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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 – 치욕의 역사가 시작된다!
- 한민족의 치욕을 담은 역사의 현장을 살펴 본다.
글 머리에서 적는 미천한 생각:
한반도에서 민족상잔의 피비린 내전이 있은지도 어언 65년이란 세월이 흘러 갔다. 65년! 기나긴 세월이 흘렀어도 우리 민족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70년전에 외인들이 그어 놓은 금을 지우지 못하고 남과 북이 갈라져 있다. 남들은 장벽도 허물었는데 우리는 금 하나 지우지 못하고 있다!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 핵을 만든다고 부산을 떨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권력다툼에 혈안이 되여 당쟁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정말 나라 꼴이 억망이다! 언제면 7천만이 함께 환하게 웃어 볼가?...
오늘이 바로 우리 민족의 치욕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그 날이다. 65년전의 오늘을 되 새김은 어제의 교훈을 상기하고 내일의 통일과제를 명심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필자는 카페님들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저 전쟁당시 미국을 위주로한 여러 나라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을 모아 전쟁이 진행됐던 과정대로 보여 드리려 한다.(이 사진들은 진실한 역사자료로서 이미 기밀이 해지되여 공개된 사진들이다.) 바라건대 한반도 전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였으면 한다.
1. 한반도의 전쟁배경
한반도의 전쟁(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공을 시작으로 1957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 된 날 까지)은 민족내전으로 시작되여 국제열강들의 재차 땅 나눠 먹기로 끝이 났다.
시작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북한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남한 관할구역을 공격하여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주권을 차지하려 한 것이였다.
그럼 왜 한민족이 남북을 나누어 관할구역을 따로 하게 되였는가? 그 역사적 기점으로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한다.
조선은 삼면이 바다이고 한 면이 대륙과 붙어있어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열강들이 시시각각 넘보던 땅이다.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이 각각 조선에 침입한적이 있다. 허나 명치유신을 하면서 자본주의 길로 막 발을 들여 놓은 일본이 그 세력이 급격히 강대해지면서 끝내 1876년 조선을 강박하여 불평등조약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의 국문은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잇따라 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호주-오지리 등 열강들이 줄줄이 조선에 들이 닥친다.특히 1882년에 체결한 《조미우호조약》은 조선이 이미 자본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고있음을 의미한다.
19세기말 열강들의 각축은 더 노골화 된다. 1894년 갑오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마관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다. 이렇게 되자 1897년 조선황제 고종 이희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대한제국”이라는 새 국호를 선포한다.
(이에 근거하여 필자는 아래 글에서 “조선반도”를 “한반도”로 칭하며 “조선”을 “대한제국”이라 칭하고 3.8선 이남을 “남한”, 이북은 “북한”이라 칭한다.”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용하지 않음을 밝힌다. 한반도는 지금도 한개의 나라라고 생가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러시아가 패하였다. 이렇게 되자 1910년 8월 일본은 공공연하게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다. 이로부터 한반도의 일본식민지시대가 시작된다.
제2차세계대전당시 1945년2월4일 ~ 2월 11일 사이에 미국,영국,소련3국 정상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윈스턴 처칠, 조셉 스탈린이 알타에서 비밀협정을 체결하는데 내용인즉 미국,소련,중국(국민당정부),영국이 대한제국을 신탁통치 한다는 내용이다.
1945년 8월 9일 미국은 북위38도선(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과 북을 점령 관리 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소련이 동의한다.(지들이 먼데 맘대루?...)
이렇게 한반도에 오늘까지 지우지 못하고 있는 금이 그어졌다. 그것도 전적으로 외인들이 지들 맘대로 말이다. 대한제국과 국민들은 전혀 권리가 없었다.
1945년8월말~9월상순, 미군과 소련군은 선후 3.8선이남과 이북지역에 진주하였다.
사실 이 때 부터 우리 민족의 피비린 내전의 불씨가 심어진 것이다.
1945년 12월 29일 미국은 12월 27일에 미,영,소3개국 국외무장관이 체결한 한반도의 신탁통치와 한반도에 민주정권을 건립할데 관한 “모스크바협정”을 발표하였다. 이에 전 대한제국의 백성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민족주의운동을 각 곳에서 일으켰다. 그들은 한반도의 통일과 자주정권을 주장하였다.
이에 미국과 소련은 자기들 세력범위내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한다. 우선 북측 소련관할구역에서는 공산주의이념으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소련군은 민족주의 령수인 조만식을 연금시켰다가 1950년 살해한다. 소련군은 또한 평북용암포에서 우익학생운동을 진압했고 신의주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진압하였다. 북쪽에서 정당은 거의 청일색으로 공산당과 좌익단체이며 우익단체는 거의 다 숙청되였다. 결과 김일성이 정권을 얻게 된다
다음 미국관할구역인 남쪽에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우익세력을 키운다. 1947년7월 좌익민주파 여운형이 암살되였고 우익민주당 영수인 송진우도 신탁통치를 반대하여 1945년12월 암살되였다. 김구의 “임정파”는 비록 한동안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나 미국정부는 그를 민족주의분자로 보고 자신들의 신복에서 제외하였다. 김구는 그 후 우익경찰 안두희에 의해 암살된다. 숙청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미국을 대변할 대변인은 이승만집단밖에 남지 않았다.
드디어 1948년 5월 10일 미국군경의 경계감독하에 남측의 단독선거가 거행되였다. 결과 이승만이 당선되였다.
1948년 8월 15일 남쪽에서는 “대한민국”을 성립하였고 1948년 9월 9일 북쪽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하였다.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쪽에서 첳군하고 1949년 6월 미군이 남쪽에서 철군한다.
