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4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루카 10,13-16
회개: 병신 여우 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복음: 루카 10,13-16
무소유의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대자유의 삶을 찾은 프란치스코!
가톨릭 성인(聖人)이면서도 타 종교 신자들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성인이 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개척한 성화의 길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는 복음서 안에 드러난 예수님의 여러 면모 가운데, 머리 두실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예수님, 그래서 그 어느 곳에도 묶이지 않으셨던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흠모하고 추구했습니다.
인간적 나약함과 유한성을 딛고, 그 위에 펼쳐진 자기 극복과 자기 해방과 자기 이탈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하루 하루 여행길은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는 나날이었습니다.
그의 성화(聖化) 여정을 바라볼 때 마다 큰 감탄과 함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발밑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한번 이탈해보겠노라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보겠노라고, 갖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보겠노라고, 발버둥쳐 왔지만 아직도 제자리 걸음입니다.
초심자 시절 지니고 있었던 악습을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 일상적으로 짓던 죄를 아직도 같은 방식으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탈, 자유, 해방...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프란치스코의 삶이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한올 한올 얽히고 꼬인 실타래 풀듯이 인내롭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문제나
약점들을 극복해나갔습니다.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을 머릿속이나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행해나갔습니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토록 위대한 대 성인 프란치스코에게도 젊은 시절의 흑역사(黑歷史)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불리는 지 아십니까?
사실 그의 본래 이름은 죠반니 베르나도네(Giovanni Bernadone)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아시시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자수성가한 포목상이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호화판이었습니다.
당시 아시시 남자 청년들의 로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옆 나라 프랑스로부터 건너온 청년 문화 중에 하나였습니다.
멋진 기사(騎士)가 되고, 잘생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아름다운 여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여인을 찾게 되면, 미리 준비해둔 낭만 가득한 음유시를 한편 멋드러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청년 프란치스코 역시 프랑스 음유 시인들의 서정시를 열심히 읽고 외웠습니다.
멋진 프랑스 패션으로 온몸을 치장했습니다.
그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별명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어린 프랑스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때 영혼의 성장이나 구원, 이웃 사랑의 실천이나 청빈의 덕과는 철저하게도 담을 쌓고 살아왔던 프란치스코, 잔뜩 겉멋만 들어 유행의 최첨단을 걷고 있던 그가, 적당한 회개가 아니라 180도 완전 회개해서, 몇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상 만인들로부터 존경과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의 신앙 여정, 회개 여정, 하느님을 찾아갔던 순례 여정은, 한없이 부족한 우리에게 큰 희망과 위로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이 우리의 가난과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는 더없이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가난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은 반면, 그는 무소유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 대자유의 삶을 찾았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강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2024. 10. 4. 금)(루카 10,13-16)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3-16).”
1)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이미 지은 죄에 대한 ‘선고’로 보이지만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목자이신 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경고’이고,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특정 도시들만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
즉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2) ‘티로’와 ‘시돈’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 또는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을 몰라서 안 믿었더라도, 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안 믿었더라도, 죄는 죄이고,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안 믿은 사람들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은
사람들과는 좀 다른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또는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들을 기회가 없어서 전혀 몰랐던 경우와 듣고서도 거부한 경우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에 성탄절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고, 그날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했다는 변명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 지역 사람들이나 이슬람 지역 사람들이라면
그런 변명이 통할 수도 있겠지만...
3) 13절의 예수님 말씀의 뜻은, “너희가 얼마나 큰 은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깨닫고,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은 “너희가 받은 은총들”입니다.>
“나는 받은 은총이 없다.
그러니 회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짚어보면서 “이것도 은총이었고, 저것도 은총이었다.” 라고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가 “그게 무슨 은총이냐?” 라고 부정해 버리면 도와줄 방법이 없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뉘우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과 교만한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나는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틀림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스스로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따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교만과 위선부터가 죄입니다.
16절의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는 말씀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이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복음을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합니다.
4)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단순하게 죄를 뉘우치는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죄를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회개는 인생과 삶 전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전부 다,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변화시킨 다음에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보면, 그는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고, 그냥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배반자 유다가 자살한 것은 죄책감 때문일 텐데,
용서받기를 거부한 일이기도 하고, 용서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린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갔습니다(마태 26,2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