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리! 여기야!"
그녀가 뒤를 돌아보면서 웃는다. 환한 얼굴에 웃음띄면서 고개를 껌벅 숙인다.
"아예, 안녕하세요. 차장님!"
"얼른 타!"
그녀는 내 소나타의 조수석으로 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시간 늦지 않았죠?"
"늦긴 , 칼 같은데, 하하... 자, 그럼 출발해 봅시다!"
미스, 리와 내가 만난 장소는 서초동 법원청사 정문 앞이었다. 평소 많은 사람들의 내왕이 있던 법원청사도 오늘이 공휴일이라 인적이 뜸해 있었다. 아침의 이른 시간이라 힘들이지 않고 미스, 리를 태울 수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아랗다. 햋빛이 밝다. 아침공기가 싱그럽기 까지하다. 나는 차를 몰아 남부순환도로에 진입했다. 서쪽방향으로 달려 서해안고속도로로 들어갈 것이다. 미스, 리가 C대 사학과 출신이라는 것이 오늘 여행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미스, 리는 서울 성북구 장위동 고개아래 사거리에 있는 5층 건물의 빌딩관리실에서 일을 했다. 이 5층 건물의 공동소유주 2명중 한 명이 미스, 리의 이모가 된다.
그 연고로 관리실에 나와 사무적인 일을 봐 주고 있는데, 미스, 리는 교원임용시험을 통과해 발령을 기다린다고 했으며 한 1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난 이 건물의 1층을 다 쓰고 있는 W은행 월곡동지점 차장이다. 이 건물은 5층인데 주 용도가 1층의 은행과 4~5층의 볼링장을 제외하면 이용의 효율이 크지 않다고 생각되는 소규모의 자영업자들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지하층에 슈퍼가 있고, 2층에 치과, 이비인후과, 노래방, 컴퓨터학원, 3층에 헬스클럽과 맛사지실, 이렇게 입주업체가 10여개 정도밖에 안되었다. 이 건물을 지을때의 주 용도는볼링장 이었을 것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이 볼링장 건물은 뒤쪽으로는 월곡동 산 동네가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산 동네의 비좁은 골목길은 구불구불하고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정도로 협소했으며낡은 판자집은 지붕이 위의 골목길과 눈 높이를 마주하고 있으며, 길에 버려진 쓰레기며 여름엔 인분냄새가 풀풀나는 것이 서울에서 대표적인 해방촌의 하나였다.
이 가난하고 못사는 동네 앞을 그 당시 유행의 첨단을 걸었던 볼링장이 떡하니 동네앞을 가로막고 있는 위세가 판자촌과 대비되어 전체적으로 도시의 풍경이 무언가 애잔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비록 5층 건물이지만 은행용도와 볼링장용도에 맞게 지어 건물 높이가 다른건물 7층 높이는 될 만큼 우람한 건물이다. 난 W은행의 차장으로서 2층에 있는 관리실을 자주 들렀다. 은행은 2년마다 건물임차계약을 경신한다.
계약경신에 애로사항은 건물소유주가 2명의 여걸이고 그들이 서로 떨어진 곳에 살면며 서로 반목한다는데 있었다. 두 명의 여걸은 하나같이 배가 나왔으며 체격이 비대했고 사각진 얼굴형이었으며
말을 잘했다. 계약경신을 위해 난 관리실을 자주 찾으며 미스, 리와 친해진 것이다.
내가 사무실을 방문하면 미스, 리는 늘 웃으며 반겨주었고 차를 내 주었다.
미스, 리는 알맞은 키에 알맞은 몸매로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눈이 크고 얼굴이 희다.
안면이 익고 말문이 터지면서 일방적으로 호감을 갖게 됐고 작년 크리스마스 때 스카프를 선물했었다.
내 소나타는 광명시에서 좌회전하여 남쪽 방향으로 접어 들었다.
광명시에서 안양시를 통과해 안산에 이르면 서해안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난 어제 소나타를 세차하고 왁스까지 먹여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만들었다.
검은색인 내 소나타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때는 4월 중순 봄이라 춥지않아 난 남방샤쓰에 스웨터를 껴입은 캐주얼 차림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어제 미스, 리와 통화하면서 내가 말하기를, 바지 입고 운동화를 신고 오라고 당부했는데 미스, 리는 그말을 잊지 않고 잘 지켰다. 흰색 면바지에 연두빛 블라우스, 검은 자켙을 입은 맵시가 멋쟁이 같았다. 차가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했을때 나는 80년대 유행하던 팝송을 틀었다.
카펜터스의 <예스터 데이 완스모어>가 흘러 나왔다.
" 미스,리 이 음악 어때?"
" 좋은데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팝송이야, 가수도 그렇고..."
백제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리관 너머로 이 유물을 본 순간 나는 이 유물이 내뿜는 미적인 감각에 빠져 들었다. 백제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이 조각품은 그 조형에서 우러나오는 사실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오른 쪽다리를 꺾어 왼쪽 다리에 걸치고 앉아 오른 손 팔꿈치를 오른 발 무릎에 괴고 약간 고개숙인 모습이다. 그러면서 오른 손 둘째 손가락이 볼에 살짝 닿아있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 눈을 살짝 내리감고 미소를 짖고 있는데 염화미소라고 했던가. 말로 통하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이심전심의 전함이 있다는 걸까. 엄숙한 기상인데 그 가운데 자리잡은 잔잔한 미소, 무엇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부처님의 가르침속에서 空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양미술에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있다. 흔희들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의 미소로 쳐주지만 나는 그 보다 이 백제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더 쳐주고 싶다. <모나리자>는 여인의 미모속에 표현된 미소의 아름다움이라면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세상을 통달한 사람의 여유에서 오는 잔잔한 미소라 더욱 빛이 난다. 제작년도로 따져 보아도 900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모나리자>보다 900년 전에 제작된 반가사유상의 미소가 900년 후에 그려진 모나리자보다 더 세련되어 있다. 반가사유상은 조각품이지만 모나리자는 그림이다.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백제금동대향로도 그렇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처음보는 순간 와!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세밀하게 만들었을까. 탄성이 절로 나왔다. 향로는 몸통이 언듯보아 입을 다문 솔방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솔방울 같은 향로 몸통을 거센 파도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용의 입이 받치고 있다.
