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된 수행과 진실한 수행
무심(無心)이 도(道)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벽 스님은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한 분의 무심도인을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한 사람은 일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如如)한 본래의 몸이 안으로는 목석(木石)과 같아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히지 아니하고 걸리지도 아니하여, 능소(能所)도 없고,
방소(方所: 일정한 방향과 처소)도 없으며, 상모(相貌)도 없고, 득실(得失)도 없다.
또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나아가 십지(十地)에 이르러
무심을 얻는 자가 있으며 이는 일념에 무심을 얻은 자와 같아서 다시 심천(深淺)이 없다.”
불조(佛祖)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했습니다.
지위(地位)의 점차(漸次) 관계없이 바로 무심만 사무쳐 깨달으면 그 공용(功用)이 가지런하여
다시 심천(深淺)이 없다고 하셨으므로 도를 배우는 분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혹 동안 상찰(同安 常察) 스님의 십현담(十玄談)에 나오는
“무심을 일러 도라 말하지 말라. 무심이 오히려 하나의 거듭된 관문으로 막은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분이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무심은 유무의 견해가 소멸한
적멸무심(寂滅無心)으로 무심 또한 스스로 없는 무심한 본래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두 법융 선사가 이르되,
“넉넉히 마음을 쓸 때 넉넉히 마음 없이 쓰나니 간곡한 이야기는
명상에 수고롭고, 직설은 번거롭고, 거듭됨이 없는지라.
무심을 넉넉히 쓰면 항상 써도 모자라지 아니하니
지금 무심이라 말하는 곳이 유심으로 더불어 다르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용에 무심을 여유롭게 쓰면서 생활화하면 마음이 항상 또렷하고 고요하여
편안하고 맑은 정신으로 모든 생활에 걸림 없이 대응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복잡한 현실 생활 중에서 직업이나 시간에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 생활을 할 수가 있음을 우리 불자님들은 이 자리에서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화두선 공부를 지어갈 때는 반드시 모기가 무쇠로 된 소 등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목숨 걸고 하라는 얘기입니다. 고봉 스님은 『선요』에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지 말고 입부리를 내릴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버리고
한번 뚫어 볼 것 같으면 몸뚱이까지 쑥 들어갈 때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수행자는 활구(活句)를 참구(參究)해야지 사구(死句)를 참구(參究)해서는 안 됩니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불조(佛祖)와 더불어 스승이 될 만하지만,
사구(死句)에서 깨달으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본래 부처님인데 “무엇 때문에 닦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은 닦음(修)이 없이 닦고, 증득(證得) 함이 없이 증득 하고,
무심(無心)히 닦으며, 오염(汚染)됨이 없이 닦는다고 하시며, 그 종지를 설법하실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간혹, 사람들이 ‘깨달으면 무사인(無事人)이라 수행을 마쳤는데 어째서 수행을 계속한다고 합니까?’
하시는데, 이는 미(迷) 한 사람은 범부(凡夫)라 망수(妄修: 바르지 못한 수행)를 하고,
깨달은 사람은 성인(聖人)이라 진수(眞修: 진실한 수행)를 하게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사인은 곧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바르지 못한 수행은 끝마치고
진실한 수행만을 실행하시는 분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긍지를 잃지 않고 지니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사상과 행위를 늘 가지고 닦지 아니하면,
순식간에 역사의 흐름에서 밀려나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 몸마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각자가 본래 부처님임을 명확하게 스스로 깨달아 부지런히 정진하며
수행하는 길만이 궁극의 행복한 길로 나아가는 축복 받는 삶을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천(人天)의 복전(福田)이 됨을 의심치 않습니다.
간화선은 일상생활 중에서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일상생활을 떠난 간화선은 허망하여 토끼 뿔이나 거북의 털 같다고 하여 지극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사 문중에서는 행주좌와와 어묵동정을 여의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 짓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간화선이 생활 선으로 이해되어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는 실질적인 선으로 보편화되지 못하고,
참선은 전문수행자만이 닦는 것이요, 상근기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수행법이라 잘못 인식-되어 왔습니다.
간화선 대중화를 설선(說禪) 하는 지금에 이르러 이곳에 모이신 사부대중이 언제, 어디서나
생활 중에 간화선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요, 급급히 변천하는 현시대의 바쁜 생활 중에도
가장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간화선법으로 발돋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법성게(法性偈)를 통해 이르기를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시간이요, 한량없이 오랜 시간이 곧 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드는 짧은 순간에 한량없는 오랜 시간을 남김없이 수용할 수 있는 수행법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여유롭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 수행은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드는 순간
내가 스스로 부처님임을 믿고, 바른 생각과 바른 생활이 모르는 사이 점차 익어져서
시비에 갈등하고 집착하는 중생심을 멀리 여의고 청정하고 물듬이 없는 순일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게 되므로,
조작하여 취사(取捨)함이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됩니다.
의단이 독로하면 마음과 경계가 타성일편(打成一片; 한 덩어리를 이룸)이 되고,
무심(無心)이 깊고 그윽하여 일용(日用) 중에 막히거나 장애 됨이 없어 불성이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 과거의 악업이 문득 소멸하고 그 자취마저 찾을 길이 없게 되므로,
한량없이 오랜 시간을 곧 한 생각 속에 남김없이 거두어들인다는
의상 스님이 남긴 법성게의 유훈(遺訓)을 실지로 증험하게 됩니다.
어찌 우리들은 바쁘고 시간 내기 어렵다는 핑계로
내 생명과 삶의 근원을 망각하고 성실히 돌보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간화선은 고독한 자신과의 대화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만이 지닌 인생의 고뇌에 통풍을 시켜주는 감로의 역할을 하여,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심중의 고뇌를 단번에 풀어주고, 지혜와 편안함을 원만히 갖추게 하여
구경에 이르도록 부족함이 없는 세계를 한량없이 열어 보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모인 사부대중은 간화선을 실참하여 누구나 자기 자신이 부처님임을 확신하며
바르게 생각하고, 생활하면서 밝고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시기를 바랍니다.
간화선의 수행 요체가 되는 의단 독로(疑團 獨露)에 관해 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두선은 반드시 화두를 들면서 참구해야 합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면 삿된 생각으로 믿음이 흔들리고,
간절하게 참구하지 아니하면 의단이 독로하지 아니하여,
조사 관문도 뚫지 못하고 분별심도 끊을 수 없어 결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의심을 지어가되 지어감이 없이 지어가야 하고, 의심을 억지로 지어가지 아니하되,
끊임없이 지어가면서 짓지 아니해야 합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자연히 성성적적하고,
성성적적한 공부가 깊이 진행되더라도 간화(看話)와 참구(參究)는 병행하여야만
성성적적한 식심(識心)이 조복 되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고
무문관(無門關)을 통과하여 깨달음을 이루고 일체법에 자유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간화선을 실참실오(實參實悟)하여, 일체중생으로 더불어 청정 불국토를 장엄하실 분은
부처님도 조사 스님도 큰스님들도 아니고
이곳에 모이신 우리 불자님 자신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우리 불자님들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
불법의 흥망이 결정됨을 깊이 명심하시고 일상에 간화선을 열심히 닦도록 합시다.
- 정광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