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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아깡'과 '도라무깡'
우리나라에는 이래저래 ‘깡’이라는 음(音)이 들어가는 용어(用語)가 많다. 주제가 소개하는 ‘스피아깡(예비 기름통)’, ‘도라무깡(드럼통)’ 외에 ‘깡통', '깡패', '깡그리(남김없이)', ‘깡기리(깡통 따개)’, '뗑깡(생떼)', '낑깡(금귤)', ‘깡술(강술 ; 안주 없이 마시는 술)’, ‘미나리깡(미나리를 심은 논 ; 원음은 ‘미나리꽝’임)’, ‘깡집게(뇌관을 도화선에 잇는데 쓰는 집게)’, ‘수수깡(수숫대)’, ‘깡시장(급전 시장)’, ‘카드깡(카드 대출)’, '폰깡(휴대폰 대출)’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물론 이 가운데는 우리말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깡’이 들어가는 용어의 어원(語源) 몇 가지를 살펴본다. 먼저 '깡패'의 경우 '깡패'들은 '깡'이 있기 때문에 '깡패'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하나 이는 불량배(不良輩)를 뜻하는 영어 'gang'과 '어울려 이룬 사람들'의 뜻인 한자 '패(牌)'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그리고 '깡통'의 '깡'은 '통조림’ 혹은 ‘통조림’의 ‘통'을 가리키는 영어(英語) 'can'이 '깡'으로 발음 되어 전해진 것이다. ‘도라무깡’은 '드럼통'을 일컫는 일본사람들의 발음인데 어느새 경상도(慶尙道) 사투리인양 치부되고 있다.
어색하고 촌스러운 말은 모조리 경상도(慶尙道) 사람들의 말인 양 단정해버리는 잘못된 사고(思考) 때문이기도 하다. '깡통'의 경우도 ‘깡패’의 경우와 같이 'can'+'통(桶)'이 되어 영어와 한자(漢字)가 만나서 우리말이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뗑깡(てんかん)’은 '뗑깡부리다'라는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데, 일본말이다. 일본에서 한자로 '전간(癲癎)'이라고 쓰며 간질병(癎疾病)을 의미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억지를 부리거나 생떼를 쓰는 의미로, 혹은 어린이가 심하게 투정을 부리는 뜻으로 쓰인다. 상황에 따라 생떼, 억지, 투정, 행패 등 적당한 말로 바꿔 쓸 일이다.
‘낑깡’은 금귤(金橘)을 말하는데, 운향과에 속하는 상록 관목이다. 키는 2.5~4.5 m 가량이고, 짙은 색 잎사귀가 나며, 빽빽한 가지에 가시가 있는 것도 있다. 길이 3-5 cm에 너비 2-4 cm인 작은 타원형의 열매가 열리며, 색깔은 노란색에서 붉은색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중국 원산이며, 동아시아에서 재배하는데, 열매는 보통 통째로 먹고, 껍질은 달고 안은 톡 쏘는 맛이 있다. 내용물이 너무 신 열매는 씹다가 버리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금귤을 소금에 절여서 목이 아플 때 먹기도 한다.
금귤(낑깡)
그러면 이 ‘금귤’을 왜 우리는 ‘낑깡’이라고 하는가. 이젠 더 이상 말하기도 싫지만, 이 말도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인들의 말이다. 일본어로는 ‘金柑’이라고 적고, ‘낑깡(きんかん)’이라고 읽는다. '낑깡'이라는 일본말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분명히 우리말이 있는데도 굳이 저들의 말을 쓰는 우리들의 자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귤이라 해서 금귤(金橘) 또는 작은 귤이라는 의미로 동귤(童橘)이라고 한다.
작은 귤같이 생긴 껍질째 먹을 수 있는 달고 신, 이 과일은 일본(日本)에서 들어온 과일이라 이름도 일본명 '낑깡'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다 일본어인 '낑깡'이라하면 조금 유식하게 보이고, 우리말인 '금귤'이라 하면 약간 고리타분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우리들 외동향우님들은 모두 우리 말인 ‘금귤’이라고 불렀으면 한다.
서론(序論)이 너무 길어졌다. 이제 이 파일의 주제인 ‘스피아깡’을 열어본다. ‘스피아깡’은 6.25동란 당시 미군(美軍) 찝차의 예비용(豫備用) 연료를 차체 뒤에 매달고 다니던 연료통(燃料桶)인데, ‘스페어’로 연료를 갖고 다니는 ‘통’, 즉 ‘캔(can)'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spare can의 우리식 발음이다.
