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황후기사의 기년을 분석할 때 눈여겨볼 것이 바로 박제상의 미사흔 구출사건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박제상은 신공5년 기사에서 毛麻利叱智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時新羅使者 毛麻立叱智等 竊分船及水手,載 微叱旱岐, 令逃於新羅)
그런데 구출했다는 미사흔은 누구로 기록되어 있을까? 바로 미질한기(微叱旱岐)이다.
미사흔을 미질한기라고 일본에서는 부른 것이다.
그런데 신공5년기사의 앞부분에서는 미사흔의 이름이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이라 한다.
미사흔의 이름은 일단 미질+무엇무엇으로 되어있다.
-신공신라정벌은 어떤 사건일까?
이를 바탕으로 일본서기의 신공왕후의 최대업적인 신라정벌이 언제적 이야기인지를 살펴보자.
신공의 신라정벌사건을 완전 뻥이라고 아무런 근거없이 주장하는 무책임한 자세를 잠시 벗어두고서 말이다. 그런 되먹지 못한 자세를 많이 보아왔고 그런 주장을 익히 알고 있기에 여기서는 무시하고자 한다.
신공왕후가 신라정벌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라정벌은 삼국사기에 무수히 왜인이 금성을 포위한 사건이 나오므로 어떤 사건을 가지고 윤색한 것인지 알수는 없다. 물론 여러 사건을 합쳐서 신공황후가 신라정벌했다고 우길 수도 있겠고, 특정사건을 지칭해 신라정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사흔이 일본으로 잡혀간 이유가 있나?
미사흔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도대체 왜 미사흔이 일본으로 인질로 잡혀갔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왜와 신라사이에 아무런 사건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신라가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로 인질로 보내진 신라왕자들
미사흔을 왜 왜국에 보냈는지 쉽게 단정하지 말고 잠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자.
미사흔의 형인 복호왕자는 왜 고구려로 인질로 갔을까?
<실성 十一年(412년) 以奈勿王子卜好 質於高句麗> - 신라본기
그런데 가만히 보면 복호만 고구려로 인질을 갔던 것이 아니다.
내물왕이 자신의 처남인 실성을 고구려로 인질로 보내버린 것이었다.
(내물과 실성은 둘다 미추왕의 공주가 와이프다)
<눌지왕원년기사 奈勿王三十七年(392년) 以實聖質於高句麗> - 신라본기
타국에 인질로 가는 것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던 것같다.
실성왕은 자신이 고구려에 인질로 간 것에 너무나 열받았다.
인질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구려사람에게 자신을 고구려로 보낸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를 죽여버려라고 사주하게 된다. 그러다 실성은 도리어 눌지에게 살해당해 왕위는 눌지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실성이 고구려로 인질로 갔던 392년은 어떤 시기인가?
광개토대왕이 등극했던 다음해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신라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다라고 주장하던 시기. 타국의 왕의 처남을 인질로 잡았으니 고구려가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그런데 복호는 왜 412년에 또 고구려로 인질로 갔을까?
이는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400년 경자년에 5만의 고구려군이 신라를 구하러 들이닥친 사건과 연관을 지을 수가 있다.
고구려는 신라를 구해주었으니 인질을 요구할 정도가 될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에 인질을 보낸 사건은 큰 무리가 없이 대충은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동일한 케이스가 왜와 신라의 관계에서도 벌어진다.
-왜로 인질로 간 신라왕자
바로 오늘의 주제인 미사흔이 왜에 인질로 잡혀간 사건이다.
실성이 고구려에서 돌아와 왕이 된 것은 402년
그는 미추왕의 사위이므로 역시 미추왕의 사위였던 내물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아들위주의 상속이 아닌 딸, 아들 평등상속의 영향이었을 것)
그리고는 바로 자신을 고구려로 인질로 보낸 내물에게 복수를 한다.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버린 것.(402년)
그리고 11년이 지나서는 미사흔의 형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또 6년후에는 내물의 남은 아들인 눌지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402년 미사흔은 왜국으로 갔다.
-삼국유사의 미사흔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이야기로 삼국유사는 약간 다르다.
<那密王卽位三十六年庚寅...於是王使第三子美海以聘於倭 - 삼국유사 내물왕과 김제상조>
내밀왕(내물왕) 36년(서기391년 이해가 바로 광개토비문의 신묘년) 경인(36년과 약간 어긋나 있다 서기390년) 왕이 셋째아들 미해를 왜로 인질로 보냈다는 것.
