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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이거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 아무래도 도움은 커녕 주눅들어 모두들 나자빠지게 만드는 것 같아...' 조 편집장과 통화를 했다. 조정은 선생님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스스로 '브레이크 댄스'까지 추게 만드는 내공의 소유자다. 개인적인 일로 너무 바빠 까페에 드나드는 것도 소원하던 나에게 몇 마디 청한 것에 무심코 응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냥 신입회원 작품방에 들어가 적당히 작품(이랄 것 까진 없겠지만) 읽고 몇 마디 댓글 달아주고 말려 했다. 그런데 이 놈의 성격이 문제였다. 매사에 결벽증이 있다고 해도 부정하지 못 할 정도로 뭔 일을 하면 얼렁설렁 하는 성격이 못 되다보니 결국 내 발에 접릴려 넘어진 꼴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그냥 댓글란에 몇마디 쓰려 했는데 쓰다보니 300자 댓글 너뎃개나 넘어 갔고, 가만히 살펴보니 그걸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글을 올린 분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것 같아서 모두 지워 버렸다. 그래도약속은 지켜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고심 끝에 한 분의 글을 한글 파일에 옯겨 최대한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지적사항을 썼다. 장장 세 시간이 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작품의 아래 올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개적으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 성격대로 (나는 비록 내가 잘 나지 못하더라도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칠 때는 그야말로 독설에 스파르타 식이다)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거슬렸다.
결국 개인적으로 자원하는 분에 한해 지도?(랄 것 까지는 없고 조언 정도는 될 것이다)를 해 주기로 했다. 물론 지면이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여 완곡하게 하기로 했다. 네 분이 의뢰를 해 왔다. 나는 그 작업을 위해 그 한주는 아이들 밥 챙기는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는 짬봉 시켜 먹고 하루는 냉면, 하루는 밀면 이런 식으로 저녁을 사 먹었다. 그래봐야 퇴근 후에 대충 저녁을 챙겨 먹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난 뒤 컴퓨터에 앉으면 열시가 넘어서야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작품을 읽고 이것저것 글을 달면 늘 열두시가 넘었다. 몇 곳에 글을 내야해서 작업중이던 내 개인적인 작품활동은 포기해야 했다.
적어도 신입회원 중에는 누군가가 그렇게 해 주기를 원한다고 들었기에 내가 총대를 멘 것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내가 정성을 보이는 것을 느낀다면 그 어떤 것보다 수필을 쓰려는 분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 믿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을 것이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과연 몇 분이나 호응할까? 글쎄....한 열 분 해 주면 한 두명 정도?' 그랬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은 그저 재미삼아 올린 분들이 많을 것이기에 그런 분들은 나의 코멘크를 받고 나면 대부분 지레 나가 떨어져버릴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그래도 단 한 분이라도 나의 순수한 마음을 알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충분한 명분을 얻은 셈이니까 이후로 다시 이런 문제가 재기되어도 할 말은 있게 된 셈이지...'라는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분명한 것은 수필가가 된다는 것이 무슨 대단한 감투는 아니라는 것은 늘 생각해 온 바였다. '수필의 대중화'라는 기치는 수필가들의 모임에서 늘 오르내리는 화두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정작 그를 위해 소위 우리 수필가라는 사람은 얼마나 진지하게 대중에게 다가가려 했었나? 솔직히 말하면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이 정도로 하고, 네 분이라. 초기라서 그렇겠지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 그래도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첨삭본을 보내고 나서 다시 내게 글을 보내온 분은 단 한 분 뿐이었다. 이 글을 어제 그 분과의 만남 후로 바로 써 올리려 했으나 그 분이 그 동안의 과정을 '신입화원 작품 방'에 올리겠다고 하여 먼저 밝히기 전까지 기다렸다가 지금 쓰는 것이다. 그 분은 '무설자'라는 닉네임을 쓰는 '김 정관'이라는 건축가이다. 이후의 과정은 그 분이 올린 글에 소상히 나와 있다. 세 번 쯤 하다 보니 글로는 지도를 하기 어려운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마침 그 분이 동향인 부산 분이란 것과 그 분의 사무실이 내가 출퇴근 하는 길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제의를 흔쾌히 여겨 그분이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토요일 오후...유일하게 내가 쉬고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때가 아니면 그 분과 만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 날은 놀토라고 했다. 나와의 만남을 위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하필 그 날은 퇴근 길에 머리를 깎아야 할 날이었다. 일부러 20분 정도 일찍 약국문을 닫고 퇴근 길에 이발을 하고 차를 대 논 뒤 여분의 수필 책 몇 권을 가방에 쑤셔 넣고는 바로 택시를 타고 사무실로 갔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그 때가 저녁 다섯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선생은 나보다 네 살 위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좋아보였다. 사무실 안 테이블 위에는 내가 미리 준비해 놓으라는 선생이 나의 조언을 네 번이나 받고 고쳐 쓴 작품 두 질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에이 포 용지 였고 다른 하나는 그 두 배 크기의 종이에 큼지막하게 복사 해 놓았다. 잘 보이게하고 첨삭을 달기 쉬워라고 그렇게 해 놓았다고 했다.