향로 꼭대기에는 봉황인지 천계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꼬리가 길고 하늘로 솟아오른 것을 보면 봉황같은데 머리부분을 보면 닭벼슬과 눈과 뾰족한 부리로 보아 어김없는 닭이다. 그래서 나는 천계로 본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이야기가 흘러 나오는 것 같다.
휘몰아치는 용이 떠 받들고 있는 몸통의 위로 3분의 2 이상은 향로의 뚜껑에 해당한다.
아래 쪽 3분의 1은 몸통의 받침부문으로 벌어진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잎은 하나 하나가 꽃잎 위쪽에서 몸통 밖으로 튀어나온 반 입체형이라 사실감을 더해 준다. 이 연꽃잎 하나 하나에 무슨 동물인지 갖가지 동물이 태어나는 것을 형상화 해 놓았다. 뚜껑부문으로 가면 복잡해 진다. 산과 동물이 또 사람이 어우러지는 신선의 세상이 나타난다. 사자, 코끼리, 뱀, 개, 원숭이, 독수리등의 동물이 산속에서 살며 지팡이를 짚은 신선이 걸어가고, 가부좌를 튼 도인이 명상을 하고 있다. 꼭대기쪽으로 가면 악사들이 북, 현, 거문고를 타고 있다. 산 봉우리엔 학이 한 마리씩 앉아 멀리 내려다 보고 있다.
한 마디로 신선이 산다는 이상세계를 표현해 놓은 것이다.
불사약과 불로초가 있다는 봉래산일까?
나는 백제가 보고 싶었다.
미스, 리가 사학과 출신이라 백제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그리고 안내를 부탁했다.
백제 유적을 한 번 보고 싶으니 같이 가자고... 나는 졸랐다. 그녀는 처음 조심스럽게 반응하더니 결국 수락했다. 내가 딴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백제역사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느낌으로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자왕과 삼천궁녀 , 낙화암, 전설이된 역사의 무대가 보고 싶었다. 과연 의자왕은 황음무도했는가. 삼천궁녀는 왜 낙화암에서 몸을 날렸을까.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각축했을 때 북으로 고구려에 밀려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 왔으나,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를 갖추었었다.
때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때론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를 위협하고, 때론 백제와 신라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신라와 백제도 끊임없이 마주치면서 공방을 계속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백제는 일본과 교류하면서 선진 문화를 전달해 주었다. 일본의 유명한 사찰인 법륭사(호류지)에 보존된 목각의 관음상은 백제의 미륵보살 반가상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만치 닮아있다. 이것이 일본의 국보다. 또 있다. 일본의 국보 칠지도, 백제의 무덤에서 나온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일본의 옛 왕도에 가면 아직도 백제라는 간판이 있으며 기차역인 백제역도 있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백제의 문화가 일본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듯 사라진 백제왕국의 문화는 찬란했다.
차는 서해대교를 지나고 있다. 서해대교도 장관이다.
바다가운데를 뚫고 사장교가 나있다. 길이는 7.3km, 왕복 6차선 도로이다.
국내에선 제일 긴 다리이고 초속 65m의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단다.
차에 탄 내 몸이 마치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것 같다.
"미스, 리 멋지지 않나?"
"뭐가요?"
"다리가..."
"아, 예. 그런데요. 참 멋져요."
미스리는 옆으로 나를 살짝 쳐다 봤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부쳤다.
"전, 차장님 은행영업장에서 지휘하는 모습이 멋있던데요!"
"그랬나? 내가... 아무튼 고마우신 말씀, 감사해에요!"
'해'라는 발음에 액센트가 들어갔다. 미스, 리는 하루에 한 번 씩은 은행에 나타났다. 걷는 모습이 당당하고 활기 찬 여성이다. 눈길이 마주치면 서로 웃으면서 목례를 했다.
목례를 주고 받으면 난 기분이 좋아졌다.
차는 당진을 거쳐 보령시에 진입했다. 보령시에는 유명한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대천해수욕장은 서해안에서는 알아주는 해수욕장으로 규모가 컸고 또한 머드. 팩 축제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동해안하고는 다르게 서해안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기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데 그로 인하여 발달된 갯벌이 있어 해안선은 경사면이 느리게 느리게 이루어져 썰물일 때는 갯벌의 끝이 지평선 모양으로 드러난다. 여기에 석양이 지면 볼만 한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 40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산천은 잠에서 깨어난 듯 젊은 기운을 내뿜고 있다. 물은 흘렀으며, 산은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찻길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개나리가 지고 진달래기 피고 있었다. 희디 흰 목련도 피었다. 진달래가 지면 또 벗꽃이 만발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나라꽃이 개나리나 진달래가 아닌 무궁화라는 사실이 민족정서에 안 맞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반도에는 어느 곳이든 봄의 전령사는 개나리이며, 산에는 어김없이 진달래가 핀다.
꽃이 산발해서 피는것이 품위가 없는 것일까.
