‘카드채 비상’ 같은 신문 제목 나온 날이면 걱정어린 눈길로 물끄러미 쳐다보신다.
=이런 것부터가 거품이다. 사실 옛날에 잘나간다고 했을 때도 카드 회사가 엄청난 연봉 받는 회사 아니었고, 지금 어렵다고 해도 당장 망할 회사가 아니다. 물론 요사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카드사들이 구조조정을 했고, 주5일 근무제지만 토요일에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나와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고객 중에는 카드 한도가 자신의 신분을 표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직접 겪은 일인데, 한 중소기업 대표는 신규 카드를 발급받은 후 “내 한도가 왜 80만원이냐”, “너희가 날 어떻게 보는 거냐”고 불같이 화를 내더라. 술 자리에서 ‘내 카드 한도는 1000만원’ 하며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카드 한도가 자신의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허위의식은 허탈하기까지 하다.
=별의별 고객이 다 있다. 억지 민원을 상습적으로 제기하던 한 고객은 회사를 찾아와 “내가 쓴 게 아니니 결제할 수 없다”고 우겼다. 본인이 사용한 게 확인되자, “반만 깎아달라”고 호소 반, 협박 반으로 나오며 직원과 몸싸움을 하더니 “맞았다”며 고소하더라. 결국 이 고객은 재판에서 5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동산중개사 시험에 합격하면 아내에게 체면이 서 돈을 받을 수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어이없는 부탁을 하더라.
=카드 빚 받는 일을 하다보면 슬픈 일도 많다. 어떤 집은 아버지가 연체자인데, 가족들도 그 아버지를 포기했는지 집으로 전화 걸면 “그런 사람 모른다. 그 사람하고 해결하라”고 한다. 어머니가 딸 명의로 카드 발급받아 쓰다가 어마어마한 연체액을 내고 모녀의 연을 끊은 경우, 배우자에게 피해를 줄까봐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요사이 카드 회사의 화두는 ‘믿었던 여성, 너마저’이다. 1년 반 전만 해도 여성 회원은 연체율도 적고 실적이 우수한 회원이라는 분석이 주류였고, 그래서 카드사들이 앞다투어 여성 전용 상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요사이는 여성 회원의 연체율이 더 높아졌고 채권 회수도 힘들어져서 카드사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이것도 결국 경쟁 때문에 경제 기반이 좋지 않은 여성 회원까지 가입시킨 것 때문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카드에 대한 이해가 잘못돼 있다. 흔히 신용카드를 ‘현존하지 않는 지급 능력을 대체해주는 요술 지팡이’로 오해한다. 카드는 ‘존재하는 지급 능력을 대체해주고 약간의 신용을 주는 도구’일 뿐이다.
=정부 정책에도 문제가 많다. 카드로 호황을 일궈낸 후 문제가 생기니까 너무 갑자기 한도를 줄이라고 압박했다. 카드를 적절하게 잘 활용하며 살던 평범한 중산층 부부가 갑작스런 신용 한도 축소를 당한 후, 은행에서도 돈을 못 빌려 할 수 없이 고리의 사채를 쓰는 바람에 파탄에 이르는 경우가 꽤 있더라.
=카드 회사도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신용카드는 업종 특성상 텔레비전 광고와 매출액의 연관성이 밀접하지 않다. 그런데 이영애 CF가 히트하자, 앞다투어 빅 모델을 쓰고 텔레비전 광고를 폭포처럼 했다. 경쟁이 심해지자 앞다투어 회원 끌어모으기에만 나선 면도 있다. 홍보할 때는 회원수 많다는 게 제일 잘 먹히니까.
=카드는 칼이다. 요리사가 잘 쓰면 음식 재료를 잘 자르고 멋진 음식을 만들 수 있지만, 잘못 휘두르면 남도 다치고 자신도 피 난다.
[조선일보] 2003년 06월 25일 장원준기자
■ 참석자 명단
△LG카드 이상원(30) 상품개발팀 과장 △삼성카드 임명선(28) 이미지마케팅팀 대리 △현대카드 한미경(24) 상품개발팀 사원 △외환카드 김홍엽(27) 전산운영팀 사원 △국민카드 오재원(28) 기획팀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