삼국유사는 미사흔을 미해라고 표기하고 있다.
미해는 이때 10살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내물왕은 어린 10살아들을 왜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물론 각 사서가 약간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충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이 왜국에 인질로 간 사건은 서기400년 전후임은 명확해진다.
인질로 타국에 간다는 것은 엄청난 형벌이었던 것 같다.
미사흔은 그런 정황속에서 왜국으로 인질로 끌려간 것이다.
그럼 이제 미사흔이 왜국에 끌려간 이유를 실성의 복수심(삼국사기의 경우) 이외에 어떤 요소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자.
-신공기에 또다른 미사흔왕자가 있다.
일본서기신공5년조에는 미사흔이 微叱旱岐로 나오지만 신공원년(중애9년)에는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즉 미질기지파진한기(微叱己知波珍干岐)다.
<新羅王 波沙寐錦卽以 微叱己知波珍干岐 爲質 仍齎金銀彩色及 綾羅 絹 載于八十 船 令從官軍 - 신공원년 동10월조>
즉 신라왕 파사매금이 미사흔을 인질로 해서는 금은채색과 여러비단을 80척선박에 싣고 왜군을 따르게 했다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는 파사왕대의 어떤 사건과 혼합이 된 사료다.
파사왕대의 신라침공이거나 신라침공과 내물왕대의 신라침공이 뒤죽박죽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신공왕후가 임신한 몸으로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를 공격해서 항복을 받았는데 이때 인질로 잡고 간 사람이 미사흔으로 볼 수 있는 미질기지파진한기(微叱己知波珍干岐)였던 것이다.
우리는 왜 신라가 왜에 인질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떻게 신공황후가 신라를 항복시켰다는 말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모든 사건을 연결하면 하나의 상황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두사건을 연결하면
왜군이 신라를 침공했고 신라는 강화를 맺었으며 이런 정황에서 미사흔은 인질로 왜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신공왕후원년의 상황이 서기400년전후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정황이 가장 자세하게 기록된 사료는 바로 광개토대왕비문이다.
바로 신묘년조항인 것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 倭以辛卯年來渡0破 百殘 00 新羅以爲新民(수곡제이랑석문)>
-백제와 신라는 본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그러나 왜가 신묘년(391년)에 건너와서 백제와 00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했다.
이런 와중에 광개토대왕은 신라의 은밀한 지원요청을 받게되고 드디어 서기 400년에 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신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는 고구려는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南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신라는 서기 390년 무렵 왜에 침공을 당해 함몰되었던 것이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는 신공왕후조에 들어가 있었고,
그러나 신라로서는 너무나 치욕적인 기록이기에 통일신라기를 거치면서 신라쪽 사료에서는 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문에서 이를 제3자의 입장에서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이 박제상열전과 미사흔 왕자가 인질로 왜에 잡혀간 사실로 단편적으로 남아 삼국사기에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은 조작되지 않았다.
이로서 광개토대왕비문은 조작되지 않았으며,
비록 고구려천하관으로 일부 사실을 해석하기는 했으나 오히려 목격자로서 당시의 사건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조작은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사람들이 거꾸로 한 것임이 드러난다.
일찍이 비문에 석회칠이 된 것은 탁본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왕건군이 상세히 고증한바가 있다.
인질 미사흔왕자가 말하는 것은 잔혹했던 신라중세사.
10살때 일본으로 잡혀간 미사흔 왕자가 사라졌던 신라고난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신라는 이런 시련을 딛고 결국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로 성장해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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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우연히 알게 된 역사 21이란 사이트에서
무명이란 분이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미사흔 이야기를 일본서기 내용과 삼국사기의 내용을 비교하며
구성하길래.
난 또 신채호님이 했던 것처럼 신라왕족간 다툼을 일본이 과장했다 같은
흔히 보아온 그런 내용의 글인 줄 알았다.
읽고나니 한대 맞은 기분이다.
상상하기 싫은 내용을 이렇게 잘도 풀어내는 구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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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을 디시인사이드 역갤에서 보고 퍼왔습니다. (진짜 본문은 ★)
진짜 본문 보시고 역갤러가 저러케 생각하시는걸 또 퍼왔는데요.
음...저러케 보니까 좀 안타깝네요.
동양사에 박학다식하신 우리 카페님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터케 보시나요?
