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동숙이’ 입니다.
입을 동그랗게 모아 “동숙아!” 하고 부르면 왠지 ‘동숙의 노래’ 한 곡조가 떠오르는 애잔한 이름이지요.
어릴 적 그녀의 친구들도 “동숙아! 노~올~자!”하고 그렇게 불렀을 그 이름을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질 않습니다.
이따금 내가 장난삼아 “동숙씨, 우리 커피 한 잔해요.”하고 불러주지요.
나는 그녀를 50여 년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그녀는 초경도 치르기 전인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격이 고약한 한 남자를 만났답니다.
이따금 어른들이 오가는 말 중에 어렴풋이 들었던 ‘시집’이라는 걸 간 것이지요.
그러니까 동짓달 스므아흐렛날이 동숙씨의 결혼기념일입니다.
영문도 모른 체 그녀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동이 틀 무렵부터 걸어
시집이라는 곳엘 도착했을 땐 해거름이 지고 있었고
춥고 다리도 아픈 동숙씬 기진맥진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고 합니다.
마루에 앉아 쉬려했지만 너무 높은 탓에 팔에 힘을 실어 짚은 후 팔짝 뛰어 올랐다고 하는 걸 보면
어릴 적 동숙씬 키가 아주 작았던 모양입니다.
시집온 다음 날부터 동숙씬 집 생각에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다고 합니다.
입하나 덜자고 보내진 시집이 친정과 별반 다르지 않게 가난한 데다
생판 처음 본 낯선 이들과 지내는 걸 적응 못 한거지요.
왜냐하면 그때 동숙씬 시집이란 그렇게 ‘낯선 이들과 함께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가는 것’이라는 그 자체를
이해 못할 어린 나이였으니까요.
하는 수 없이 그녀는 그냥 주저앉아 살았습니다.
돌아가는 길도 모를 뿐더러
"집 생각일랑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 집 귀신이 되어라’" 하는 친정아버지 말에 체념을 한 거지요.
그렇게 참고 참으며 사니 살아지더랍니다.
조금씩 살도 오르고 키도 커가며 초경도 치르고.
초경을 치른 그 이듬해인 열여섯에 그녀는 큰 아이를 낳고 그 후도 다섯의 아이를 더 낳았습니다.
아니, 그 말고도 낳다가 잃은 자식도 셋이나 있으니 도합 아홉의 자식을 나았습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였던 동숙씬 얼떨결에 어미가 되었고
그 후 그녀의 삶은 눈가에 소금버캐가 더께로 앉도록 녹록치 않은 삶이었습니다.
끼니를 걱정할 가난한 살림에 엄하신 시어른, 말 안 듣는 시동생, 농삿일을 하다 입은 장애...
그리고 정작 자신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남편은 그야말로 ‘남 편’이었으니까요.
그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느라 그녀는 자신의 세월이 뭉떵이째 날아가는 것도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몽땅 늙어있더랍니다.
그녀의 세월은 혼자 도망친 게 아니라
그녀의 귀를 먹통으로 만들었고 보행차가 없으면 거동할 수 없이 쇠약하게 만들어 놓고 달아난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동숙’입니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노인이 된 동숙씨는 그 큰 집에 혼자 있습니다.
자식들은 성장해 모두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떠났고
끝까지 ‘남 편’ 이었던 남편도 멀리 떠난 지금
동숙씬 그 빈 자리에서 추억만 더듬으며 삽니다.
엊그제 어린이날, 동숙씨 집엘 다녀왔습니다.
버선발로 뛰어나올 기력은 없지만
그녀는 반달눈을 만들며 “바쁜데 뭐 하러 자꾸 오니...” 하며 마음에도 없는 말로 나를 반겼습니다.
늘 갈 때마다 느끼지만 나는 그 큰집에 혼자 덩그마니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쏴아 하고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허하고 목이 멥니다.
그래도 그녀는 혼자 지내는 게 좋다고 합니다.
아버지 성격을 닮은 오빠와 함께 지내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맞벌이를 하는 딸들 집에 사는 것도 편치 않다고…….
어디가서 누구랑 함께 살면 외롭진 않겠지만 갑갑하겠지요.
보청기를 해드렸건만 그걸 끼면 왕왕거려 정신사납다며 빼놓고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티브이 볼륨을 올려놓고 드라마를 보다 누구하나 눈 흘기는 사람 없고
마당 가득 꽃들을 심어놓고 “아유, 너는 쪼끄매도 꽃을 피워냈네”하며 그것들과 대화를 하거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동네 도둑고양이들을 앞세워 보행차를 끌고 마실도 가도 마음 편한데.