무궁화는 품위있는 꽃이지만 생활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나라 꽃으로 정해진 것은 상해임시정부 때 일이다. 나무뿌리를 캐보니 뿌리의 지간이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향해 있어 나라 꽃으로 정했다는 일설도 있다.
"미스, 리 어디 이씨야?"
"전주 이씨인데요..."
"아, 그럼 왕족이구먼, 어느 파야?"
"의안대군파라고 하던데요."
"아, 그럼 1차 왕자의 난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방원에게 살해된 이복동생 휘 방석이 중시조구나, 이성계의 8번째 아들이었지 아마?"
"어머, 차장님!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맞아요."
"내가 이래봐도 엉터리 역사가라니깐..."
그렇게 따진다면 나도 왕족의 후예인데, 신라시대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해 그 사이 난 아들 휘 석이 우리 시조야.
중시조는 선조 때 사람 학봉 김성일이고, 하하, 우리 두 사람 모두 왕족의 후예네..."
일년에 두번 있는 명절제사 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아버지가 형제들이 둘러않아 귀밝기 술을 한 잔씩 돌리면 어김없이 족보얘기를 하셨다. 우리 할배처럼 문명을 날리신 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학봉 김성일을 두고 하는 말씀이시다. 학봉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조정에 나가서는 부제학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나기 전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 와 정사인 황윤길이 풍신수길이 반드시 조선을 침략할 거라 주장한 데 반해
부사인 김성일은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다른 견해를 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내 나이 30세 이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불만이었다.
어찌 우리 네 조상님은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나라를 들어 바친 경순왕에서 출발하였으며, 중시조란 분도 그렇다. 최고인 대제학도 못하신 분이고, 또 일본 사신으로 갔다 어찌 그렇게 정세를 판단하지 못하고 잘못된 보고를 올려 임진왜란의 화를 초래하신 분인가. 정파가 다른 황윤길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걸까. 이런 분이 조상이라는게 못 마땅했다.
그러나 불혹의 나이에 들어와 보니 내 생각도 달라졌다.
신라 말기, 신라는 이미 자력 방위할 힘이 없었고, 백제의 침공이 있으면 왕건한테 도움을 청했으며 왕건은 기꺼이 후원자 노릇을 했다. 오죽했으면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에 침입해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후를 겁간까지 하고 갔겠는가. 이미 나라로서의 국력이나 체면은 손상될 데로 손상된 터라 더 이상 버텨봤자 죄없는 백성들의 고통만 수반될 거라는 현실을 인식한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기를 버려 민생을 살린 이타주의자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서 언급한 중시조 학봉선생도 뒤늦게 자기의 과오를 뉘우친 듯 의병운동에 앞장서서 싸웠다.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그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쳐 없애야 했다.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있는 난공불낙의 성이었다. 일본군은 3차에 걸쳐 공격해 와서 피해도 많았다. 진주성의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으니 성의 함락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우수한 신식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기어이 성을 함락시키고 만다.
성을 수비하던 조선의 군관민은 이 진주성 싸움에서 전멸했다. 희생이 많았던 일본군이 성을 함락시키고 살아남은 민간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학봉 김성일 선생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저 멀리 눈 앞에 물이 흐르는 강이 보인다. 분명히 금강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다 온 것이다. 백제교를 건넜다. 부소산성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부여 역사탐방은 백제의 멸망이 사비성 함락으로 이루어 졌으니 사비성인 부소산성이 역사적으로 제일 의미있는 장소일 것이다. 부소산성 안으로 들어가니 자꾸만 올라가는 오르막이다.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성 밖은 저 멀리 내려다 보이는 평원이다. 성을 쌓았는데 계단식 토성이 보였다. 사비성 함락당시 축성된 성의 모양이 이런 걸까. 아니면 돌로 축성한 것이 허물어져 없어 졌는지?지금처럼 계단식 토성이었다면 높은 곳에서 수비하는 위치의 이점은 있었겠지만 당나라 군사 13만 명과 신라군사 5만 명의 대군앞에서는 새발의 피 정도가 아니었을까. 석축으로 이룬 단단한 성벽을 가졌다 해도 중과부적이었을 것이다.
사비성 수비군사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5천 결사대로 5만의 신라군사와 격전을 치룬것을 보면 왕성의 군사 수 도 얼마 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된다.
계백장군이 출전하기 전에 처 자식을 칼로 벤 것을 보면 이미 싸움의 승부를 예상한 때문일 것이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욕되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장렬한 죽음이 아름답다는 무인의 사생관이 작용했을 것이다.
한 참을 올라 가는 데 위쪽에서 한 무리의 아줌마 부대가 내려 왔다.
아마 단체 관광객인 모양이다. 그 이외엔 조용하기만 하다. 솔 밭사이로 기어올라 가니 평지가 나온다. 무슨 전각인 듯한 건축물이 서 있다. 낙화암 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비성 함락 당시 삼천궁녀들은 누구에겐가 이끌려 울고 불며 서로 손에 손을 잡고 끌어 당기며 낙화암으로 갔을 것이다. 제일 앞줄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여자는 궁녀들의 우두머리인 제조 상궁이었을지도 모른다. 뒤에선 내시들 열 댗 명이 뒤따라 갔을 것이다.
그 들에게도 왕조 멸망의 받아 들이기 어려운 비극적 순간에 망연자실하여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의자왕을 모시기 위해 평생을 숯처녀로 살아온 그녀들에겐 왕이 사로잡힌 그 순간에 이승의 모든 것을 포기 했을 수 있다. 오랑캐 군사에게 잡혀 겁간을 당하고 죽느니 차라리 고귀하게 백마강에 투신하는 것이 저승에 가서 하나남은 보람일 수 있다.
