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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 목단강지역 항일독립운동사적 보존회 원문보기 글쓴이: Phogrho
韓民族의 정신과 서일의 항일투쟁
1. 한민족의 정체성
2011년도 연변에 왔을 때 사단법인 『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 약칭 ‘후사모’의 활동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후사모는 자원위기, 환경위기, 전쟁위기로부터 지구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참가치관을 가진 후대를 길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으며, 어느 특정 지역,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NGO로서 사람이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에는 후대를 위하여 살고, 봉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모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홍익인간 문화의 건설이 매우 시급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지금 후사모가 사명감을 가지고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홍익인간 정신문화의 실천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단군, 고조선을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우리민족의 중심철학인 홍익인간 정신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오랫동안 단군을 민족과 역사의 공동시원으로 생각해왔고 단군이 있음으로 해서 한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으며, 외침에 대항하여 자기의 독자성과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동질적 정체인식을 ‘단군민족주의’라 부르며 단군민족주의는 민족운동사와 근대화운동사를 통하여 자주독립과 통일 및 근대화를 향한 동력을 조성하는 주요 원천으로 기여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단군의 조선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을 4대 국경일의 하나로 정하고 단기년호를 정부의 공식 년호로 제정하며, 홍익인간이념을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채택했던 것은 단군을 매개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동체통합과 중흥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래사상의 유입 등으로 민족적 통합의 기제로 기대하였던 단군의 역할과 위상이 크게 흔들렸다. 사대사관, 식민사관 등의 영향으로 우리민족의 주체적인 전통사관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인식이 혼란에 빠짐에 따라 상고사논쟁이 끊이지 않고, 최근에는 일부 종교단체에서 국조 단군상을 ‘우상’이라 하여 훼손하는 안타까운 일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은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으며, ‘국학원’과 ‘국학운동시민연합’ 등 NGO단체에서 바른 역사 보급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단군민족정신이 성할 때는 나라도 강성했으며, 단군민족정신이 쇠하면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또한 나라가 고난을 당할 때는 단군민족정신으로 뭉쳐 국난을 극복하였으며, 가장 최근 일본의 침략에서도 이 정신으로 온 국민이 뭉쳐 일본과의 항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2. 서일의 대일항쟁과 구국정신
대일 무장투쟁을 선도하며 강력한 단군민족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를 만들어 청산리전역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서일이었다. 그는 19세기말 평범한 삶을 살다가 20세기 초반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온 몸을 바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 총재였다. 그는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11년 북간도로 건너가 항일단체인 중광단을 만들고, 대종교를 만나면서 대종교도가 되었다. 그의 스승인 나철 대종사의 죽음이후 서일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돌입하였다. 1918년 이른바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일본과의 선전포고와 다름없이 한민족의 대일 무력혈전을 촉구하였다. 이때부터 서일은 정치적으로 순수한 대종교도가 아니었다. 비록 대종교를 신봉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단군민족주의의 지도자로 변신해있었다. 그는 단군민족주의로 철저하게 무장된 강한 군대를 만들어 일본과의 정규전을 통해 조국 광복을 쟁취하려 하였던 것이다.
가. 간도지방에서의 항일투쟁기반 조성
서일이 대일 무력항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간도 일대를 택한 것은 이미 많은 한인들이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는 역사적으로 우리 선조들의 활동 무대였으며 지리적으로도 압록강,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어 항상 우리 민족의 향수와 관심의 대상 지역이었다.
한편 1860년대에 조선왕조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조선 북부 지방에 연속되는 자연재해로 인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많은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넜으며, 청나라는 늘어나는 도강자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
1910년 한일 병탄한 후 한인들의 북간도 이주는 급속히 증가되었다. 일본에 토지를 수탈당한 농민들과 잔혹한 武斷統治로 항일운동이 극도로 탄압받자 수많은 항일애국지사들은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겨갔다.
당시 일본 통계는 북간도내 韓人數가 1920년 28만 9천여 명에서 1922년에는 32만 4천명에 달해 북간도 총인구의 82.2%를 차지하였고,『독립신문』은 1920년대 초반에 이미 60만이라고 보도하였다.
한・중 양국이 나라를 세운 역사는 모두 5천년에 이르며, 『朝鮮古記』, 『吳越春秋』 등 사서에서도 양국인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며 서로 돕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광식은 『天鼓』에서 韓・中 양국의 산과 강들이 서로 마주 향하고 있어, 양국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지도책에서 한국과 중국의 山水를 보면 조선의 압록, 대동, 백마, 섬진과 같은 큰 강과 기타 작은 물길이 모두 중국을 향해 서쪽으로 흐르고 있다. 중국의 양자강, 회하강, 황하, 한수 등의 큰 강과 기타 여러 지류들은 모두 조선을 향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한중 양국의 산맥 또한 그러하여 마치 서로를 향해 나아가려 하고 서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것이 한중 양국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표징이자 하늘이 명한 바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우리민족과 친연관계가 있는 북간도 지역의 한인 사회 형성은 서일이 항일투쟁 근거지를 마련하는 데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다.