집들만 다닥다닥한 자식들의 집에서 사는 건 지옥일 수도 있겠지요.
그날, 나는 하루 종일 그녀와 이야길 했습니다.
아니,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주로 그녀가 이야길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며 추임새만 넣었습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주로 오래전에 이야기들로 어떤 건 백번쯤 들은 것들도 있습니다.
전쟁 때 폭격으로 친정식구들이 몰살 된 이야기며 시집살일 시킨 시어른,
더께가 앉도록 마음에 상처를 준 아버지얘기, 줄줄이 아이들을 낳고 배를 주리던 일 등.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주며 그녀와 먹을 밥상을 준비하고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내게 뭘 싸 줄까하고 이것저것 챙겼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화장실이 급한지 뒤뚱거리며 화장실 쪽으로 갔습니다.
그러더니 조용했습니다.
아마 잠깐 동안 그렇게 서 있는 듯 했습니다.
나는 소리가 멎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화장실 문을 열다 만 그녀가 화석처럼 그 자리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며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그러다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습니다.
그녀가 내려다보는 그곳엔 노란 오줌이 함부로 내려와 바짓가랑이를 타고 내려와 양말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가 왜...이러니.”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습니다.
“엄마, 괜찮아요. 원래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거의가 요실금이 있어요. 요즘은 아주 젊은 여자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데요. 뭐, 그러니 그럴 땐 얼른 옷을 갈아입으시고 그러려니 하세요.”
하지만 동숙씬 여전히 울상이었습니다.
나이가 드실수록 요실금이 심해지는 동숙씨.
말이 그렇지 어떻게 쉽게 그러려니 해지겠어요.
더군다나 깔끔한 성격의 그녀로서는 자연적인 생리현상으로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날, 동숙씨의 집을 나설 때 그녀가 대문 앞까지 배웅을 했습니다.
그래야 대문 앞 의자에 앉아 내가 탄 차가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드는 일이지만…….
차에 오르는 그때였습니다.
동숙씨가 돌돌 말린 뭔가를 주머니에 넣어줬습니다.
“뭐예요?”
“오늘이 어린이날이잖니. 가서 애비랑 ‘짬빵’ 한 그릇씩 사먹어.”
“이렇게 늙은 어린이가 어디 있어요!” 하고 나는 애써 마다했지만 동숙씬 “넌 환갑이 되어도 내가 살아있으면 나한테는 어린이다.” 라고 하며 한사코 주머니에 넣어줬습니다.
아……. 동숙씨 말에 나이든 어린이는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어린이날이면 동숙씬 그랬습니다.
우리들에게 신화당을 넣고 찐빵도 쪄주거나 장에 나가 아네모네 연필 한 다스를 사다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또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땐 채마밭가에 있는 밤나무에 그네를 만들어줬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도 그랬습니다.
알록달록한 양말이나 꽃무늬가 그려진 몸빼바지도 사주고
장날 장에 나가 양은냄비도 사다 놨다 줬습니다.
나는 동숙씨의 어린이날 선물을 받아들고 그녀의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을 박아 넣었습니다.
“엄마, 이렇게 살아만 계셔주셔도 고마워요. 내년에도 내후년, 그 후년에도 어린이날에는 이렇게 선물을 주세요.”
나도 그렇게 늙어갈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지고 관절염이 오고 가는귀가 먹고 또 요실금이 생기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다음에 갈 땐 요실금팬티를 넉넉히 사다드려야겠습니다.
첫댓글 얼마 남지 않는 우리들 모습이군요. 그래도 어머닌 행복하시네요. 이렇게 마음 헤아리는 딸이 있으니...돌아가시면 정말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으니 자주 뵈러 가시길...잠시 먹먹했습니다.
그렇지요.
거부하고 싶지만 곧 다가올 우리의 모습입니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예쁘다’ 엊그제 인터넷에서 본 글이 생각납니다.
노년의 삶, 잘 늙는 방법 등 이런 문구에 눈과 손이, 마음이 가고 있네요.
잘 물들자고요~
연규자선생님
사람도 생의 정점에 이르면 단풍처럼 붉게 타오르듯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지요.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곱게 물들어 벚꽃처럼 하르르 지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