그래서 삼천궁녀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손에 손을 잡고 낙화암으로 밀려 갔다.
낙화암에 이르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드.레일을 쳐 놓았는데 그 울타리만 타고 넘으면 바로
다이빙 수영장의 스프링.보드처럼 돌출한 바위가 있다. 그 끄트머리엔 한 사람이 발을 모으고 설 만한 공간 밖에 없다. 거기서 몸을 날리면 수직으로 백마강에 떨어진다.
"미스, 리 여길 봐봐..."
나느 뾰죽하게 돌출한 바위 끄트머릴 가리켰다.
"저기가 삼천궁녀들이 몸을 날린 장소 같잖아?"
"예, 그런데요. 어머 너무 겁나요, 바람이 불면 날려 갈거 같아요."
미스,리는 몸서리치는 흉내를 내면서 절레 절레 한다.
이제 백마강을 내려다 보면서 절벽아래로 내려간다.
내려가니 유명한 고란사가 나온다. 유명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절이다. 백마강 수면위로 4m정도 올라온 바위터에 집을 짓자니 크게 지을 수도 없다. 절 가까이 인접한 절벽아래 우물이 있다. 절벽 아래를 조금파 들아간 암반층에 우물 물이 고여 있다. 바위 틈에서 새어 나오는 물이다. 물 한 바가지 떠서 미스, 리에게 먼저 건넸다.
"물 맛 어때?"
"아주 시원해요..드셔요."
바가지에 남은 물을 먹으니 역시 시원했다. 물 맛은 보통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들이 물을 마시는 동안 부녀간 인듯한 50대 남성과 10대 후반인 듯한 여성이 닦아왔다. 고란사 벽면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있다. 삼천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몸을 날리는 장면을 보고 난 여자애가 발음도 똑똑하게 "고란 지"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이들이 일본 관광객인걸 알았다.
"모시 모시, 닙뽄진 떼스까? ( 여보세요, 일본 사람입니까? )"
"하이 소 데스.( 예, 그렀습니다.)"
"부여 고꼬 미루노 도꼬가 아리 마스까? ( 부여에 볼 만한 곳이 있습니까?)"
"이이에, 아리마센. ( 아뇨, 없습니다.)"
"없다."고 했다.
6백년간 지속된 백제왕국의 수도에 볼 것이 없다고 했다. 백마강은 흐름이 있는 듯 없는 듯 유유히 흘렀다. 저 건너 강변엔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위로 새들이 떠있다.
"미스, 리 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 말이야? 그게 역사적인 사실일까 , 후세 사람이 지어낸 얘기일까?"
"지어낸 얘기 아닐까요? 차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음, 나도 그래,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니까..."
그럴 것이다. 역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자왕은 항음무도하여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주색에 빠져 궁궐에 궁녀를 삼천 명이나 거느렸단다. 바른 말하는 충신인 좌평 성충과 흥수를 귀양 보내거나 옥에 가두었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느냐는 인과응보의 논리이다. 그러나 태자로 있을 때의 의자왕은 어버이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와 총명함으로 일찌기 해동증자라는 칭호를 들은 사람인데 왕이 되어 그렇게 타락했다는게 의문이다.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扶餘)씨 인데 현재 한국에는 400여 개의 성씨가 있지만 부여씨는 존재하지 않는다.
승리의 주역인 김유신장군과 그 가족의 일화는 우리의 역사서에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등장한다. 그 일화는 재미 있기도 하다. 김유신은 젊은 때 화랑도의 무리를 이끈 향도 였었다. 그의 누이동생인 보희와 문희의 얘기는 재미를 더해 주고 있다.
언니인 보희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었다.
꿈에 오줌을 쌓는데 얼마나 많았던지 왕성인 서라벌이 오줌 물에 떠내려 갔다고 한다.
생각을 여러번 했지만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그 꿈 얘기를 누군가에게 하지 않고는 못배겼다. 나이로 보아 방년이라 꿈많고 웃움많을 때라 그 꿈 얘기를 2살 아래인 문희에게 해버렸다. 반짝이는 눈 빛으로 꿈 얘기를 다 듣고난 문희는 언니인 보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언니, 그 꿈 나한테 팔아라!"
"아니 예가, .. 그런 황당한 꿈 사서 뭣하려고?"
"그래두... 난 , 사고싶다."
결과적으로 보희는 자기가 꾼 꿈을 동생인 문희에게 팔았다. 그 대가는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문희는 언니에게 한가지 약조를 부탁했다. 그 꿈 얘기를 누구한테도 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문희도 자기가 언니한테 산 꿈 이야기를 자기 혼자 가슴속에 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꿈 얘기를 남에게 하는 순간 그 꿈이 사라진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 꿈을 해몽하기를 치마밑으로 싼 오줌물에 왕성이 잠겼다는 건 왕후가 될 길몽이라 했다. 그 길몽이 맞아 떨어 졌는지 문희는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 김춘추의 왕후가 되었다.
이 문희와 김유신에 대한 관계는 더 밀접하게 엮어진다.
김유신은 왕족인 김춘추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격구를 하면서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이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되자 김유신은 누이동생 문희을 불러 바느질을 시켰다. 옷을 벗은 몸으로는 냉기가 남아있는 밖에 세워 둘 수 없어 김유신은 바느질 하는 문희의 방으로 김춘추를 안내했다. 문희가 바느질 하는 사이 필연적으로 두 청춘남녀의 눈 길이 마주쳤고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달이 차오르듯이 문희는 배가 불러왔다.