나. 서일의 대일항쟁 전략
서일은 일본의 무력침략에 대응하여, 일본과 전쟁을 결행함으로써 조국광복을 쟁취하겠다는 것이 대일항쟁 전략이었다.
(1) 교육을 통한 항일전략
서일은 고향에서 7~8년간 교육 계몽사업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건너가서 1913년 5월 왕청현 덕원리에 창설한 명동학교를 비롯해 중광단에서 설립한 10여개의 학교를 통한 청년 동지들의 민족정신 교육에 매진하였다. 또한『一民報』와 『新國報』라는 순수 한글신문을 발행하여 재만 동포들의 광복의식을 고취시켰다.
(2) 사상과 종교를 통한 항일전략
서일은 조국 광복을 이끌만한 실력 있는 인재양성을 위해 청년동지들을 대상으로 교육 계몽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대종교의 단군신앙을 통해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일심단합으로 일본의 침략마수를 물리쳐서 조국의 쇠운(衰運)을 만회하려 하였다.
(3) 무장투쟁 전략
서일의 무장투쟁 시도는 강력한 군대양성이 절실 하였다. 그는 항상 사단규모 이상의 정규군을 만들어 일본과 정규전을 치르고 싶어 했으며, 따라서 군사전문가의 확충을 위해 서일은 김좌진, 조성환, 김규식, 이범석 등을 영입하고 사관연성소를 만들어 강한 군대를 양성하게 되었다.
다. 무력항쟁의 준비
서일은 먼저 중광단을 기반으로 가장 막강한 군대를 양성하였다.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서일은 전면적으로 일본과의 투쟁에 들어간다.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당장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였는데 이 군대를 운용할 수 있는 세력 중 가장 큰 세력은 서일이었다. 서일은 상해임시정부의 군무총재로서 명실상부하게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총괄하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런 정국의 흐름은 서일이 한 종교단체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적인 지도자로 거듭나게 하였고 그에 걸맞은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그는 중광단에서 정의단으로, 정의단에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면서 1919년 8월 7일에 발표한 격문에서 한민족이면 누구나 대일혈전을 준비하는 데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천하의 공적(公賊) 일본을 토멸코자 하는데 국민 된 도리로써 때를 놓치지 말고 각자가 가진 재능과 재물을 능력껏 내놓아 힘을 모으자는 것인데 이러한 서일의 절절한 호소력은 피 끓는 젊은이들을 정의로운 항일 구국성전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하였다.
이렇게 서일의 투쟁 목표는 조국의 국권 회복에 있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정신은 중광단 조직에서부터 대한군정서에 이르기까지 10년에 걸쳐 일관되게 이어졌다.
(1) 군자금 모집
대일항쟁의 관건은 군자금 확보 문제였다. 대한군정서는 병력 확대, 무기 장만, 핵심 군사 양성이란 세 가지 과업에 중점을 두고 이에 따른 식량, 군수품(軍需品) 등의 조달을 위하여 막대한 군자금(軍資金)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군정서 산하에 모금부대를 두고 간도지역 동포로부터의 징수금과 기부금 및 국내에서의 募捐金 등으로 조달하였다. 또한 자유공단이라는 단체나 동원단의 도움을 얻었을 것이다.
이러한 군자금 모집을 통하여 충분하게 다량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군량은 약 4~5개월분 이상을 비축하고 있었다.
(2) 무기 확보
대한군정서는 1920년 초에 약 20만 원 가량의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서일은 전문 병력 확대와 무기구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무기는 직접 체코 군대와 러시아로부터 구입하였으며, 체코군이 가지고 있던 신식 무기를 대량으로 판매하여 한국군대의 항일 무장투쟁에 큰 힘이 되었다. 청산리전투 당시 대한군정서의 군사력은 군사 1,600명이며, 무기류는 군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이었다.
라. 대일 전쟁 개시
1919년 3․1항쟁 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간도에 무장 세력을 키우며 전쟁준비를 하는 것이 일본에 모두 포착되었으며, 더구나 1920년 6월 삼둔자와 봉오동의 추격전에서 연패한 일본은 북간도 지역 항일단체의 토멸에 혈안이 되었다.
일본군은 중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면하고자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마적단이 북간도의 혼춘을 습격하는 사건을 조작하고, ‘마적단 토벌’을 빌미로 일본군은 2만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하여 간도 일대를 공격해 들어 왔다.
9월7일 무기 구입 차 출타하였던 총재 서일(徐一) 일행이 본영으로 돌아오고, 일본군이 침입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대한군정서는 이동 준비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9월 9일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서둘러 거행하였다.
서일은 대한군정서 부대를 ‘동부’와 ‘서부’ 2개 전선으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서부 전선에 소속된 1,000여 명 주력부대는 선발대와 본대로 나누어 십리평 잣덕 본부를 떠나 화룡현 삼도구 심산 속에서 추격하는 일본침략군을 일망타진하기로 계획했다.