군용 ‘스피아깡’
지난 1950-60년대의 어린이들은 이 ‘스피아깡’과 매우 친숙(親熟)한 관계에 있기도 했다. 당시에는 농사(農事)가 없거나 집안 형편이 곤란하여 학교(學校)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피아깡’을 메고 다니며, 석유장수나 양잿물 장사를 다니는 아이들이 한마을에 몇 명 정도씩 있었다.
‘찝차’와 ‘스피아깡’
이들은 경주, 불국사, 어일, 입실시장 등지의 오일장(五日場)을 찾아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들판과 고갯길, 도로(道路)를 무리지어 걸어 다니곤 했었다. 석유(石油)를 가득 담은 무거운 ‘스피아깡’에 ‘미끈’을 달아 짊어지고 4-5시간씩 걸어 석유장사를 다녔고, 재를 넘고 물을 건너 양잿물 장사를 다녔다.
스피아깡을 장착한 민간차량
재수가 좋아 다 팔고 오면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웠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조금밖에 못 팔았거나, 아예 헛걸음을 했을 때는 점심조차 굶은 채 20리터나 되는 통을 다시 울러 매고 와야 하는 참기 어려운 고통(苦痛)을 당해야 했다.
휴전(休戰) 이후에는 ‘스피아깡’이 술통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휘발유(揮發油)를 담는 찝차 ‘스피아깡’의 경우 몇 번 물로 씻어내면 냄새가 깨끗이 갔기 때문에 물을 담는 물통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대신 경유를 담는 ‘스피아깡’은 이런 용도(用度)로 사용하지 못했다.
‘스피아깡’은 이를 보유하고 있던 군부대(軍部隊)에서 주로 ‘막걸리통’으로 사용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군시절 일화(逸話)가 전해지기도 한다. 일화를 소개한다.
당시의 박정희 소장(小將)이 7사단장일 때의 일이다. 당시의 7사단은 설악산(雪嶽山) 일대를 관할지역으로 하고 있었는데, 대청봉 능선에서 예하(隸下) 8연대가 예비진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예비진지(豫備陣地)란 제1선이 붕괴되었을 때를 대비한 제2선의 참호(塹壕)와 교통호를 말한다.
당시 박사단장은 8연대의 진지공사(陣地工事) 현장에 20리터 들이 '스피아깡' 20개에다 막걸리를 담아 들고, 참모들과 설악산 공사현장(工事現場)을 들리곤 했었다. 해발 1천m를 훨씬 넘는 고지에서 참호공사를 하던 병사들은 사단장(師團長)이 갖고 온 막걸리와 산에서 잡은 반달곰을 삶아 포식을 하곤 했었다고 한다.
다음은 ‘도라무통’ 또는 ‘도라무깡’에 관한 얘기를 펼쳐본다. ‘도라무통’(doramu桶) 역시 안타깝게도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드럼통(drum桶)으로 순화하고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통조림을 '간즈메' 또는 ‘간주메’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어 '칸즈메(かんずめ, 缶詰)'에서 나온 말이다.
통을 뜻하는 '칸(かん)'은 영어의 'can'에서 나온 말이지만, 발음과 뜻이 비슷한 일본어(日本語) '칸(かん, 缶, 관)'을 대용(代用)으로 사용한 것이다. 앞서 말한 '캔(can)'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드럼통을 '도라무깡'이라고 하는 것도 일본어 '칸'에서 나온 말이다. 드럼을 일본어로는 '도라무(ドラム)'로 표기한다.
1950-60년대에는 오일장 장터마다 국방색(國防色) 군용 도라무통을 시퍼런 색이나 검정색 페인트칠을 해서 파는 가게가 한두 군데씩 있었다. 군부대(軍部隊)에서 흘러나온 것들로 동네마다 한두 군데씩 있는 ‘석유집’이나 부잣집에서 등유 저장용(貯藏用)으로 사가곤 했었다.
통째로 또는 반을 잘라 아랫쪽에 불을 땔 수 있도록 아궁이를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은 주막집에서 생선이나 육류(肉類) 구이판으로 활용하는 화덕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냥 반으로 자른 것은 가정집에서 염색을 할 때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시장에서 물감을 사와서 천이나 옷을 직접 염색하였다.