그러자 김유신은 오늘 날에도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쑈를 선보인다.
당시 화랑의 향도로서 이름을 날리던 김유신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소문을 낸다.
자기의 누이동생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뱄으니 이건 용서할 수 없는 가문의 수치로 왕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산 아래에서 문희를 화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문을 내고는 실지로 남산아래 나뭇단을 쌓았다. 연기가 올라가자 선덕여왕이 환관에게 물었다. 환관이 소문을 아뢰자 여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를 먼저 물었다.
이때 김춘추가 여왕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김춘추를 아끼고 귀여워 한 여왕은
이들의 혼사를 서둘러 불과 수 일 후 이들을 결혼 시켰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가족사라고 해도 좋은 일을 역사서가 이처럼 자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승리자에게는 역사서도 이처럼 많은 장면을 할애한다.
백제 멸망당시 사비성인 부소산성을 내려왔다.
왕국의 수도였던 부여는 이제 조그만 시골 읍이다. 능산리 백제왕릉으로 갔다.
산 허리에 산을 깍아 조성된 백제 왕릉에는 무덤의 봉분이 여러 개가 옹기종기 둘러 앉았다. 크기도 작은 무덤들이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모여있다. 이게 왕릉이라니!
내가 본 신라의 왕릉과는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현대에 와서 성공한 사람들이 조성한 조상의 묘자리 하나 정도일 것이다. 여러 개가 모인 왕릉 다 합해봐야 신라의 왕릉 하나에 못미치는게 아닐까 한다. 내가 본 신라의 왕릉은 어마 어마했다. 황남대총에 가보면 무덤이라기 보다 산이었다. 평지에 조성된 봉분인데 산을 이루었다 . 이 정도의 봉분을 쌓으려면 얼마만한 흙과 돌 , 노동력을 투입해야 할지 어림 짐작이 안됬다. 현재의 발달한 포크레인으로도 이 만한 흙더미를 쌓으려면 몇 날 며칠 걸릴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백제는 멸망 전 까지만 해도 신라와 국력이 서로 비슷했다.
오히려 백제군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여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김품석과 김춘추의 딸을 죽였다. 김춘추는 원한에 사로 잡혔으나 신라의 힘 만으로는 도저히 백제를 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병을 구하려 고구려로, 바다건너 왜국으로, 저 멀리 당나라까지 가는 고초를 마다하지 않고 총력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물로 얻어낸 나,당 연합군이 아니었으면 백제에 많이도 시달렸를 것이다. 그런 백제 왕들의 무덤인 백제 왕릉군에도 백제는 없었다.
궁남지와 정림사지를 돌아 보았다.
궁남지는 백제 왕실의 별궁이 있었다는 큰 연못이다. 연못 주변에 키 큰 버드나무와 연못 안에 조성된 인공섬과 연못 주변에서 인공섬을 연결하는 다리와 푸른 하늘이 어우려져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풍경은 좋으나 백제의 역사유적과 유물은 없었다. 연못 자체가 유적이라면 모르지만. 정림사지에 오니 오층 석탑이 백제의 의미있는 유적으로 각인된다.
크기와 규모면에서 보아줄 만 하다. 그 옆에 있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크기는 했으나 얼굴과 몸이 형체를 알아 볼 수없도록 흉측하게 마모되어 보기 애처로울 따름이다. 누군가 정(丁)으로 부쉬었는데 세월의 풍상에 각는 없어져 두루뭉실해졌다.
석불이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게 대구시 팔공산 꼭대기에 있는 갓바위 부처상과 같아 흥미로웠다.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았다.
전시실을 둘러 보니 마한시대의 토기와 화살촉, 한성백제 당시의 토기와 동검 , 청동거울등 조막 조막한 유물이 있는것이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제관과 비슷했다.
볼 만한 것은 역시 백제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백제금동대향로 이렇게 두개 뿐이었다.
나는 백제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앞에서 조용히 미스, 리를 불렀다.
"미스, 리! 로당의 <생각하는 사람>과 이 반가사유상을 비교해 봐, 어느 것이 더 사실적일까?
"글쎄요,.. 저는 이 반가사유상이 더 마음에 와 닿는데요."
"나두 그래..."
난 미스, 리와의 의견일치에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공산성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에 밀려 내려와 세운 왕성이다. 부여에서 내륙으로 백마강을 거슬러 오라가면 역시 강의 물흐름이 꺾어진 강안을 배경으로 축성된 성이다. 남문쪽으로는 석성이나 동서쪽으로는 토성도 있다.
공산성도 성안에서 성밖을 바라보면 저 아래로 아스팔트 도로가 보이고 그 너머에는 들녘이다. 하지만 사방 주위의 시계가 너무 좁아 보였다.
성 안쪽도 좁기는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 동서의 길이가 800m, 남북의 길이가 400m라고 하나 목측으로는 더 좁아 보인다. 여기에 한 나라의 왕궁이 있었고, 많은 왕족과 궁녀들과 내시들, 호위무사들이 상시로 살았다는데 그 머리 수를 가늠해 보면 아무래도 좁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성곽의 형태뿐 아무것도 없다. 계단식으로 된 왕궁터에 잡초만 무성할 따름이다. 여기에도 백제는 없었다.
"미스, 리 다음은 어디야?"
"다 봤어요! 더 이상 가 볼데가 없어요, 차장님!"
"애개, 뭐 이래... 반나절도 안 되잖아!"
