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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잠에서 깰 때가 더 중요한 ‘동면’
출처 세계일보 : http://www.segye.com/newsView/20211215513596?OutUrl=naver
에너지 아끼기 위한 휴면상태
너무 일찍 깨어나면 생명 위태
코로나로 두차례 혹독한 겨울
우리 일상도 천천히 회복해야
기온이 떨어져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마무리할 일은 쌓여 있지만 추운 겨울 동물이 동면(冬眠)하듯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을 숨겨 내년 봄까지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동물의 동면은 휴면(休眠) 행동의 하나로 겨울철에 일어나서 동면이라 부른다. 반대로 여름에 휴면하면 하면(夏眠)이라 한다. 동물이 반드시 겨울과 여름에만 휴면하는 건 아니다. 하루 중에도 여러 차례 휴면하는 동물도 있다. 양서류, 파충류, 곤충, 포유류, 조류 등 다양한 동물이 휴면행동을 보이는데, 약 2300년 전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론’에서 “동물은 따뜻한 장소나 숨어 지내던 곳에서 몸을 숨겨 겨울잠이나 여름잠을 잔다”고 기록한 걸 보면 동물의 휴면행동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휴면 이유는 간단하다. 동물이 활동해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보다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으면 휴면한다. 동면을 나타내는 영어단어인 hibernation을 컴퓨터 분야에서 ‘최대절전모드’라고 해석하는데, 컴퓨터 전력이 부족할 때 최대절전모드로 들어가듯 동물도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휴면한다. 동면하는 동물이 많은 건 추운 날씨에 체온을 유지하고, 부족한 먹이를 찾는 데 에너지 소모가 커서 겨울철에 휴면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동면을 겨울잠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무의식적인 신체기능은 정상적으로 수행되는 아주 부드러운 휴식상태인 수면과 휴면은 다르다. 휴면에 들어가면 체온과 심장 박동수를 낮춰 신진대사가 정상상태의 5% 미만으로 떨어진다. 북극에 사는 땅다람쥐는 동면기간 체온이 영하 2도까지 낮아지고 동면하는 박쥐는 심장박동 수가 분당 400회에서 11회 정도로 떨어진다. 사람은 체온이 약 5도 내려가면 심장활동이 멈추고, 약 10도 내려가면 모든 생리작용이 정지하지만 동면하는 동물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적응행동으로 체온과 심장박동 수를 스스로 낮춘다. 겨울잠쥐는 자연상태에서 11개월 이상 휴면한 적이 있고, 냉장고에서 진행된 실험이긴 하지만 아메리카 지역에 사는 큰갈색박쥐는 344일 동안 휴면했다.
인생의 시련을 맞은 사람에게 추운 겨울 동물이 동면하고 봄이 오면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는 행동을 빗대어 격려하기도 한다. 동면한 동물이 따뜻한 봄이 되면 자연스럽게 잠에서 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동면한 동물이 봄철에 안전하게 깨어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적당한 시기에 깨어야 한다. 일찍 깨어나면 비축했던 에너지가 한순간에 소비되고 남은 에너지로는 봄까지 견딜 수 없어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동면하는 박쥐에게 발병하는 ‘하얀 코 증후군’은 병을 유발하는 곰팡이는 박쥐 자체엔 해롭지 않지만, 동면에서 일찍 깨어나게 만들어 결국 박쥐가 죽게 한다. 또한 동면에서 깨더라도 천천히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 알래스카에 사는 흑곰은 4월에 굴에서 나오지만 몇 주간을 무기력하게 보낸다. 동면기간 체중의 절반 이상이 감량됐어도 물고기처럼 영양분이 많은 먹이를 먹지 않고, 식물을 먹으면서 몸이 정상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동면 후 몸에서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수컷 북극땅다람쥐는 동면기간 생산되지 않던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봄철에 다시 생산된다. 그런데 짧은 기간에 테스토스테론이 급증하다 보니 매년 봄에 사춘기를 다시 경험하듯 몸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성격이 포악해지고 암컷을 두고 경쟁하면서 수컷끼리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지난 2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면에서 겨울을 맞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겨울 동안 에너지를 신중하게 쓰며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왔다. 서두르지 않고 적절한 시기를 봐서 깨어나는 것만 남았다. 동면에서 깰 때 극심한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지만 급하게 움직이기보다 몸과 마음을 천천히 회복시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면 후의 상태가 과거와 다른 것을 알고 적절히 대응한다면 기온도 마음속 온도도 따뜻한 진짜 봄을 잘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도윤호 공주대 교수 생태학
빛viit명상
행복한 삶을 만드는 방법
