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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0,17-24
진정한 휴식은 언제 시작되는가?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와 자신들이 체험한 놀라운 일들을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며 자랑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시며,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쨌든 복음을 전한 뒤의 쉼은 꿀 같은 기쁜 일입니다.
이들은 진정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휴식을 잘 취합니까?
주말에 온종일 자고 나면 몸이 개운한가요? 물론 몸은 그럴 것입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면 기쁘신가요?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완전히 개운하고 기쁜 휴식을 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안식’, 즉 ‘휴식’은 이런 쉼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휴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고생합니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녀를 키우고, 자녀가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인정받으려는 근저에는 자신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를 부모가 다 채워주면 좋겠지만 사실 부모에게도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또한,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더라도 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일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휴식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휴식을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했던 것일까요? 아버지에게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여 이민 가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형에게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휴를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이무석 교수를 아버지처럼 여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심지어 증오하였습니다.
어느 날 휴가 만나자고 하였을 때 이무석 교수는 휴가를 간다며 그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상담자가 이렇게 자신의 정보를 흘려주지 않는 이유는 내담자가 상담자에게서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사 시켜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자신이 더 잘 보이는 법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도 이 교수처럼 휴가를 떠납니다.
휴가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이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휴는 이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무석 교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아버지를 투사하여 함께 박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꿈에 아버지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마리 개가 나왔습니다.
그 개는 점점 커져서 소파의 수십 배 크기가 되었습니다.
소파는 아버지를 상징하고 개는 자신을 상징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개로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소파보다 커 버린 자신은 더는 소파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휴식의 시작입니다.
사탄이 사는 곳은 어딜까요? 지하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늘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세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세는 나를 쉬지 못하게 만들고 인정받고 싶게 만드는 누군가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될 수도 있고, 그 부모를 투사시킨 누군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조금 사랑하다가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줘야 했지만 사랑해주지 못한 데 대한 분노가 그 사람에게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다가 갑자기 미워한다면 그래도 사랑해주십시오.
그 사람은 나를 누군가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야 그 사람을 고생시키는 바로 그 권세도 함께 못 박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할 수도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모든 애증의 대상을 투사하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하면 그 산을 넘어 에덴동산을 만나게 됩니다.
그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를 고생시키는 모든 하늘의 권세가 함께 못 박힙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잘 보일 필요가 없어질 때, 나는 참된 휴식, 참된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하는 미움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에게 투사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5일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0,17-24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 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 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강론>
(2024. 10. 5. 토)(루카 10,17-24)
<생명의 책>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17-21)”
1)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제자들은 기뻐하면서 예수님께 활동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교회는 기쁨의 공동체’ 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이 ‘기쁨’은 세속의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기분 좋은 상태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순수하고 참된, 영적인 기쁨’입니다.
세속의 즐거움은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나 희미해지는, 허무한 것이지만, 신앙인의 ‘참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기쁨을 누리는 생활인데, 아직은 미완성 상태이고,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2) 여기서 “영들이(마귀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라는 말씀은, 기뻐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교만에 빠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낸 다음에 그것을 기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기쁘니까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원천은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착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가게 됩니다.
사도들은 그런 일을 이미 겪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았고(마르 6,7), 많은 마귀들을 쫓아냈던 사도들인데도(마르 6,13),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마르 9,18).
그때 사도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라고 물었고(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르 9,29).
사도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귀는 하느님(예수님)에게만 복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내려고 한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8-31).”
3)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라는 말씀은, 어떤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만족하지 말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것’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뜻이고, 이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묵시 20,12-15).”
‘생명의 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록은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름이 한 번 적히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이름이 적히기도 하고, 적힌 이름이 지워지기도 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묵시 3,5).”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니까, “신앙생활은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책에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주님의 권한’이지만,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그 책에 내 이름을 적거나 지우는 것은
사실상 나 자신이 하는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