이럴 수가! 한 반도 역사에서 화려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국의 역사가 고작 반 나절도 안되는 폐허라는 사실이 언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돌아 볼 곳이 많다. 토함산 석굴암을 비롯해서 저 유명한 불국사와 그 본당앞에 우뚝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다. 다보탑은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아기자기한 조형미가 현대인의 미적 감각으로도 탁월하다. 반면에 석가탑은 석가여래가 반가부좌로 명상하듯 안정적이다.
이 탑에 붙여진 별칭이 무영탑이다.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란 뜻이다.
백제 사람 아사달이 이 탑을 만든 석공이라고 한다.
아사달은 백제에 아사녀라는 아내를 두고 있었다. 아사달은 신라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와서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백제에 남아있던 아사녀는 아사달이 떠난지 시간이 흐르자 남편이 보고 싶어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왔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 났을 것이다.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온 아사녀는 공사현장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곧바로 남편인 아사달을 만날 수는 없었다.
공사 현장엔 감독관이 있었고 밖으론 병사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사녀는 공사 감독관인 고승을 만나 사연을 이야기 했다. 남편이 보고 싶어 먼 백제에서 혈혈단신 길을 떠나 여기까지 왔는데 남편인 아사달이 여기에 있노라고 했다. 사연을 들은 고승은 난감했다. 인정상 만나게 해주어야 하나 호국불교의 기치아래 왕조에서 짓는 거대한 불사의 와중에 중요한 인물인 아사달에게 당시엔 부적을 탄다는 미신이 있던 사회라 공사중에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불경이었다. 행여라도 부적을 타 나라가 온 힘을 기울인 역사에 흠이라도 생길라 치면 그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한 참을 생각한 고승은 아사녀에게 알아 듣도록 조신조신하게 말했다. 지금은 중요한 공사중이니 만날 수 없고 공사가 완료되면 남산 쪽에 있는 큰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다. 그 때 가서 찾아오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사녀는 매일 같이 연못가에 나와 물을 들여다 보는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그러기도 여러 날, 어느 보름 달이 뜬 저녁에 아사녀는 물위에 뜬 탑의 그림자를 보았다.
너무나 반가웠다. 그 탑의 옆에 아사달이 훤하게 웃고 있었다.
아사녀는 너무도 그리웠던 차에 아사달에게 안길려고 달려갔다.
물 속에 빠져 죽었다.
공사를 다 마친 아사달이 아사녀가 묶고 있는 곳을 찾아 왔으나 아사녀는 없고 아사녀가 죽은 소문만 무성했다. 아사녀가 죽은 소문을 들은 아사달은 절망하여 연못에 몸을 던진다.
이것이 전해 내려오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다.
석가탑을 다 지었으나, 끝내 연못에 그림자는 비추지 않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 무영탑이다. 이렇듯, 백제인의 장인정신이 신라에는 살아남아 숨쉬고 있는데 백제에는 없다.
왜 일까?
백제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금동대향로, 석가탑, 일본의 유명한 사찰인 법륭사. 일본에서 국보로 여기는 목조관음상, 칠지도, 이 모든 것이 백제인의 손아귀에서 태어난 빛나는 유물과 유적이거늘 백제의 옛 땅에는 없다. 이것은 무얼 증명하는 걸까.
혹시라도 승자의 설욕인 파괴? ...
서양사에는 그 실례가 기록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 사활을 건 전쟁에 돌입한다. 1차, 2차,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에 유명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등장하는 전쟁이다. 한니발은 일찌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 있다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오늘날의 스페인인 에스파냐로 들어가 피레네 산맥속으로 사라졌다. 여정은 오늘날의 남프랑스인 갈리아 남쪽지방을 경유해 알프스산을 넘어 바로 로마의 본토인 북이탈리아로 진격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엔 잘 짜인 로마가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수도 로마에 입성하는것이다.
이때 동원된 군사가 얼마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인 꼬끼리 부대를 끌고 설산인 알프스를 넘었다는것만 해도 발상이 뛰어난 대단한 군사전략이라고 보여진다. 꼬끼리 부대는 현대전에 와선 탱크부대쯤 될 것이다. 칼과 창, 화살이 주무기였던 시대에 꼬끼리 부대는 적 전열을 분쇄하는 것으로 효용을 발휘했다. 로마군은 알프스를 넘어온 꼬끼리 부대에 혼이 났다.
그러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간의 꾀는 이후 꼬끼리 부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로마사에 유명한 스키피오 장군이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대결은 명장의 승부만큼이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한니발이 로마입성은 못했지만 이탈리아 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휩쓸었다.
스키피오는 정면 승부대신 지구전으로 나왔다. 한니발이 이태리 반도를 휩쓸고 다닐 때 스키피오는 그 궤적을 따라 다녔다. 이러니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는 쪽은 한니발이다.
어쨌던 수 십년에 걸친 전쟁이 클라이 막스를 향해 치솟은 것은 로마군의 역발상인 함선을 동원한 카르타고 침공이었다. 명장 스키피오의 이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북아프리카 육지에 상륙한 로마군은 방어망이 허술한 카르타고의 전 지역을 석권해 바다에 면해있는 카르타고성 앞까지 진격한다. 허를 찔린 카르타고는 성안에서 3년에 걸친 항전을 한다. 카르타고 성밖에서 로마군은 성을 포위한 체 공성을 위해 또 하나의 성을 쌓는다.
그렇게 공격해 성을 함락시킨다. 성안에서 항전하던 사람들은 전멸했다.
로마군이 입성해 모든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살아 남은 자들은 가차없이 학살했다.