도라무통 가게
당시는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지역 주막(酒幕)에서도 나무로 만든 식탁은 거의 없었고 ‘도라무통’을 잘라 만든 화덕에 타서 냄새가 거의 빠진 흰 연탄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 석쇠나 냄비를 얹어 생선(生鮮)이나 돼지고기를 굽는 다던가 찌개를 끓여 안주로 삼았다.
생선 굽는 비린 연기며,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둥그런 ‘도라무깡’ 탁자에 둘러앉은 가난한 사내들은 와글거리며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곤 했었는데, 당시의 시골 목로주점(木爐酒店)에는 마을 구장(區長)과 담당 면서기, 그리고 인근 초등학교(初等學校) 선생님들이 단골손님들이었다.
당시의 ‘도마무깡’은 판잣집이나 ‘점빵(가게)’ 등에 약식으로 놓는 온돌의 구들장 대용(代用)으로 쓰이기도 했었다. ‘도라무깡’을 반으로 쪼게 펴서 ‘공굼돌’ 위에 얹어놓고 그 위에 흙을 깔면 구들이 된다. 그러나 이런 구들은 금방 식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불기운에 달은 돌보다 얇은 쇠붙이라 불을 계속 때지 않으면 바로 식어버리기 때문이다.
‘도라무깡’은 또 당시의 여인들이 즐겨 쓰던 욕조(浴槽)이기도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마솥에 물을 덥혀 뒤뜰에 있는 반쪽짜리 ‘도라무깡’에 가득 채우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속치마만 입고 들어가 목욕(沐浴)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아무리 사주경계(四周警戒)를 제대로 했다고 하나, 머슴놈이나 이웃집 남정네들이 그녀들의 알몸을 훔쳐보다가 들켜 호되게 경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머슴놈은 부엌에서 많은 물을 끓이는 경우 땔나무를 운반(運搬)해 주면서 새댁이나 큰애기 중 누가 뒤뜰에서 ‘목간(목욕)’을 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되고, 이웃 남정네는 우연히 아래채 뒤로 무엇을 찾으러 왔다가 생울타리 사이로 들리는 물소리를 듣고 알게 되는 것이다.
시발택시
당시의 ‘도라무깡’은 앞서 얘기한 대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自動車産業)의 효시에도 한몫 거들었고, 유랑극단(流浪劇團)의 무대를 가설하는데도 일조하였다. 6.25 이후 미군이 쓰다 버린 ‘지에무시(GMC)’ 엔진을 뜯어다가 ‘도라무깡’을 두드려 조립(組立)한 차가 ‘시발택시’였을 정도로 오늘날의 눈부신 자동차산업의 태동(胎動)을 열어주기도 했었다.
콩클대회 '도라무통' 무대
이뿐인가, 콩클대회나 유랑극단이 노천극장(露天劇場)을 가설할 때도 ‘도라무깡’ 몇 십 개를 깔고 그 위에 판자를 얹은 후 군용천막(軍用天幕)만 치면 그럴듯한 무대(舞臺)가 되었다. 징검다리가 놓였던 개울에도 ‘도라무깡’을 듬성듬성 놓고 나무판대기나 통나무를 묶어 얹으면 훌륭한 다리가 되었다.
도라무깡 다리
지난 1950-60년대에는 또 ‘도라무통’을 ‘뚱뚱녀’의 별명(別名)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체형(體形)이 별다른 굴곡이 없이 드럼통 모양으로 뚱뚱하고 살이 찐 여성을 ‘도라무통’이라고 했는데, 당시의 대표적(代表的)인 인물이 여성 코매디언 ‘백금녀’씨였다. ‘도라무통’만한 체구(體軀)에 화술이 뛰어나 인기를 독점(獨占)하기도 했었다.
백금녀씨의 파월장병 위문공연
‘도라무통’은 전쟁이후 민간기업(民間企業)에서 양산을 해왔기 때문에 흔하지만, 그 시절 군용 ‘스피아깡’은 너무나 귀해 요즘은 골동품(骨董品)처럼 거래가 되기도 한다. 20리터짜리 오리지널 군용(軍用) 기름통의 경우 개당 5만원에 팔리고 있지만, 수량이 워낙 적어 앞으로 그 가격이 폭등(暴騰)할 것으로 예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