남측과 북측은 모두 한반도 전체의 주권을주장했고 충돌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성립됨을 서울에서 선고하였다. 사진은 남측행사에서 연설하는 최초의 대통령 이승만이다.
1948년 9월 9일 북측에선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사진은 북측의 경축행사장면이다.
2. 전쟁전 남과 북의 전력대비
남측에는
8개의 보병사단,1개의 보병연대와 지원부대 그리고 경찰 등 도합10여만명의 병력이 있었다.
전투장비로는 비행기 30대(전투기10대 등, 폭격기는 없음),
장갑차 27대
화포 129문
바주카포 1900구
미군은 일본에 3개의 보병사단, 1개의 장갑차사단, 공군제5항공대(비행기835대), 미군제7함대(전함300여척) 등 병력이 수시로 남측을 도와 작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북측에는
10개의 보병사단, 1개의 탱크여단과 1개의 오토바이연대, 병력은 약 14만명.
화포600문
탱크258대
비행기(전투기40대,폭격기 70대 등) 172대
여기가 중국조선족카페이기에 북측병력에 대해 보충설명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되여 몇자 더 쓴다.
북측군사력량은 1946년부터 소련이 수천명의 북한군관을 양성해 주었다. 그리고 매 사단마다 15명의 소련군군사고문을 배치하였다. 여기서 밝혀야 할 것은 1949년 2월 김일성이 당시 북측외상 박일우를 북경으로 보내 원《조선의용군》에서 《중국인민해방군》으로 편입된 두개의 조선족사단(164사단, 166사단)을 요구하였고 모택동은 이를 승낙하였다.
이 두 사단의 전투력은 아주 강했다. 일찍 독립군시기부터 일본군과 수도없는 전투를 해왔고 중국의 3년내전에도 참가한 전투경험이 풍부한 부대이다. 그 중 지휘관으로 방호산장군도 포함되여 있었다.
1949년7월 《중국인민해방군제4야전군164사단》은 《조선인민군제5사단》으로 《중국인민해방군166사단》은 《조선인민군제6사단》으로 둔갑한다.제6사단장은 방호산이 임명되였다. 그 외 2사단장 최헌, 제4사단장 리권무, 제3사단장 장평산, 제7사단장 최인 등 대부분 중국해방군에 있던 조선족 간부였다.
일제의 발톱에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고 총을 들었던 이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들도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민족상잔의 전쟁터에서 선두에 서게 된다.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어디 있겠는가?
전쟁전 남한과 북한의 군사역량의 대조를 비율로 보면: 병력 약1:2, 화포 1:2, 기관총 1:7, 반자동소총 1:13, 탱크 1:6.5, 비행기 1:6으로서 북한이 절대적인 우세였다.
1949년 7월 춘천. 국방부장관과 미군군사고문단이 시찰하고 있을 때 사진.
남측공군의 F-51전투기
남측병사들이 3.8선의 한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3. 전쟁이 터지다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북한은 이승만이 미국의 조종하에 갑자기 3.8선을 넘어 북한을 무장침범했다고 설명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평양외문출판사 1958년) 중국에서 우리도 그렇게 배웠다.
허나 소련이 해체된 후 소련이 보관하고 있던 문서가 공개되면서 사실이 드러 났다.
사전에 스탈린의 동의를 구한 북한의 내각수상 김일성이 명령을 내려 1950년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6월2 5일 북측탱크가 3.8선을 넘고있다.
남측으로 내려 가는 북측군인들.
북한군은 개성과 의정부, 두 개의 방향으로 남하 하였다.
북측군 제1,6사단이 개성에서 남측군 제1사단과 정면으로 추돌한다.
여기서 북측 제6사단장 방호성은 부대를 이끌고 사전에 몰래 3.8선을 지나는 철로를 수리하여 1개연대의 병력을 기차에 태워 개성역까지 거침없이 덮쳤다. 꿈속에 있던 남측군은 패할수밖에 없었다. 25일 오전9시 북측군은 개성을 점령하였다. 남측군 제1사단 12연대는 전멸했다. 북측1사단은 T34탱크 40대의 엄호를 받으며 남측군 13연대의 방어를 뚫고 임진강 기슭에 이른다. 26일 북측군은 임진강대교를 건넌다. 이렇게 서울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한편 북측군 제3,4사단은 2개의 탱크연대의(한개 연대에 T34탱크가 40대씩 있음) 엄호를 받으며 의정부를 사수하는 남측군 제7사단을 향해 공격한다.
탱크앞에서 남측군은 퇴각하는수 밖에는 도리가 없다. 25일 당일 북측군은 동두천과 포천의 도로로 10Km 밀고 들어 갔고 25일 밤, 남측군7사단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두천에 있는 북측군 제4사단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하여 북측군을 몰아 낸다. 그러나 이와 동시 포천쪽은 텅 비게 된다. 북측군 제3사단은 26일 새벽 포천을 점령한다. 이렇게 남측군 제7사단을 포위하는 격이 되였다. 의정부방향의 남측군은 전투력을 상실하게 된다.
6월 25일 북측군이 통과한 의정부로 향하는 길목
전선의 북측포병모습
6월 26일 김일성이 “모든 력량을 집중하여 전쟁의 승리를 취득하자”라는 제목으로 방송연설하는 장면
27일, 북한군의 4개 사단은 도로를 타고 서울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남한군의 2,3,5,7사단이 선후로 방어전을 펼쳤으나 결국 패하였으며 28일 새벽 남한군은 한강다리를 폭파하게 된다. 당시 다리위에 그리고 다리 북쪽에는 피난민들과 철수하는 군인들로 붐비였는데 약 500~800여명이 다리와 함께 사라졌다 한다.
28일 오후,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다.
1950년6월28일 오후, 서울의 모습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하는 장면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취선님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안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