마침내 뜻을 이룬 로마군은 불에 탄 성벽을 허물어 평토작업을 했으며 그 위에 소금을 뿌렸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는 주문을 달았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로마와 카르타고 마냥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였을 것이다. 승자의 아량은 패자가 약자일때 주어지는 것이다. 팽팽하게 대립각을 세운 사이라면 그 분노도 그 만큼 컸을 것이다. 전쟁에는 필시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다. 그 목숨이 아군이고, 가까운 친지라면 증오심은 더욱 폭발할 것이다. 후일의 무열왕인 김춘추는 백제군사에게 사랑하는 딸을 잃었다. 그것도 참혹하게...
그래서 일까?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에 백제는 너무도 희미한 존재로 닦아온다.
없는 것 같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는 지금도 옛 수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데가 많이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분황사 석탑, 첨성대, 안압지, 석빙고, 포석정, 계림, 황룡사지, 황남대총, 천마총, 무열왕릉, 문무대왕릉, 에밀레종이라 이름 붙여진 성덕대왕 신종등 구경꺼리가 많다. 너무나 대비된다.
우리가 남이가!
이처럼 탁월한 카피. 라이트도 없을 것이다. 이건 전임 대톨령 YS가 대통령후보일 때 생긴 말로 선전 구호로서는 단연 으뜸이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녹아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이 한 마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 당시 대통령 선거가 있기전에 목욕탕에서 우연히 대학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 벌거벗은 몸으로 곁에 앉아서 묻는 말이
"넌, 일 번이가, 이 번이가?"
"허허, 글쎄..."
일번은 노태우 후보였고, 2번은 YS 였다. 우리 두 사람은 대구출신이다. 아시다 싶이 노태우는 대구 출신이고 YS는 부산 출신이다. 민주화세력인 DJ와 YS는 대통령후보를 놓고 세 대결을 했는데 협상이 되지 않아 각자 출마해 버리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황금분활이라고 해야 되나. 각자가 다 승리를 장담했다.
노태우는 집권여당의 프리미엄에다가 군부와 대구 경북지역이 연고로 부각되었으며, 어느정권 할것 없이 여당에만 빌 붙는 이 땅의 보수세력이 우군이며, YS는 26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 그 이후 최연소 원내총무, 최연소 야당총재라는 신기록을 세운 인물로 부산과 경남이 연고이며, 민주 투사 이미지에 온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 서울 경기 지역에서의 상대적 유리함으로 그 또한 승리를 장담했다.
DJ는 박정희 군사독재시대에 3번이나 죽을 고비를 탈출한 사람으로 당시 재야세력에 있어서는 YS를 능가하고 있었으니, 전라도지역 주민의 강한 연대감에다 민주투사 이미지에 좌파노선으로 지식인층에 어필하고 있었다. 그도 역시 황금분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런 시국이였으니 대학친구가 그렇게 묻는것도 객관적으로는 이상할 게 없었다.
넌 노태우를 찍을래, YS를 찍을래?
노태우는 우리와 동향 사람이라 좋고 , 군부출신이라 나쁘다. YS는 크게는 같은 경상도지만 노태우 후보가 나온 이상 동향사람은 아니나 민주화를 부르짖어온 온건한 사람이라 괜찮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지 않나? 하는 그의 생각을 친구인 나에게 한 것이다.
난 그 둘다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우리가 남이가! 하는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
그 연원을 따라 올라가 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는 나,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순식간에 무너졌다. 백제에도 좌평 성충이나, 흥수, 계백장군같은 충신들이 있었지만 신라가 당나라 대군을 끌어들여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것 같다. 그에 대한 대비가 없었으니 중과부적인데다가 습격이라고 해도 좋을 단 시간에 당나라 군사들이 금강하류인 기벌포에 닻을 내렸고 신라군사 5만이 황산벌로 진격했다. 이러면 동 서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진용이 된다.
전투준비를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패전했다. 승리자인 당나라 군사의 노략질과 부녀자 겁간은 말할 것도 없고 , 당시엔 민족이란 개념도 희미할 때라 김춘추의 복수심에 신라 군사들의 백제인에 대한 처벌도 도를 넘었을 것이다. 의자왕은 붙잡혀 왕자들과 귀족 대신들, 그리고 만 이천명의 민간인 기술자들과 함께 전리품으로 중국 땅으로 건너갔다.
나라는 망하고, 부녀자들은 겁간당하고 그 중에 아릿다운 백제의 딸들은 중국으로 끌려가거나 신라 귀족의 노비로 팔려 갔다. 여기에 전쟁으로 농사를 망친 평민들은 굶어죽는 사람이 태부지이고 백제의 유적은 곳곳에서 신라 군사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 졌다.
사람이 살아 생전에 겪는 고통으로 따져 처참했을 것이다. 이 망국의 한이 서려 통일신라 말기 경상도 상주사람 견훤이 의자왕의 뒤를 잇는다고 후백제를 칭하자 불과 한 달만에 이 지방사람 5천명이 자원입대 했었다고 한다. 망국의 한은 이처럼 고갱이가 되어 백제가 멸망한 지 240년 후에도 들불처럼 일어 났었다.
240년이라면 긴 세월 같지만 장수하는 사람의 집안으로 따져 3대이면 끝난다. 장수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얘길 들려주고 그 아버지가 장수한 아들에게 할아버지가 겪은 것을 들려 준다면 아들에겐 그처럼 생생한 얘기도 없다. 평균년령이 40밖에 안되었을 그 시대에도 장수한 사람은 80넘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아주 드물지도 안했을 것이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사람인데 죽음을 앞두고 유명한 훈요십조라는 것을 전해 주었다.
어찌하여 왕건은 차령산맥 이남의 사람을 중용하지 말라고 유언했던가.
