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천국
에제 18,1-32; 마태 19,13-15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024. 8. 17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에제키엘은 섣부른 연대책임을 경계하면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아마 유배를 당하며 고생살이를 하던 동족이라서 자칫하면 그 고생을 조상 탓으로 돌리기라도 할까봐 이제부터라도 각자가 회개하여 의롭게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열하고 있는 선행 목록은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죄상을 연상시킵니다.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놓는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의 본보기로 어린이를 제시한 바 있었던 그 연장선 상에서 어린이를 축복해 주시며 하늘 나라의 삶을 사는 가르침을 일러주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마치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어린이처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이라는 뜻입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자녀 교육의 어려움을 빗댄 현실적 표현일 것입니다. 그만큼 성장해서 자아가 형성되어 가는 청소년기에는 부모의 충고나 배려보다도 자기 자신이 하고 싶고, 느끼고 싶은 새로운 미래를 앞세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현명한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은, 자녀의 의기를 꺾어버리거나 누르지 말고, 일단 먼저 들어주면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먼저 부모의 조언을 청할 때 인생의 경험을 말해주고, 도움을 청할 때 할 수 있는 배려를 해 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항하는 청소년처럼 하느님께 대들기도 하고 우기기도 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고 되돌아올 때까지 인내로이 기다려 주십니다.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이 사랑과 자비가 천국의 요건임을 알아차리는 데에 어린이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어느 가정에서나 어린이들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부부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 아이가, 몸으로는 자기들을 꼭 절반씩 빼어 닮은 분신이자 삶으로는 일생을 다 바쳐서 자신들의 가치관을 다 쏟아 인간으로 키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 축복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어른이 된 다음 그 사랑을 나누어 줄 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가톨릭 교회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유아 세례를 주어온 이유입니다. 아이들은 성장 단계에 따라 받아야 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려서 표현을 하지 못할 뿐 아이들은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민감합니다.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아이의 표정은 천사 같아서 그 자체가 천국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시는 일에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던 제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기회를 활용하여 천국에 대한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ㄷ)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어린이다움은 유치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순수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린이의 유치함이 아니라 그 순수함을 알아채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받아들인 그 사랑에 대해 기뻐하면서 고마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알아채기, 받아들이기, 기뻐하기 그리고 고마워하기가 천국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이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 천국은 이미 이 현세에 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미쳐야만 생겨날 수 있는 이 우주, 이 지구, 그 지구의 공기와 물 그리고 하늘과 땅이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흔적입니다. 매일같이 지구를 비추어주는 태양은 온갖 에너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땅을 감싸주고 있는 거대한 바다는 거대한 식량자원의 보고입니다. 게다가 땅을 수놓고 있는 산과 들과 숲도 우리가 숨쉴 수 있도록 해 주는 지구의 허파이면서 동시에 온갖 먹을거리를 매일같이 만들어서 아낌없이 내어줍니다. 더욱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온갖 생명이 다 하느님 손길의 흔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게다가 생명체들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낸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인 내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찬미할 수 있음이 기적입니다. 신비입니다. 경탄할만한 일입니다. 알아채기의 단계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와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 나라에 초대받고 있음을 알아챈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내 것이 됩니다. 살아있음이 기쁘고, 사랑할 수 있음이 또한 기쁩니다. 웃을 수 있음이 기쁘고 그 웃음을 나눌 수 있음이 또한 기쁩니다. 받아들이기와 기뻐하기의 단계입니다.
마냥 기뻐하다가도 이 기쁨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면 고마워하게 됩니다. 고마우면 다른 이들에게도 이 기쁨을 느끼게 하고 싶어집니다. 특히 기쁨은 커녕 슬픔으로 나날을 지새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히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이런 이타적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면 신앙은 고약한 화석처럼 변합니다. 내 이익과 내 소망과 내 쾌락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존재하시는 양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감사로운 마음으로 흔쾌히 봉헌하지 못하고 무슨 무슨 조건을 달아서 거래하듯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괴물 같은 신앙인들이 많아지는 교회는 망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이미 지금 그대로의 상태에서 하느님 나라가 와 있음을 알아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해 감사하고 다른 이들, 특히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나라의 기쁨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여러분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주고 난 즉시 여러분이 도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생명의 책에 여러분의 선행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생각으로나 말로 자꾸 생색을 내면 그 공로가 사라져 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경고했다시피, 우상숭배에 빠져 죄를 짓거나, 그 죄의 벌을 후손들에게 전가시키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