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東皐) 선생 상국(相國) 이공(李公.李浚慶 1499~1572)은 네 조정을 섬긴 원로로서 한마음으로 나라에 몸을 바쳤다. 집안에서는 지극한 행실이 있었고, 조정에는 위대한 공렬(功烈)이 많았다. 본성은 엄의(嚴毅)하고 방직(方直)하였으며, 학문은 광명(光明)하고 정대(正大)하였다. 평생토록 밖으로 수식하여 남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일부러 특이하게 행동하여 명예를 구하며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는 일이 없었으며, 털끝만큼이라도 고집을 부리고 사정(私情)에 치우치는 뜻이 없이, 조심조심 경건하게 행동하는 자세를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 머문 74년 동안 군자는 그를 좋아하였고 소인은 그를 미워하였으며, 나라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공에게서 흠집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함경도 순변사(咸鏡道巡邊使)가 되었을 적에, 퇴계(退溪) 선생이 그 교서(敎書)를 지으면서, “학문은 천인(天人)을 구명하였고, 기미를 깊이 살펴 미리 대처하였으며, 퇴폐한 습속을 진정시켜 지주중류(砥柱中流.지주산이 탁한 황하 급류 속에 우뚝 버티고 서서 거센 물결을 혼자 감당하고 있는것)처럼 우뚝 서 있다.”라는 등의 말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퇴계 선생이 물러나겠다고 청하자, 상이 하문하기를, “경(卿)이 추천할 만한 자가 없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수상(首相) 이준경(李浚慶)은 목소리와 안색을 변하지 않고, 나라의 형세를 태산(泰山)처럼 안정되게 하니,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이 사람보다 나은 자는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보면 공이야말로 이른바 흠잡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율곡(栗谷) 이공(李公.李珥 1536~1584)은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이준경은 머리를 숨기고 형체를 숨긴 채 귀신처럼 이야기하고 유령처럼 설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준경의 말은 현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효시(嚆矢)가 되고 남몰래 해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옛사람은 죽을 임시에 하는 말이 선하였는데, 지금 사람은 죽을때 하는 말이 악하기만 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또 어찌된 말인가.
대개 공(이준경)이 임종할 무렵에 유차(遺箚)를 갖추어 운운(云云)하였는데, 당시에 소인(小人)이 자기들의 정상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을 매우 미워하여, 공이 숨을 거두자마자 손뼉을 치며 발끈 쟁집(爭執)하기를,
“붕당(朋黨)의 설을 지어내어 임금이 귀를 현혹하니, 소인은 으레 군자를 붕당이라고 헐뜯는 법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삼사(三司)가 교대로 공격하며 못할 짓 없이 하였으나, 다행히도 성명(聖明)이 밝게 살펴 주신 덕분에 그 계책이 먹혀들지 않아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뒤에 붕당의 화(禍)가 일어나면서 나라의 큰 병통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연 은폐하여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숨길 수 없게 되었으니, 당초에 공을 공격했던 것은 과연 무슨 의도에서 그랬던 것인가.
아,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퇴계 선생이 “학문은 천인(天人)을 구명하였고, 기미를 깊이 살펴 미리 대처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대개 공에게서 실제로 보고 얻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요, 과장되게 미화하려고 지어낸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가령 율곡이 공의 학문이 천인을 구명하였고, 기미를 깊이 살펴 미리 대처하고 있음을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그 시기에 선견지명이 비록 여회(呂誨)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필시 “머리를 숨기고 형체를 숨긴 채 귀신처럼 이야기하고 유령처럼 설하였다.”라고 하거나, “현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효시(嚆矢)가 되고 남몰래 해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말로 공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소인들이 우리 공(이준경)을 무함한 것이야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하겠지만, 율곡이 일세(一世)의 명유(名儒)로서 이런 거조를 취하고 이런 언어를 지어낸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지지(知至.아는 것이 지극하게 되는 것)를 우선해야 하고 중하게 여겨야 한다. 아는 것이 극진하지 못하면 행함에 반드시 차질이 생겨서, 일에 대해서는 시비(是非)에 어둡고 사람에 대해서는 사정(邪正)에 어둡게 마련이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도(道)에 대해서 논할 수가 있겠는가. 《대학(大學)》의 도(道)가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우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명철(明哲)한 것이라서 요제(堯帝)도 어렵게 여긴 바이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으리오마는, 사람이 일을 행한 것이 적으면 비록 성인이라도 그 사람을 알아보기 어려운 점이 물론 있겠지만, 사람이 일을 행한 것이 많으면 비록 어리석은 자라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동고(東皐) 상공(相公)으로 말하면, 조정에 몸담은 것이 오래되었고 일을 행한 것이 많았는데, 뚜렷하게 사람의 이목(耳目)에 들어 있는 것이 미담(美談) 아닌 것이 없고 비평을 받을 만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율곡이 조정에 함께 있었던 기간도 오래되니, 직접 배우면서 알 수 있는 기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공의 학문이 천인을 구명하고 기미를 깊이 살펴 미리 대처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심지어는 귀신과 유령처럼 시기하고 질투하며 남몰래 해친다고까지 인식하였으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이는 후학(後學)이 아무리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수가 없고, 의혹되는 생각만 엉겨 붙어 풀어지지 않기에, 도(道)가 있는 자에게 질정을 받고 싶어 하며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애오라지 나의 소견을 기록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기로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