작품을 공부하기 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은 의외로 오랜 기간동안 글을 많이 써 왔던 분이었다. 물론 그것이 수필작품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산문형식의 글을 전문지에 기고도 하고 당신이 몸담고 있는 절의 정기간행물? 같은 곳에 고정적으로 기고도 하는 등 의외로 '내가 이래뵈도...'라는 정도의 이력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는 된다고 했다. 우연히 에세이스트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별반 반응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신입회원 작품방에 글을 올리면 적어도 수필가라는 분들이 읽어주고 몇 마디 코멘트라도 해 주길 간절히 원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조금식 그 열기가 식어갔고 급기야 실망?의 단계에 이르게 되엇는데 바로 그 순간에 우연히 내가 그곳에서 그런 일련의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글을 보냈고 그 답변을 받아 본 순간. 두 가지 심정이 교차했었다고 했다.
그 하나는 그 동안 내 글을 다른 곳에 실으면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선생은 보이차 애호가셨다. 당신의 말 대로라면 관련 까페에 글을 올리면 엄청난 반응이 온다고 했다. 그 외에도 충분히 어깨를 으쓱 할 만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 주었다.) 나의 글을 보고는 완전히 그런 자신의 글 실력이 제대로 짓밟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글을 찬찬히 읽어 보니 구구절절 틀린 말이 없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글쓰기, 나아가 수필을 쓰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들었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어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고 생각했고 일단은 내가 일러준 대로 답습해 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으로 이뤄진 만남은 자리에 마주 앉자 마자 선생이 연신 끓여주는 보이차를 십 수 잔 마셔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 사이에 작품 공부도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갖춰진듯한 그 작품을 가지고 8월에 있을 부산 천년약속 글공부 시간에 제출하여 여러 다른 선생님들의 조언을 들을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처음 모임에 참석하는 분은 자신의 작품을 내는 경우는 드물고 그저 관망만 하는 정도인데 내가 꼭 그렇게 되도록 추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전히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르고 선생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하자'고 해서 문득 시계를 보니 열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부랴부랴 정리를 하고 근처 식당을 가니 아뿔사! 이미 식당이 영업을 끝낸 상태였다. 할 수 없이 근처의 '가야공원'에 있는 '오리고기 집'으로 갔고 (선생이 직원과 즐겨 찾는 곳) 늦게나마 저녁을 먹으며 또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이 식사를 샀다. 사실 나는 그날 저녁을 내가 사려고 했다. 조금 도움을 줬다고 하여 내가 저녁을 얻어 먹으면 결국 생색 낸 꼴이 되는 것 같아 그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사코 그럴 수는 없다는 말에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내가 사기로 하고 잘 얻어 먹었다. 그 뿐 아니라 귀한 '보이차'한 곽과 차를 달여 먹을 수 있는 포트가지 선물 받았다. 뭐 나도 책 몇 권 드리긴 했지만 그건 순수하게 '수필을 좋아하는 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린 것이지 댓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김 선생님도 나름의 감사의 표시를 한 것으로 알지만 참 고맙게 생각한다. 덕분에 밤 늦게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귀한 차를 내밀어 그날 저녁을 차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체면치례는 한 것 같다^^;;(고마워유~~~)
사실 나는 행복했다. 자신의 글을 많이 읽어 주는 것이 수필가에게는 가장 행복한 일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노력이 결실을 보는 것 같아서 기뻤고, 수필을 제대로 알고 사랑할 수 있는 한 분을 알게 된 것이 너무 좋았다. 색다른 경험이었고 참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김 선생님과의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쭉 좋은 관계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아직도 나의 제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김 정관 선생님과 같이 지리적인 관계나 그런 것이 우연 치고는 매우 특별한 상황에 못 미칠지는 몰라도 많은 분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적어도 수필을 제대로 쓰고자 하고 훗날 수필가로 등단을 생각하고 있다면 ) 문을 두드리길 바란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만큼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문은 열릴 것이다. 아울러 저의 순수한 호의를 받아들여주신 김 정관(무설자)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필하십시오~~~.