차령산맥은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태백산맥에서 갈려나온 산 줄기가 충청북도에서 남서쪽으로 45도 기울면서 내려와 금강위쪽에서 서해안으로 빠져 변산 반도에 이른다. 금강 이남이 백제의 영토였는데 무슨 사연으로 금강 이남의 사람을 쓰지 말라고 유언한 건지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할아버지 대에서는 전주에서 살았으나, 그는 함경도 영흥 땅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우익으로 조선의 건국에 실력을 행사한 개국공신 정도전은 경북 영주사람이다. 출중한 인물인 정도전은 한양 천도시 궁궐, 종묘의 위치와 사대문의 칭호를 결정한 인물이며 유학의 대가였다. 조선은 주자학에 경도되어 숭유억불 정책을 모토로 했으며, 조선은 선비들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만큼 유교를 숭상했다. 전국에 유림이 모이는 서원이 세워지고 그 시초는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이었다.
조선중기 연산군조에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의 빌미를 준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종조로 경남 밀양사람이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유교의 왕도정치를 위해 영남출신인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등용한다. 그 이후 영남학파는 이황 퇴계와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로 이어진다. 이황은 경북 예안출신이고 , 유성룡은 의성출신이며 김성일은 안동출신이다.
학문적으로 영남학파에 맞서는 기호학파에 율곡 이이가 있었으니 그의 학맥은 화담 서경덕,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로 이어진다.
이율곡은 파주출신이고, 서경덕은 개성출신이며, 송시열은 충북 옥천 출신이다.
호남출신이라고 벼슬을 못한것은 아니나 머리 수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열세였지 않나 생각된다. 그 당시 붕당정치는 오늘 날보다 더욱 심각해 끼리 끼리의 나눔이 있었으니 과거제도가 있었다 해도 인맥의 편중현상은 막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무려 60년간 지속되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런 시대적 배경이 영남인들의 뇌리에는 자신도 모르는 우월감으로 무의식속에 존재하게 되었을 것이고, 호남인들에겐 배경없는 정치보다는 예술에 정진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해남출신 고산 윤선도는 낙향하여 전남 보길도에서 유명한 <어부사시사>란 가사를 지어 가사문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충남 예산출신 추사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명필로 날렸고, 광주출신 겸재 정선과 진도출신 소치 허유는 그림으로 유명했다.
"차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꼴똘히 하세요?"
"응 ... 아, 내가 그랬나."
순간적인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 봄이 오는 들녁은 황량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지나 있었다.
"미스, 리! 이제 점심 먹어야지 "
"뭐 사주 실 껀데요?"
웃으면서 물어왔다. 웃는 모습이 흰 목련처럼 상큼하다.
"미스, 리는 뭘 먹고 싶나 ?"
"전 아무거나 잘 먹어요, 차장님 좋으실데로 하세요."
"그럼 대낮에 고기먹는 것두 그렇고, 이 지역 특산인 올갱이 해장국 어때?"
"좋아요, 그렇게 해요."
나는 공주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가다가 주차장 넓은 데로 들어갔다
<공주식당> 주문을 하고 나서 대화의 소재를 찾던 중 미스, 리에게 물어 보았다.
"미스, 리! 역사의 법칙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미스, 리는 한 참을 생각하더니,
"진보, 민주주의 아닐까요?"
"진보, 민주주의라. 오호, 그럴 듯 한데... 아니, 사학 전공하신 분의 말이 맞겠지 뭐...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꺾어지고 휘어지지만 결국엔 바다로 간다.
철학적으로 정이 있으면 반이 생기게 마련이고 결국엔 정반합으로 간다 . 뭐 이런 말 아닌가?"
"너무 어려워요, 차장님!"
"어, 그랬나! 미안 미안, 골 아픈건 하지 말자구... 하하."
올갱이는 내가 어렸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걸 보고 '고디'라고 했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차이가 짙게 뭍어난다.
고향에서 아버지는 군청 서기직으로 있으시다 보증 잘 못 선 죄로 가산을 탕진하고
대구로 나와 일가붙이가 중소건설회사 대표로 있는 회사에서 사무도 보시고 십장일도 하셨다. 십장이라면 현장에서 열 사람을 감독한다는 직책이다. 퇴근 후면 집으로 회사 장부를 갖다 놓고 새로운 장부를 만드셨다. 새로운 장부를 어린 나한테 주시면서 손 때를 뭍히라고 말씀했다. 성년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게 바로 이중장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때 당시 어른 말씀에 '호남사람들은 사귈 때 좋은 데 뒤 끝이 안좋다.' 라는 소리를 하신 것 같다. 결혼 후 서울에 살면서 명절에 아버지와 큰형이 사는 청도에 내려가면 모여 앉아서 얘기하는 중에
국졸인 큰 형수 왈, DJ는 뺄갱이라 카더라, 하고 무지르고 나왔다.
의성에 사는 농부인 바로 위 형님은 여기는 한나라 당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안동에 사는 대학나와 시청 공무원인 5촌 조카도 반 노무현이다.
마땅한 이유는 없다. 그냥 싫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참 대단한 집단 무의식이다. 내 유전자 속에도 내가 모르는 집단 무의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되어, 체화되어 나 자신도 알 수없는 암세포로 말이다. 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미스, 리는 충청도 사람이다. 미스, 리는 알맞은 체격에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이다.
나도 모르게 불쑥 내 입에서 말이 튀어 나왔다.
"미스, 리... 우리가 남이가!"
"녜에? 무슨 말이예요?"
미스, 리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첫댓글 와~ 필력도 대단하시고 문체도 깔끔하시네요. 글솜씨가 보통 학생같지 않은데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신가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