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절강성 항주에 세워진 혜인고려사 정문겸-천왕전
잠간 혜인고려사가 중국 절강성 항주시에 세워지게 된 역사배경을 둘러 보겠습니다.
중국 양자강 남쪽 절강성(浙江省, 중국 발음으로는 저장성) 항주(杭州)에 있던 고려사(高麗寺)가 복원된다고 한다. 고려시대 의천 대각국사와의 인연이 각별했던 절이다. 그동안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과 용운 스님 등 우리측 인사들이 수시로 현지를 찾아 복원을 의뢰했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절강성 정부의 승인이 났다. 지난 11월 중국 절강성 정부 내 종교국의 승인을 얻어 항주 불학원(杭州佛學院) 광천(光泉) 스님의 주도로 옛 고려사 복원이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지난 11월 18일 항주시 종교국의 종교국장과 항주 불학원의 광천 스님이 한국을 방문해, 의천 대각국사의 자료를 찾고 해인사와 불국사 등 우리나라 절을 돌아보며 복원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소식을 오랜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야말로 한국과 중국의 불교교류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이며, 고려사는 그러한 족적의 증거로서 중국 내에서도 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의천 대각국사(義天·1055~1101)는 고려 문종의 네 번째 왕자로 태어나 11살 때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으며 12살 때인 1067년에 최고 승직(僧職)인 승통(僧統)에 올랐고 22살 때에는 처음으로 〈화엄경〉과 그에 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의천은 불교공부가 깊어지자 화엄학과 천태학의 교리상의 차이를 공부하고 싶어서 당시 제일 유명한 스님인 송나라의 정원법사(淨源法師)를 비롯한 스님들과 편지를 통한 문답을 하다가 중국 유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당시 고려 왕실에서 허가를 하지 않자 서른 살이 되던 1085년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몰래 중국으로 건너간다.
의천은 7월에 송나라 서울 변경(京)에 들어가 송나라 황제인 철종(哲宗)을 만난 뒤 유명한 승려들을 차례로 만나 교리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한다. 그리고는 항주로 내려가 혜인원(慧因院)이란 절에서 정원을 만나 교리에 대한 토론을 마음껏 했다. 혜인원에 머물 때 불교전적 7,500여 권을 기증하고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원래 선종에 속했던 혜인원이 화엄종으로 바뀌었으며, 이름도 고려사(高麗寺)라 하게 되었다. 의천은 곧 이어 천태산에 있는 지의(智 : 천태종의 개조, 지자대사라고도 함)의 탑을 참배하고 본국에 돌아가 고려에서 천태종을 열게 되는 것이다. 귀국한 뒤에도 정원에게 ≪화엄경≫의 세 가지 번역본과 이 경을 봉안할 장경각 건립비로 금 2,000냥을 보냈다. 정원은 장경각을 건립하고 그 경을 봉안하였는데, 이 때에 혜인원(惠因院)을 고려사(高麗寺)라 하였으며, 여기에는 의천의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므로 항주에 있던 '고려사'는 원래 '혜인원'이었다가 의천 대각국사가 전적을 갖다주고 재정적인 지원을 함에 따라 고려사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 혜인원이란 절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도 또한 중요하다.
이 혜인원이란 절을 만든 사람은 10세기 초 양자강 하류일대를 지배한 오월국(吳越國)의 왕인 전류(錢류)이다. 당나라가 망하고 중국 전역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오늘날의 상해, 남경, 항주 등 양자강 하류를 휘어잡은 국왕 전류는 수도인 항주 일대에 대대적으로 절을 신축하는데, 혜인원은 서기 927년에 왕실에서 옥잠산 자락에 터를 잡고 직접 세워 이 일대가 이후 절이 수없이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오월국을 세운 전류는 일찌기 중국 땅에서 활동하던 신라인, 혹은 백제인이라는 설이 있다. '비류백제가 일본왕실의 기원'이라는 설을 제기한 김성호 씨의 연구에 따르면 오월국은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이 세운 정권으로 여겨졌으며, 오월국의 왕들은 역대에 한반도와 항상 밀접한 교류를 가지려고 애를 썼고, 심지어는 견훤이 경주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워 고려와 싸우는 등 후삼국의 투쟁이 격렬할 때에 사신을 보내어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류의 아들 전숙(錢 人+叔)은 고려 광종에게 불교전적을 보내달라고 특별요청을 해서 고려에서 불경을 보내준 일도 있다. 이런 저런 정황을 종합하면 오월국의 왕실은 중국에서 살아남은 신라인, 혹은 백제인이라는 것이다(김성호,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권 참조)
이 설은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당시 양자강 하류의 상황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데서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어찌됐든 그 혜인원에 의천 대각국사가 지원을 아끼지 않아, 고려사라는 이름까지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고려사의 역사에서 송나라 최대의 문인 소동파가 등장한다. 장경각 건립을 위해 금을 보낸 후 다시 2년 뒤에 의천은 자기 스승인 정원(淨源)을 모신다는 구실로 금탑(金塔) 두 개를 세우겠다고 했다. 그러자 당시 항주의 최고책임자였던 소식(蘇軾), 곧 소동파가 반대했다. 이 지역의 상인들이 고려와 너무 밀접한데 자꾸 이런 식으로 돈을 받고 선물을 받는 것이 이 일대 정세에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소동파가 워낙 강력하게 반대를 하니 어쩔 수 없이 의천의 요청을 거부한다. 다만 금탑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혜인사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각별해서 황제 영종(寧宗)은 ‘화엄장각(華嚴藏閣)’이라는 네 글자를 내렸고, 나중에 금나라에 쫓겨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온 남송의 황제 이종(理宗)은 ‘역암(易庵)’이라는 두 글자를 내렸다고 한다.
이후 이 절의 운명은 시들해졌다. 원나라 때에는 고려의 심왕이 어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였으나 명나라 이후 한 차례 중수를 한 뒤에 시들하다가 태평천국의 난 때에 완전히 소실돼 폐사가 되었다. 전 고려대 김준엽 총장 1989년에 가보니 주춧돌과 우물만 남아 있더라고 한다. 그리고 그 터에는 일본 시즈오카 현 정부와 절강성 정부가 1982년 조약을 맺고 화가산장(花家山莊)이란 이름의 호텔을 지어 일본 시즈오카차를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이 자리 3만여 평의 부지에 혜인원, 곧 고려사를 건립하는데, 내년 착공에 들어가 우선 대웅전을 준공한 뒤 연차적으로 의천기념관 등을 건립하기로 했다고 한다. 최근 항주지역에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이를 더욱 늘이려는 절강성 정부의 계산이 우리 측의 복원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리라. 그러나 어쨌든 우리나라 임시정부도 한 때 이 항주에 있었다고 하니 항주에 혜인원이란 이름으로 고려사가 복원돼, 천여 년 전 이 곳에서 한국과 중국의 정신이 만나고 서로 우호교류를 했다는 사실을 서로 기억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 복원을 위해 20여 차례나 현지를 왕복하며 애를 쓰신 김준엽 전 총장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방생지 건너편으로 종루와 천왕전
대웅보전
윤장전
화엄경각
천왕전 내부모습
대웅보전 내부모습
윤장전 내부모습
화엄경각 내부모습
중문 바로 밑에 한글로 표기된 안내판
고려사 입장권
방장실에 모셔진 정원법사 동상
유관 항주 혜인고려사에 관한 더 많은 내용을 보실려면
http://blog.daum.net/koriya888 의 [항주의 역사/문화]에 들르시면 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구경잘했습니다....
귀한 정보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_()_
상세한 설명과 귀한사진들.....감사한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