2010. 07. 25 23 : 06
개똥이 김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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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병기 선생님, 요 얼마 사이에 내가 광팬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냐하하 고마운 말이지만 류 샘이 제 팬이 될 수 있습니까 그냥 함게 가는 도반이죠 어쨌거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샘도 주위에 수필을 좋아하는 분이 계시면 적극적으로 한 번 해 보십시오. ^^''
두분 참 멋지십니다.
김 태조 선생님도 어서 절 괴롭히세요 ^^;;
지도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지도를 해주신다는 것이 참 귀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쁘게 사시는 분이 쉬어야 할 그 저녁시간을 글을 보낼 때마다 서너 시간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평을 내려주시는 방향에 따라 글을 바꾸고 다듬으니 좋아지는 것이 바로 느껴집니다. 이런 귀한 가르침의 자리에 많은 분들이 동참했으면 합니다. 지도를 해주신 김병기 선생님께도 감사드리고 이런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열린 자리인 에세이스트에 박수를 보냅니다^^
김병기 샘 저도 부산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김샘의 진심어린 조언 귀기울여 듣고 싶습니다. 두 분의 열정에 박수를...
이게 다 조 정은 쌤이 중간에서 농간?(너무 심한 말인가...ㅎㅎㅎ 대충 이해 하시겠지 뭐...^^) 때문이쟈...흐흐흐
김병기샘 좋은 일 하고 계시네요.
무설자님과의 연 경하드립니다.
에고 부끄럽슴미데이 어찌 기획위원장으로서 엄청나게 바쁘게 일을 많이 하시는 선생님에 비하리까....^^**
부럽습니다.
두 분의 좋은 관계는 앞으로도 쭈~욱 지속될것을 확신합니다.
병미 쌤도 팟띵~~~~~
'그래도 단 한 분이라도 나의 순수한 마음을 알아 준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충분한 명분을 얻은 셈이니까 이후로 다시 이런 문제가 재기되어도 할 말은 있게 된 셈이지...'라는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참 맞는 말이네요. 이 어찌, 남을 위한 일이겠습니까? 병기 샘 자신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으니, 아마 끄기는 어려울끼라요. 두 분께, 또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축하를 드립니다! 왜냐구요? 이런 '자연스럽고 행복한' 관계를 보는 행복이 쉬울라구요?
ㅎㅎㅎ 네 업보지요 그렇다고 권 샘이 제 아픈 곳을 콕 찌르시면 아파요^^''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메일을 확인하니 한 분이 또 저를 괴롭히려 하네요....큰 일 났습니다. 오늘부터 주말 가진 원주에서 처제가 근 몇 년만에 내려 온다는디...퇴근하면 갸들 몫가지 음식 차리랴 같이 놀라주야(실은 둘재 외조카논은 처음 보는 거랍니다....허걱)...그 와중에 작품을 봐 줘야 하는데....아고...그러고보니 8월에 작품 내야 할 것도 있는데....우~~왕앙~~~~T____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