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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구원과 인본주의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선, 그리고 죽음과 악을 네 앞에 두어,
16 그 안에서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그분의 계명들과 그분의 규례들과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네가 살고 번성케 하려 함이라.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가 차지하러 가는 그 땅에서 너에게 복 주시리라. (신 30:15~16, 한글킹)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길에서 행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하는데, 이 길을 하나님의 것으로만 가야 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것만으로 가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가미하여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인본주의이다. 이 인본주의는 의지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고 결국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단절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말하는 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신앙인의 생활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생활, 즉 하나님이 목적인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설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왔던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대부분 구호에 그치고 있다. 저들이 개념을 옳게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구호에 그치는 이유는 목적을 지탱하는 수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공급자가 하나님이라면 그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으로 밥상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밥뿐만 아니라 숟가락, 젓가락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거짓신앙의 문제는, 밥은 하나님에게 공급받고 숟가락은 자신의 것을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자신들은 인본주의가 아닌 믿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밥은 깨끗한데 독이 묻은 숟가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공급하지 않으신다. 자식이 쥐약이 묻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그 앞에 밥을 놓아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숟가락을 깨끗하게 만들어서 먹을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영의 원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인본주의에 대한 고찰은 신앙생활 전반에서 성경과 다르게 형성된 모든 것들에서 살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말하는 교리는 물론이고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시작되어 지금은 종교적인 관습으로 굳어진 모든 것들을 색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 귀결에 따라 본질적인 부분에만 치우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을 피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를 논하는 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본질적 부분, 즉 중요 부분의 문제뿐만 아니라 중요 부분 이외의 부분에서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논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교회나 학계에서 인본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들도 인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올무 속의 올무를 보지 못하고 말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을 색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교리의 잘못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 들어와 마치 성경의 내용인 것과 같이 행세하는, 종교적 관습으로 굳어져 있는 세상 것들도 골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1.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된 것들(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된 것들의 내용은 교회사의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작업을 하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아울러 이 내용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에서 인용하여 그 내용이 중복되지만 피하지 않았다. 상세한 것은 ⌜영의 원리⌟를 참고하기 바란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되어 성경의 내용과 다른 모든 것들을 색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인본주의적인 것들을 가려내어 온전하게 성경적 생활을 회복하는 일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 일은 절대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회복하는 방법이 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생활을 복원하는 일이 이 속에 있다.(각주참조)
인본주의에 의해서 가미된 것들을 색출하는 기준은 성경이다. 사도행전 속의 초대교회와 지금 교회의 다른 모습을 찾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였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초대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그 원리를 찾는 것이 정석이라는 것이다.
1-1. 인본주의 사례 1 - 인본주의의 시작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관해서는 복음의 지침에 따라 이렇게들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오는 모든 사도는 마치 주님처럼 영접 받을 일입니다. 그는 그러나 하루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됩니다. 만일 사흘을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본문은 A.D. 100년 경 시리아 지방 어느 시골 교회의 규범서로 사용하였던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는 제호의 ⌜디다케⌟의 내용이다.(각주참조) 본문의 내용 가운데 성경의 내용과 다른 것은 “빵은 받아도 된다.”는 내용이다. 성경에는 떠돌이 사도들에게 빵도 받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막 6:8, 外 각주참조) 이 내용을 살펴보면 속사도 시대에 이미 인간의 생각이 가미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명령은 빵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 이후의 속사도들은 먼 길을 떠나는 사도들을 생각하여 약간의 양식인 빵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각을 덧붙여 가르친 것이다. ⌜디다케⌟의 저자가 누구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기록 속에 성경과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빵은 받아도 괜찮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까마귀를 통해서 먹이시는 하나님을(왕상 17:6, 각주참조) 생각하지 못한 인간의 생각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빵은 받아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교회에 적용한다면, “식사비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각주참조)고 말한다. “빵은 받아도 괜찮다.” “식사비 정도는 받아도 된다.”는 것은 복음의 순수성이 변질된 생각이다. 복음의 변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본주의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지금 기독교의 실상을 보면 사례비를 받지 않고 부흥회라는 것을 해주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성경의 기록과는 무관한 더러운 현실이고 더러운 놈들이다. 성경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인본주의를 따르는 자들이다. 인본주의의 바탕이 사탄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1-2. 인본주의 사례 2 - 침례와 성찬을 약식으로 간소화시킨 것
“세례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세례 주시오. 이 모든 것들을 먼저 말하고 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물로 세례 주시오. 만일, 살아 있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세례 주시오. 찬 물로 할 수 없으면 더운 물로 하시오. 둘 다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부으시오. 세례 전에 부세자와 수세자는 미리 단식하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할 수 있으면 (미리 단식하시오.) 당신은 수세자에게 하루나 이틀 전에 단식하라고 명하시오.”