단순히 왜놈의 과장이라고 보기엔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하고.(물론 과장을 했지만.)
==; 뭐 대단한건줄 알았더니, 결국 내용 정리하면 (글 쓰신 분에게는 실례이겠지만) 별거 아니네요. 왕자들 인질로 보내는 흔한 외교방식이 있었고, 미사흔이 일본으로 갔고, 그런데 대충 호태왕비 신묘년 기사가 일본서기 신공황후 기사랑 비슷한 년대니까 신공황후 정벌은 실제 있었다.. 는 말인데... ==; 저거 언제 나온 주장이더라.. 한 3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역시, 글을 쓰셨다는 "무명"이라는 분에게 실례되는 말이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고, "때려맞추기"로 추측한 내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애초에 신공황후 기사의 문제 자체도 한 두가지가 아니고, 그 사서 전체적으로 편년체 기술의 문제라든지는 오래동안 지적되어왔고, 그냥 미사흔-호태왕비-신공황후 기사 3가지로만 때려박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비슷한 케이스이지만 전혀 다르게 취급되는 경우의 예를 든다면, 람세스2세와 무와탈리의 카데쉬 전투입니다. 기원전 1274년 정도의 사건으로, 한반도 삼국의 시대조차도 쨉이 안될 정도로 고대의 사건이지만, 이 경우에는 이 전투에 대한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쪽 기록이 완벽하게 교차검증이 되고, 게다가 구체적인 외교적 조약들까지 발굴되어 확인이 되기 때문에 당시에 누가 어떻게 침공을 했고, 어떻게 싸웠고, 어떤 결과가 나온건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이 정도는 되야 뭔가 "증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초기 신무 천황부터 6대 천황까지는 실존 인물이 아닌 가공 인물이란 설이 일본 학계의 지배적인 결론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공 왕후(비미호=히미코)의 한반도 남부 정복 전설은 서기 3세기 초이고, 미사흔이 왜국에 인질로 보내진 시기는 서기 5세기 무렵입니다. 두 사건은 2백년이나 시점 차이가 납니다. 뭐, 일본서기 자체가 역사를 오래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기년을 올려 잡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존카터코벨 의 부여기마민족과왜 라는 책을 읽어보니.. 신공 왕후에 관한 이야기.. 가 있더군요. 이분은 가상인물이 아닐꺼라고 하시더군요. 부여 공주로 태어나 남하하며 가야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일열도로 가 점령 전쟁을 펼친 당찬 여자라고 글쓴분은 주장하시던데.. 개인적으로 나름 일리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짧은 지식으로(졸업한지가 오래돼서 구체적인건 다까묵었습니다..ㅡㅡ;)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사실자체가 꼭 양국간의 우위를 증명하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가까운 예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기에도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다는 6국과 왕자를 볼모로 교환해서 불가침협정 비슷한걸 맺기도 하니까요
신공왕후건과는 별개로 임나 일본부는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적어도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전방 후원분과 가야-왜계 유물이 전남 지방에서 계속 발굴되고, 고당으로 추정되는 유적까지 나오면서 한반도 남부와 왜가 어떻게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다만 그 한반도 남부의 왜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를 두고 학설이 갈리는 중이지요.
첫댓글 그 때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었나...?
막 만들어 지던 시기 아닌가요?
야먀토가 바로 옆에 이즈모를 제압한게 4~5세기라는 안숩- 북큐슈쪽을 완전 제압할려면 6세기까지 가야한다능 히?
==; 뭐 대단한건줄 알았더니, 결국 내용 정리하면 (글 쓰신 분에게는 실례이겠지만) 별거 아니네요. 왕자들 인질로 보내는 흔한 외교방식이 있었고, 미사흔이 일본으로 갔고, 그런데 대충 호태왕비 신묘년 기사가 일본서기 신공황후 기사랑 비슷한 년대니까 신공황후 정벌은 실제 있었다.. 는 말인데... ==; 저거 언제 나온 주장이더라.. 한 30년은 넘은 것 같은데?