일반적으로, 타고난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알맞은 균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그 에너지 흐름과 순리에 따라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인데, 이 또한 후천적인 노력과 행동에 의해서 자신의 에너지 가운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함으로써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에너지를 극복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다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비옥한 땅에서보다 더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주어진 것을 탓하거나 원망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든 오직 한 번 뿐인 이 지구에서의 삶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천적인 에너지 불균형, 혹은 부족을 메우는 에너지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 즉 우리의 마음 안에 있다. 본래의 순수한 마음, 선한 마음으로 되돌아가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면 된다. 늘 선행을 베풀고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복도 따라오고 부족한 기운도 메워진다. 누구나 사람의 마음 속에는 본래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빛viit 알갱이가 있는 데 이를 통해 우주 근원과 맞닿게 되면 빛viit과 교류 할 수 있는 기본적 심성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무한의 에너지 ‘빛viit’과 만나게 된다.
순수로 돌아가기 위한 가장 첫걸음은 내면에 대한 관조이다.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마음을 철저히 관조해야 한다. 지금껏 자신이라고 맏으며 살아왔던 겉껍질, 진짜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틀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진정한 나는 이름, 성격, 외모, 직업, 재산도 아닌 오직 본래의 내 ‘마음’ 이다. 빛viit명상은 이러한 본연의 마음을 되찾고 나아가 우주의 에너지 ‘빛viit’과 교류하기위한 준비과정이다.
지금껏 빛viit명상을 행한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잘 해결 되었다거나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자신의 삶이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마음이 맑아지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면을 채우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내면의 에너지를 채우는 방법을 알게 되면 타고난 사주팔자는 물론 그 무엇에도 얽매임 없는 참된 자유와 만나게 된다. 그저 본연의 맑은 마음으로 돌아가 순리에 따라 행복한 삶을 살고, 나아가 그 ‘빛viit’을 자기 자신만이 아닌 가족, 사회, 나라, 그리고 온 세상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된다. 한 자루의 촛불이 사방의 캄캄한 어둠을 잔잔히 밀어내듯, 진정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 세상을 밝히는 세상, 그 아름다운 지구를 꿈꾸어본다.
물음표(?) 2005/07/10 초판2쇄 P. 122~124
에너지의 바다
“선생님, 도대체 우주의 ‘빛viit’ 이 뭡니까?” 하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원래의 ‘빛viit’ 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굳이 말로 표현해 보자면 ‘빛viit’ 이란 모든 우주만물을 움직이며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이다. 이 에너지는 인간은 물론 지구와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천적인 힘이며 빅뱅 이전의 무차원적인 에너지이다. 따라서 인간은 물론 우주만물은 이 에너지를 통해 삶을 부여 받았고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이 ‘빛viit’ 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때로는 부정하기까지 하는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 때문이 아니가 한다. 즉 자신의 머리와 판단력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식별해나갈 수 있다는 엄청난 무지와 교만이 어두운 마음을 부르고 결국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빛viit’ 을 눈앞에 놓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왔다. 그 가운데에는 세상과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생명에 대한 의문, 보다 안락한 삶의 추구, 절대적 진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있는데 이 모두가 오랜 세월 쌓이고 체계화되면서 신앙이나 사상, 학문의 형태로 발전 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에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귀의하여 무언가 높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진리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기에 그 누구도 도달해본 적 없는 것을 놓고 저마다 자기 방식이 옳다, 그르다 하며 말을 늘어놓고 때로는 다투기까지 하는 형국이 되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맛이나 모양이 비슷한 초콜릿을 들고는 서로 자기 것이 가장 맛있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나 사상, 학문의 갈래는 그 뿌리가 결국 하나, 우리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 ‘빛viit’ 이다. 이 ‘빛viit’ 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매달려있는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생각의 틀은 원래의 순수함을 갉아먹고 인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으로 구축해 놓은 학문과 사상, 종교라는 이름의 것들은 완전하지 못하고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변화하고 수정되어져야 하는 대상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끝인 동시에 완전한 에너지, 우리의 마음이 유래한 근원의 ‘빛viit’ 뿐이다. 마치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앎 그리고 그 외 모든 학문이나 진리를 전부 포함하는 것이 우주마음의 ‘빛viit’ 이다.