⌜다다케⌟의 내용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것은 침례에 관한 의식이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한 의식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례의 방법은 온 몸을 완전히 물에 담그는 것이다. 그러나 ⌜다다케⌟의 본문을 보면 이미 이때부터 약식 세례가 등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A.D. 100년경 성경의 기록과 다른 침례, 즉 머리에 물을 묻히는 약식 세례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가려는 인간의 혼적인 근성이 드러난 인간의 생각의 산물인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음의 길은 쉬운 길도 아니고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길도 아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를 살펴보면 침례를 고집하는 교단도 있지만 대부분 약식 세례로 치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침례를 세례로 간소화시킨 것은 대표적인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세례’라는 단어도 인본주의의산물이다. 세례洗禮는 씻는다는 의미이고, 침례浸禮는 몸을 담근다는 의미이다. 성경적 방법은 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가 옳다. 성경에 머리에 물을 뿌리는 약식으로 행해진 세례 의식은 없다. 따라서 지금 교회의 관습으로 굳어진, 물을 뿌리는 약식 세례는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 세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몸을 물에 담그는 침례로 바꾸어야 한다. 요한은 물이 많은 곳에서 침례식을 행하였다.(요 3:23, 각주참조) 여기에 덧붙여, 세례를 받기 전에 행하는 학습문답이나 세례문답도 지극히 형식적인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다면 세례를 안 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행 10:47, 각주참조) 지금 교회가 형식의 극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만찬 역시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지금 교회에서 행하는 약식성찬으로 바뀐 것이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성만찬을 한 끼를 먹는 푸짐한 식사였다. 바울 사도는 “만찬을 먹을 때 다른 사람보다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했다.”고 말한다. 또 “먹으려고 모일 때는 서로 기다리고, 시장하거든 집에 가서 먹으라.”고 말한다.(고전 11:33~34, 각주참조) 이 기록은 성찬이 풍성한 식사였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지금의 성찬과 같이 손톱만한 빵 쪼가리 하나와 병아리 눈물 같은 몇 방울의 포도주가 아니었다. 취할 정도로 마셨고 만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분히 식사였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만찬의 내용이다.
이와 같은 식사가 인간의 생각으로 간소화되기 시작하였다. 1세기와 2세기 초에는 만찬을 “love feast사랑의 향연”로 불렀다. 이레니우스(A.D. 140?-200)는 떡과 잔을 “제사”라고 불렀던 최초의 사람이었고, 떡과 잔이 식사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터툴리안(150/160-222/223) 때부터였다.(각주참조)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즉, 성경적인 방법이 아닐 때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만찬에는 영적인 능력이 함께 하였다.
29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30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 11:29~30, 한글킹)
본문의 내용은 많은 사람이 만찬을 잘못하여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다(죽었다)는 내용이다.(각주 참조)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병들었고 죽었다는 것은 한 끼 식사를 하고 사람들이 병들었다는 것이고, 한 끼 식사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초대교회의 모든 의식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능력이 함께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모든 의식은 단순한 형식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1-3. 인본주의 사례 3 - 성경에 없는 직분들
인본주의 사례 가운데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에 없는 직분들이다. 지금 교회에 있는 권사, 안수집사, 목사, 강도사, 전도사 등은 성경에 없는 직분이다. 이 직분들은 교회 운영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이 가운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목사라는 직분이다. 목사라는 직분은 성경에 없다.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가 등장한 곳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오중 사역인데, 오중 사역 가운데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직분이 목자라는 직분이다. 우선 지금 성경에 기록된 ‘목사pastor'라는 호칭은 성경적 호칭이 아님을 밝혀둔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목사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포이맨poiman'으로, 그 뜻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shepherd'이다. 목사라는 표현이 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의 원뜻은 목사가 아니라 목자라는 것이다. ‘목사pastor'라는 단어는 원래 성경에 없는 단어이고, 번역과정에서 나타난 비성경적인 단어인 것이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그리스도의 영⌟ Part Ⅲ 19.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의 조직들을 참조하라.)
