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국민(초등)학교 시절
나는 6.25사변이 끝나고 1.4후퇴 때 서울에서 피난을 와 본가가 있는 대구 성내(城內)의 집을 두고 변두리이었던 침산에서 54년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의 유서 깊은 학교인 달성 국민학교로 내가 38회이다. 형은 그 때 나 보다 훨씬 먼 곳인 수창 국민학교에 다녔고, 내 밑의 동생은 신설된 침산국민학교, 그 학교의 교의가 돌아가신 선친이셨던, 그 밑의 여동생도 같은 침산국민학교, 막내는 역시 신설된 대구의 유일한 사립인 개성국민학교를 자가용을 타고 호사스럽게 통학하였다. 우리 오남매의 다닌 학교가 무려 네 군데이다.
달성 국민학교는 히말라야 삼나무가 앞에 심겨져 있는 번듯한 오랜 본관 건물은 당시 육군 정보학교가 차출하여 쓰고 있었고, 형이 다닌 수창 국민학교는 육군 헌병학교가 자리를 잡았었다. 따라서 일학년 때 교실은 양철지붕의 가교사, 바닥은 마룻바닥, 걸상은 물론 없는 다섯 명이 앉는 앉은뱅이책상이었다. 여름 철 소나기라도 내리면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로 수업을 받을 수도 없는 지경. 그러다 4학년 때는 지금은 복개되어 사라진 미나리 강이 있는 하천 곁을 지나 5관구 사령부 정문을 보며 올라가면 오른쪽 언덕에 있었던 분교장. 여기서 처음 개통한 기차 앞에 태극기와 꽃다발을 달고 달리던 디젤 기관차도 보았다. 그러니까 교실은 철로 변이었지. 자주 오지 않는 미군용열차는 경적 대신 ‘땡땡땡’ 하는 소리를 내며 달렸고. 우리가 ‘할로야(hello)’ 하고 쫓아 따라 가면 먹던 C ration도 던져 주곤 하였다.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의 발사 성공 뉴스를 선생님이 흥분하여 들려주신 걸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5학년 때는 그나마 분교장에서도 쫓겨나 학교 운동장에 임시로 가설된 천막교실에서 그 더운 대구의 여름에 3, 4부제 수업을 받았고, 다행히 우리 반만은 급우 아버지의 천정이 높다랗고 양 옆이 뚫린 염색공장 창고에서 시원하게 여름철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비가 내리치면 피하느라 수업은 물론 받질 못하였지요. 전교 일제고사라도 있으며 모두 화판을 들고 대구 공설운동장에 가서 더운 햇빛 아래 시험을 보았고. 6학년 때 비로소 2층의 신축교실로 옮겨 수업을 받으며 느낀 행복감이란!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라는 졸업생 졸업식 노래를 부르며 60년 3월에 눈물의 졸업식을 하고, 급우 중 중학교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나는 경북 중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그 때는 도시락도 못 싸온 학생들을 위하여 세계 아동보호기구(CARE)에서 보내온 탈지분유를 학교에서 끓여 양동이에 퍼서 배급하였다. 다음에는 옥수수가루가 나와서 이걸로 떡을 만들어, 죽을 쑤어 주었다. 나는 이런 급식에 해당되지 않아 싸준 도시락을 옥수수떡과 바꾸어 먹기도 하였었고. 한번은 도시락 반찬통이 잘 닫혀 있질 않아 열었더니 커다란 알을 삶아 넣었는데, 그건 집에서 키우던 거위 알. 그걸 보는 순간 비위가 약했던 나는 입에서 군침이 돌며 속이 메스꺼워져서 뚜껑을 닫았더니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먹고 싶어 안달이다. 친구들 변변찮은 반찬인 고추장과 바꾸어 먹고는 집에 와서 식모(가정부)에게 투정을 하였다. 식모 왈, 몸이 약한 내가 잘 먹어야 한다고. 계란의 1.5배가 오리 알, 오리 알의 1.5배가 거위 알이니 크기가 계란의 두 배보다 크지요.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더니 우리가 너 도시락 반찬을 많이 빼앗아 먹었어. 실은 주위 친구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항상 집에서 도시락 찬은 넉넉하게 싸주었는데.
놀이기구도 변변치 않아 딱지치기, 상평통보 엽전을 안에 넣고 만든 제기차기와 구슬치기, 기마전과 겨울철에는 담벼락에 붙어 서서 밀어내는 게임으로 며루치(멸치)짜기와 말 타기 등도. 여자 애들은 운동장바닥에서 공기놀이, 땅 따먹기와 고무줄넘기, 악동들은 칼로 이를 자르다가 선생님한테 잡혀 귀싸대기를 얻어맞곤 했다.
지금도 만나는 최종학벌이 달성국민학교인 친구는 공장으로 들어가 일을 하다가 열흘 넘어 걸어서 서울로 와 정착한 곳이 노량진 수산시장, 여기서 뼈 빠지게 일을 하여 지금은 번듯한 가게에 집까지 지니고 살며 해마다 김장철이면 싱싱한 어패류 등을 나에게 보내어 준다. 다른 친구 하나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까지 하며 중학을 간신히 나와 고등학교는 문턱에도 가질 못하였다가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 서울 공대 졸업 후 현재는 토목회사 사장이다.
아직도 나에게 연락하는 국민학교 동창들이 적지 않고 아쉬운 일을 부탁하면 들어주고, 경조사 연락이 오면 간다. 그러나 종종 유명을 달리 하였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온다. 모두들 어렵고 힘들었던 국민학교 시절이여.
첫댓글 대한신장학회지에 실린 저의 글입니다.
이런 시절을 겪어 온 세대와 요즈음 젊은 세대와는 의견 차가 클 수 밖에.
어린 시절 아야기를 하면 책을 한권 써도 모자랄 것이다. 가난하던 시절 요즘 젊은이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아아!!! 세월이여...
수술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글을 올린 것을 보니 쾌차한 것 같아, 반갑습니다. 경상은 금수저 였네요. 술 쪼금 줄이고 글 많이 올려주세요.
어제도 회사 신입 직원 환영회식에서 맹물로 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