역시, 글을 쓰셨다는 "무명"이라는 분에게 실례되는 말이지만, 결국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고, "때려맞추기"로 추측한 내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애초에 신공황후 기사의 문제 자체도 한 두가지가 아니고, 그 사서 전체적으로 편년체 기술의 문제라든지는 오래동안 지적되어왔고, 그냥 미사흔-호태왕비-신공황후 기사 3가지로만 때려박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비슷한 케이스이지만 전혀 다르게 취급되는 경우의 예를 든다면, 람세스2세와 무와탈리의 카데쉬 전투입니다. 기원전 1274년 정도의 사건으로, 한반도 삼국의 시대조차도 쨉이 안될 정도로 고대의 사건이지만, 이 경우에는 이 전투에 대한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쪽 기록이 완벽하게 교차검증이 되고, 게다가 구체적인 외교적 조약들까지 발굴되어 확인이 되기 때문에 당시에 누가 어떻게 침공을 했고, 어떻게 싸웠고, 어떤 결과가 나온건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죠. 이 정도는 되야 뭔가 "증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카데쉬 전투 람세스 2세로 재밌게 읽었는데 그게 그렇게 된거였군요,
초기 신무 천황부터 6대 천황까지는 실존 인물이 아닌 가공 인물이란 설이 일본 학계의 지배적인 결론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공 왕후(비미호=히미코)의 한반도 남부 정복 전설은 서기 3세기 초이고, 미사흔이 왜국에 인질로 보내진 시기는 서기 5세기 무렵입니다. 두 사건은 2백년이나 시점 차이가 납니다. 뭐, 일본서기 자체가 역사를 오래 끌어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기년을 올려 잡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신공 왕후 전설이 곧장 임나일본부로 이어지는데, 임나일본부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처음 나왔고, 일본 서기보다 이전에 지어진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관한 언급 자체가 없습니다.
근데 실성왕이 왜 왜국에 인질을 보냈을까요?? 402년 전후해서 인질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존카터코벨 의 부여기마민족과왜 라는 책을 읽어보니.. 신공 왕후에 관한 이야기.. 가 있더군요. 이분은 가상인물이 아닐꺼라고 하시더군요. 부여 공주로 태어나 남하하며 가야의 일부분을 점령하고 일열도로 가 점령 전쟁을 펼친 당찬 여자라고 글쓴분은 주장하시던데.. 개인적으로 나름 일리있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이러케 간단하게 논파해주시니 안계가 팍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 윗님들 답변 감사합니다 (__)
짧은 지식으로(졸업한지가 오래돼서 구체적인건 다까묵었습니다..ㅡㅡ;)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사실자체가 꼭 양국간의 우위를 증명하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가까운 예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기에도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다는 6국과 왕자를 볼모로 교환해서 불가침협정 비슷한걸 맺기도 하니까요
신공왕후건과는 별개로 임나 일본부는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적어도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전방 후원분과 가야-왜계 유물이 전남 지방에서 계속 발굴되고, 고당으로 추정되는 유적까지 나오면서 한반도 남부와 왜가 어떻게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다만 그 한반도 남부의 왜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를 두고 학설이 갈리는 중이지요.
뭐 전 개인적으로 그 왜를 야마토로 안보고 있긴 합니다- 야마토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칠정도로 영향력을 확대할려면 6세기까진 가야하는고로 ㅡㅡ; 야마토대신, 이즈모나, 북큐슈쪽의 호족과의 연관을 생각중이죵- 문제라면, 사료상으로는 반박이 꽤나 힘든 임나일본부설을 밟는 근거가 유물이 없단 거였는데- 이젠 유물이 발견되서 난감하단 안숩 ㅡ.ㅡ
게이님(아 어감 이상하다..;;)볼그님 의견의 찬성!! 그문제는 좀더 연구를 해봐야하지 싶네요 물론 저말고 전문가들이!
음..게볼보다 심하군염ㅋ
게이볼그->Gae-Bulga->가-불가->까불까->까불까?? 로 생각했던 전 어이하랍니까?(먼산)
인질 보내면 무조건 굽신굽신이나......그냥 무슨 물건마냥 동서양고금하고 서로 신뢰나 "나 인질 내노을 탠까 믿어라 ㅇㅇ?"식이라던지.....쳇....
어떤 경우엔 국내의 라이벌 제거 차원에서 일부러 인질을 보낸 케이스도 있죠 -_-ㅋ..
결국 광개토대왕비문이 조작된게 아니라는건가요?
현재 비문조작설은 한중일 삼국 학계에서 부정되는 형편입니다. 일본, 중국은 거의 부정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일부가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긴 하나. 학계 내에서 조작설은 이전 탁본과 비교해봐서 거의 근거 없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오만한 고구려란 말인가....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