성경이 말하는 목자와 지금의 목사의 역할을 비교해보면, 우선 성경의 목자는 양을 돌보는 사람이다. 양 위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고 양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양의 필요를 채우고 늑대나 이리로부터 양을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 교회의 목사들은 목사직에 대해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갖은 논리들을 끌어들이고 양들과 싸운다. 양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양들을 쫓아내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교적을 정리하고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하는 등 강압적으로 양들을 조종한다. 성경에 없는 직분을 만들어 자신들의 호구지책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 놓고 양들 위에 군림하면서, 양들의 영생에는 관심도 없고 양들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는 양을 돌보는 자이다.
1-4. 기타 인본주의 사례
지금의 기독교는 사도행전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내용이 지금 성도들의 생활과 맞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과 교인들의 생활이 맞지 않는 것을 두고 의아해 한다. 그러면서 나중에 가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40년이 지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말해둔다. 그리고 대부분의 초신자들이 성경의 내용이 삶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만신창이가 된 후라는 것 또한 말해둔다. 거짓 선지자, 늑대 같은 목사들에게 농락을 당한 후에 그 실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이 성경의 기록과 맞지 않는 이유는, 인본주의에 의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하나님과 무관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에 의한 종교적인 형식들로서 지금 기독교에 침투하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단절시킨 사례를 간략하게 한두 가지 더 보기로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배운 자들은(갈 1:12, 각주참조) 누구나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이 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설교의 제한도 없었다. 세례를 주는 것, 성찬을 하는 것 등 모든 제한이 없었다. 그러나 A.D. 39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는 “평신도는 성직자들 앞에서 설교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의해 그 자유함을 박탈당했다.(각주참조) 성직자들 없이는 세례나 성찬 등도 금하였다. 이런 제약들이 이미 2세기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이 가미된 인본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맹위를 떨친다.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1517년 영국의 코벤트리Coventry에서는 다섯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자녀들에게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화형장에서 불태워졌다.(각주참조)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는 것이 죽을죄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초대교회 형태인 가정교회가 완전히 말살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잔재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성경말씀은 신학교를 나온 직업 목사에게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평신도가 성경을 가르치고 공부하면 이단이라고 말한다. 평신도가 받은 계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환경이 아니라 평신도는 성경을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 환경의 대부분이다. 이런 분위기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의 환경이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말하는 지금의 목사들의 말은 궤변이고 양들을 노략질하는 속임수인 것이다.