(1) 서부전선의 전투
청산리독립전쟁(1920.10.21.~26)으로 알려진 서부전선전투를 구성하는 일련의 전투들 중에서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등은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이고, ‘어랑촌전투’와 ‘천보산전투’는 대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연합부대가 공동으로 수행한 전투이며, ‘완루구전투’와 ‘고동하곡전투’는 홍범도연합부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이다.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대변지『독립신문』은 “김좌진 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 씨 부하 300명은 대소전쟁 10여회에 걸쳐 왜병을 1,200여 명 사살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현실은 백운평전투만 집중 조명되고 실제로 가장 큰 전과를 올리고 모든 부대가 참여한 어랑촌전투 및 기타 다른 전투는 부각이 되지 못했다.
(2) 동부전선의 전투
동부전선의 혼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혼춘민회, 신민단군,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나자구의사부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원기지에서는 서일이 동부전선에 속하여 직접 대한군정서 후방부대를 이끌고 동으로 움직이며 기회를 보아 적들과 조우전을 벌이면서 새 근거지 창설에 진력하기로 하였다.
동부전선은 일본군이 획분한 토벌지대로서 이 지구에 나남주둔 제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3개사 사단의 일부병력을 합해 1만여 명을 투입했다. 우리 항일무장대의 병력은 북로군정서 유수부대와 군무도독부・신민단・의군부・나자구의사부・춘한민회 등 800여 명이다. 이들 동부전선의 항일부대들은 서일 등의 지휘 하에서 10월 23일의 왕청현 십리평전투를 시작으로 왕청현나자구・노무주하・장가점・하마탕・혼춘현삼도구・우두산・소수분하・팔가자 등 수차의 전투를 펼치며 많은 적들을 소탕하였다.
동부전선은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첫째 이곳은 반일부대들의 원래 근거지여서 민중들의 반일정서가 높고 조직화 되어있다. 둘째 露中 변경지구로 항일단체들이 항상 왕래할 수 있고, 셋째는 항일부대들이 노령과 연계하여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후방 기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침략군은 동부전선에 1만여 명을 투입하여 항일부대를 토벌하고 기지를 파괴하여 서부와 연결을 단절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일 총재의 동부전선 전황은 더 어려웠을 것이다. 즉, 서부전선은 대한군정서 정예부대와 연합부대 병력 1~2천 명에 일본군은 5천명 정도가 싸웠으나, 동부전선은 항일무력부대 전체 병력이 800여명인데 비해 일본군은 1만 명이나 되었으니 항일부대들이 받은 압박과 어려움은 서부전선보다 더 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동부전선의 전투들이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그 의의는 적지 않아 대표적으로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대부분 전투는 은폐하고 있다가 적을 기습 공격하는 전법 과시
둘째, 적을 타격하여 적의 토벌계획을 혼란시켰다.
셋째,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항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잠복을 엄호하였다. 따라서 서부전선 항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켰다.
넷째,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였다.
(3) 한국군의 전승 이유
① 대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민족정신으로 무장하고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용전태세로 적의 志氣를 압도하였다.
②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양호한 진지를 先占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 성능을 극도 발휘하였다.
③ 應機隨變의 전술과 정확한 척후활동, 주민을 활용한 기만작전, 적시에 치고 빠지는 연합부대와 유기적인 작전 등 탁월한 지휘능력
④ 재만한인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砲雨 속에서도 부녀자들의 주먹밥 운반 등은 독립군 장병들의 士氣를 더욱 충천하게 하였다.
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충분한 군자금 확보로 체코군대와 러시아로부터 구입한 세계수준의 신무기의 성능이었다.
(4) 서일의 구국정신
서일이 설계한 ‘단군민족정신’은 국난을 극복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오늘날 한반도의 분단정세를 풀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며, 세계에 흩어져 있는 700만 재외동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서일이 주장하였던 단군민족주의의 근간은 바로 ‘홍익인간’ 정신이다. 이 홍익인간 정신은 한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인류에 적용되는 상생의 원리로서 인류평화의 정신인 것이다.
3. 서일 정신의 계승을 위한 제언
서일이 남긴 위대한 족적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빛나야 하고 그 정신은 후대로 면면히 이어져야 하지만 지금껏 그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철기 이범석은 서일이 모든 면에서 훌륭한 인물이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민족지도자로서의 인품에 감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고 목숨 받쳐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길에 나섰지만 우리는 서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서일이 후손이 없어서도 아닐 것이며, 다만 우리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홍범도는 우리에게 새겨져 있고, 서일의 수하 제자인 김좌진은 북극성처럼 빛나지만 서일은 그저 은하계 저편의 희미한 별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우리는 서일을 제 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는 대종교의 지도자가 아닌 대한민국의 기초설계자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고, 그의 살신성인한 구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따라서 서일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의 중요한 요인은 연구자들의 연구가 미약했고, 또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들은 일본이 철저하게 소멸시켰기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1차적으로 그의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였던 길림성,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발굴해 내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과 나아가 서일기념관 설립 사업이 추진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후대에 참가치관을 심어주고 한민족의 정신인 홍익인간 문화를 선양하고 있는 후사모의 활동을 한국에서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