따라서 ‘빛viit’ 을 앞에 두고 자신의 지식이나 사고,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고개를 돌리는 이들은 결국 인간의 유한함으로 무한한 우주 전체를 판단하려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리를 향한 인간의 노력과 그 결과물 전부를 부정 하자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제 겨우 작은 실개천의 수준에 다다랐을 뿐이면서 큰 바다가 이렇다 저렇다 논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물줄기들이 흐르고 흘러 바다로 들어가듯 오늘날의 종교, 사상, 학문과 같은 것들도 결국에는 거대한 원래의 진리, ‘빛viit’ 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이는 오늘날의 과학이 밝혀놓은 빛(파장)의 단계에 대한 도식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지 예견한 것이다. 혹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 ‘우주초광력’이라는 우주의 빛viit이 이 파장들 가운데서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 밝혀두었다고 할 수 있다. 오백년이 될지 천년이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몇 백 년 후의 과학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우주초광력’을 인식하고 밝힐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다음의 예견 도표에서 보듯이 지금가지 과학이 밝혀낸 광선의 종류 중 가장 상위에 있는 광력(光力)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우주초광력’이라고 본다. 이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밝혀 낼 수 없지만 언젠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다음의 도표를 한 번 보자.(물음표 P. 226 참조)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 어떤 종교보다도 신뢰하고 추앙하는 것이 과학이기에, 과연 그 과학이 보편타당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지식을 기준으로 한다면 이 ‘빛viit’ 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나타내본 것이다. 그러나 빛viit명상을 통해 빛viit과 교류할 때 나타나는 금, 은, 수정빛의 결정체인 빛viit분의 결정조차 40퍼센트 수준 밖에 밝혀내지 못한 현대 과학의 수준으로 우주의 빛viit 전부를 밝혀내겠다는 생각 자체가 인간의 교만함과 무모함이 아닐까?
우리는 종교적 관념에 따라 천동설을 굳건히 믿던 중세인들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비난하며 종교재판에까지 회부했던 일화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천동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현대인들은 그러한 중세인들의 무지함을 우스갯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그 때 그 중세인들과 똑같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전철을 밝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부신 과학기술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으스대기 전에 과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관조해볼 필요가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최첨단 기술 장비가 개발되어 사람의 몸을 훤히 들여다본다 해도 그 기게로 우리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도, 찾아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주의 빛viit은 우리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말이나 과학으로써 100퍼센트 정확하게 표현한 모범 답안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커다란 전체 속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한 우리의 존재 그리고 그 작은 존재 속에 깃든 우주마음의 커다란 뜻을, 우리는 머리가 아닌 본연의 순수한 마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모든 강줄기가 큰 바다로 모여들 듯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던 진리의 근원이 이 ‘빛viit’ 에 있으며 결국 이 본래의 마음, 빛viit알갱이를 통해 우리가 원래 왔던 그곳, 따뜻한 어머니의 품과 같은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야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출처 : 물음표? 정광호 著 2005.07.20 초판 2쇄 P. 223~228
모두가 함께 빛명상 하는 세상이 될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
빛과 함께 할 수 있게 해 주신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 우리의 마음이 유래한 근원의 '빛viit' 뿐이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