다음은 성직자 가운에 대해서 말하겠다. 교회 속에 들어와선 안 될 것은 이교의 풍습과 전통이다. 교회에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입는 목사들의 가운, 즉 성직자 복장은 구약의 제사장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레코 로만Greco-Roman의 세속적인 의상에서 유래했다.(각주참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A.D. 150?-215)는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더 나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역자의 의복은 단순하고 흰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참조) 흰색은 수세기동안 성직자의 색깔이었다. 흰색이 성직자의 색이 되게 만들었던 관습은 “흰색은 신들의 색깔”이라고 주장한 이교 철학자 플라톤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각주참조) 이 사상에 충실히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50/160-222/223)은, 둘 다 염색한 옷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각주참조) 속사도 시대에 이미 성직자를 구별하는 의상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제롬(342/345-420)의 경우는 성직자가 평상복을 입고 성소에 들어가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각주참조) 이렇게 이교 사상에 의해서 자리 잡게 된 성직자 의상은 5세기 이후로는 감독들이 자주색을 입게 되었고, 6세기와 7세기에서는 특별한 예복이 보편화되었다.(각주참조) 7세기와 8세기에 와서는 예복이 구약의 레위 제사장의 의복을 물려받은 신성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의 이교 관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한 비성경적인 행위였다. 성직자의 역할을 구약으로 보면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의 역할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정해진 의복이 없었다. 그 예로,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 요한은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는(마 3:4, 각주참조) 것을 생각한다면 저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세기 무렵에 와서는 성직자들이 평상시에도 사람들과 구별되는 평상복을 입기 시작했다.(각주참조)
종교개혁 이후로 성직자 예복 대신에 학자들은 검은색을 택했고, 검은 복장은 곧 개신교 목사들의 의복이 되었다. 루터교 목사들은 검은색의 긴 가운을 입고 다녔고, 그들은 둥근 칼라를 목에 두르고 다녔다. 17세기에는 이 칼라를 “연자 맷돌 칼라the millstone ruff”라고 불렀다. 루터교의 일부에서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19세기에 와서는 검은색의 칼라와 넥타이를 사용했고, “dog collar”라고 불렸던 성직자용 칼라를 둘렀다. 성직자용 칼라의 기원은 18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가톨릭의 고안품이 아니라 성공회에서 나온 것이다. 이 칼라는 빼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 칼라를 빼서 평상복 위에 걸치고 다녔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어떤 개신교 목사들도 성직자용 칼라를 두르는데, 자신이 성직자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각주참조) 이상 성직자 의상의 개략을 보았다.(각주참조)
2. 인본주의 신학과 구원
인본주의가 지금 교회에 종교적인 관습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견고한 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정리한다.
• 침례가 약식 세례로 간소화된 것
• 세례식 전에 학습문답이나 세례문답이 있는 것
• 유아 세례를 행하는 것
• 목사, 권사 제도가 있는 것
• 성직자 의상이 따로 있는 것
•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한 것
• 성가대가 있고 교회 음악이 있는 것
• 성경은 목사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
•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지키는 것
• 성경에 없는 수많은 헌금 항목으로 헌금을 강요하는 것
• 가정교회가 사라지고 교회가 대형화된 것
• 교회의 의사결정에 있어서 다수결의 원칙을 택하는 것
인간이 창시자인 종교는 종교로서의 미덕이라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잘못 사용하고 그 속에 악한 영인 사탄이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뒤틀린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부패할 때 냄새가 심한 것과 같다. 기독교가 부패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부패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패할 경우 다른 종교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악랄하고 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독교의 부패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기독교가 썩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지금 교회는 신학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신학은 기독교를 종교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세워놓은 교리의 이론적 체계로서 인본주의 산물의 전형이다. 교회가 신학의 바탕위에 서있다면 교회가 인본주의라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인본주의의 바탕이 사탄이라는 것은 학자들 누구나 인정한다. 또한 사탄이 근원인 인본주의에 구원이 없다는 것도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공지사실이다. 결국, 스스로 사탄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신학 속에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에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형식적인 이론과 논리에 의존하지만 신앙은 형식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한다. 성령의 능력은 이론적 지식의 탐사가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다.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이 이론뿐인 신학은 성령의 능력 앞에서 그 무능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과 교감되는 생활이다. 이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지금도 사탄의 방해가 있고(살전 2:18, 각주참조) 병든 자들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며(행 5:16, 각주참조)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전 12:31, 각주참조) 그러나 신학에서는 이런 신앙의 체험을 다루지 못한다. 그 이유는 신앙의 체험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영역이기 때문에, 즉 인간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차원이기 때문에 하등차원이 고등차원을 이해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신앙의 체험은 분해해서 이론적으로 정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분해 수리를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세분해서 하나님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변증학이고 신학의 기본적인 생각인데, 지금까지 기독교 변증학으로는 하나님을 입증하지 못했다. 기독교 변증학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경험되는 영적인 체험은 개념을 정리하는 것조차도 어렵다. 따라서 신앙의 체험은 연구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야이다. 하나의 예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타지 않는 모습을 보게 하시면서 모세를 부르셨다.(출 3:2, 각주참조) 이 방법은 모세 이후에 어느 누구에게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실 때는 같은 방법을 두 번 쓰시지 않는다. 그래서 각자가 체험한 하나님이 모두 다르다. 각자가 다른 체험을 획일적인 틀 속에 묶어서 통일된 개념을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이 한마디 외에는 어떤 다른 말로도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학자들의 연구 노력은 눈물겹다. 그러나 피나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들이 원하는 정반대의 결과들을 보면서 내뱉는 한숨 섞인 진술은, 성경이 학문적인 이론의 결집이 아니라 영과 함께하는 체험의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을 침통하게 만든다. 이들의 연구는 결국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 이상이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이들도 영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의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아는 바도 없지만 이론적으로 접근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비 속에 들어가서 그 체험을 한 사람은 바울이 말한 것이 맞다고 동감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는 지점, 즉 신앙의 체험에 의한 하나님의 실존은 이론적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체험적인 사실로는 증명이 가능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신앙의 체험이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신앙체험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그 실체와 함께한다는 것을 체험적 사실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기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실체이고 살아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경험하지 않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왜 기독교 변증을 사기라고 말하는가?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사기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세미나 대상도 아니고 증명의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의 증명은 하나님 스스로 하신다. 사자를 변호할 필요가 없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주변에서 안다.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질 때 이집트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80살의 늙은이 하나를 보내어 장정만 60만 명을 데리고 나올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이제 학자들은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되지도 않는 얄궂은 짓들을 그만두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떠드는 사기꾼 같은 목사들도 이제 그 짓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어디에 설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늪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의 문제에 직면했다. 학자로서 세상적인 대접과 명예를 누리다가 지옥을 갈 것인가, 아니면 신학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을 이 글을 보는 학자들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되어져간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38년 된 병자가 침상을 메고 갈 때 증명된다. 허접한 말장난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생활에서 눈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증명된다. 알 수도 없는 이론을 만들어서 개념 속에 개념을 만들어 설명하는 염병들을(각주참조) 그만두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의 이단 시비가 신비주의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신비주의가 이단 시비를 몰고 온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사탄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오인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영을 분별하는(빌 1:10, 각주참조) 분별의 능력의 흠결에서 발단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영역에서 일할 때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할 주의사항이다.
이 글을 대하는 공동체의 지체들과 의식 있는 성도들에게 권한다. 신앙생활은 성경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학자들은 신앙에 관해 어떤 것도 밝혀낼 수 없다. 구원을 얻는 신앙생활은 혼합주의를 벗어난 순수함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 이방 철학인 헬라 철학이 뒤범벅되어 있다. 이 속에서 유대교의 인본주의와 헬라 철학의 혼합주의를 솎아내고, 신비주의를 걸러낸 순수한 하나님주의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학자들은 결코 분리해 낼 수 없다. 이론만 늘어가고 혼잡해질 뿐이다. 기독교는 순수한 하나님주의에 터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공동체 지체들은 신학이라는 늪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신학이라는 늪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육신의 생명을 마치고 음부로 내려갈 때, 그제야 사탄의 계략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코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결
성경적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비주의와 인본주의를 걸러내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주변의 교회나 기독교들은 좌로나 우로 치우쳐 있는 자들로서 우리를 양옆에서 유혹하는 자들이라는 것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회라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구원을 얻었던 초대교회는 어떤 제약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떤 것도 조종이나, 통제, 억압, 강요 등을 행하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탄의 요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교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종과 통제, 억압과 강요가 판을 친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세상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성경적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과 인격적인 소통이 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영의 원리를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가를 살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회복시리즈 08. 성경적 구원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그동안 헝클어져 가닥을 추리지 못했던,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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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 (http://cafe.daum.net/onlyjesus1924) 카페에서 강의영상을 꼭 보세요.
간증들도 읽어 보시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만나주시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만나서 성경 속의 인물들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이젠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생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영혼구원의 문제를 내일로 미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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