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전성기
친구들이 어려운 코로나19 시대를 어떻게 지내는지 한눈에 보인다. SNS 등에서 만나는 친구들에 관한 얘기다. 온라인 속의 친구들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방이 꽉 막힌 비대면 시대에 ‘단톡’이라는 채널을 통해 외부로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신선한 공기를 취입하는 ‘라이프라인’ 하나씩을 갖고 사는 것 같다. 자기 계발 강사로 유명한 김미경 씨는 오프라인에서 하던 일이 정지되었거나 방해를 받는 비대면 시대는 온택트on-tact, 즉 온라인 대면으로 뚫어야 한다고 그의 새 책 《Reboot》에서 역설했다. 이젠 나도 온택트 도제徒弟이다.
온택트로 만나는 우리 친구들은 ‘미스터 트롯’의 팬이 많다. TV 속에서 어려운 시기에 국민을 위로해 준 트롯맨에게 받은 고마움을 안고 코로나며 기나긴 장마며 거친 태풍의 긴 그림자를 건너왔다. 누가 TV를 바보상자라 했던가. 우리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낱낱이 기억하고 증언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게 되었다.
공중파 채널 A의 ‘아이 콘택트’(눈 맞춤)는 나의 최애最愛 프로그램이다. 트롯을 제쳐 두고라도 본방이나 재방을 꼭 본다. 이 프로그램은 초대한 자와 초대받은 자가 마주 보고 앉아 5분간 대화 없이 눈맞춤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은 뒤 누군가 먼저 입을떼고 대화를 이어간다. 초대한 자의 구체적인 고민과 해결책을 둘이서 같이 찾아보는 일종의 마음 치유 프로그램이다.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출연자나 시청자에게 주는 힐링 효과가 대단하다.
9월 중의 한 회차 방송이 대히트였다. 이날 주인공은 후배 배우 신이와 선배 배우 금보라였다. 신이는 대선배 금보라를 애교스럽게 ‘금보살’이라 부르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띤 채 고민 보따리를 펴 보인다. 30, 40대 여배우들이면 누구나 겪는 결혼 문제, 연기와 인기 문제,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애증 등등 인생 문제 전반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금보라는 후배의 걱정 하나하나를 망설임 없이 즉설 직언으로 풀어냈다. 매의 눈과 온몸으로 답하는 금보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 한마디는 그대로 금언이었다. 그 방송을 시청했던 시청자라면, 기대치 않았던 크리스마스 선물 한아름을 미리 받은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그 방송 하나로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은 시청자도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내가 그랬듯이. 이는 하나의 사건임이 틀림없다.
시작부터 간단치가 않았다.
“사랑은 영원해. 단 상대는 바뀌는 거야. 한 사람과 영원한 사랑은 소설과 영화에서나 가능한 거지.”
그 말을 들으니 일찍 사별을 겪거나 독신으로 살아온 친구, 결혼 50주년을 맞이한 친구 모두의 속이 복잡해진다. 사람의 일, 사랑의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니 누구나 방심하지 말라는 뜻인가. 에잇, 그냥 소설처럼 영화처럼 살면 어때! 한편으로는 한 사람과의 영원한 사랑이 어렵다는 것이 사랑이 어려워서인지, 사랑 아닌 다른 무엇 때문일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아직 미혼자이며, 연기에 열중하고 있으나 길을 잃은 것 같고 웃음도 잃었다는 신이의 고민을 족집게가 되어 하나하나 풀어주는 금보라의 초특급 처방이 이어졌다.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배우로서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나이가 듦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역할이 계속 생긴다는 것, 배우가 특별한 사람은 아닌데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 등.
이날 대화의 피크는 “배우의 존재가 잊히는 걸 두려워해야지. 나이 드는 것 두려워하지 마. 내가 늙는다는 것도 받아들여야해.”라는 대목이었다. 금보라는 빛나는 미모와 남들이 인정한 연기로 주인공 역할을 했던 젊은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며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할머니 역할을 하긴 좀 젊었고 어머니 역할을 하긴 좀 늙었다고 말하는 60대의 배우 금보라는 어떤 역할이 오던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내 이날의 마지막 폭죽이 터졌다.
“인생의 전성기가 언제라고 생각하나?”라고 금보라가 물었다.
“인기가 있고 광고 많이 찍을 때가 아니야.”
신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금보라가 벼락같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인생의 전성기는 네가 숨 쉬고 있는 순간까지가 전성기야.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 네가 살아 있는 게 너의 전성기야. 오늘이 바로 너의 전성기, 나의 전성기야.”
차분하고 달관한 자의 부드러운 말투였다. 배우 신이에게서 신음하듯 탄성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 찾고 싶던 것, 듣고 싶던 말을 들은 자의 더 바랄 게 없는 듯한 안도감이 배시시 웃는 모습에서 배어 나왔다.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금보살에게 다가갔던 시작 때의 신이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신이는 단단하고 안전한 땅 위에 올라서서 해방감과 자신감을 만끽하는 자세였다. 잃었던 웃음을 되찾은 것이 역력했다.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금보살에게 복채를 주는 시늉을 했다. 왜 그동안맞지도 않는 점집을 찾아다니며 쓸데없는 돈을 썼던가 하면서.
우리 친구들의 환호는 또 어떻고! 맞아! 지금이 나의 전성기야! 우리의 전성기야! 칠십 중반의 나이로 한편으로는 자유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지 모를 열등감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던 친구들은 금보살이 마치 우리를 구원해 주었기라도 한 듯 ‘최고의철학자’라 했다. 한 친구는 그동안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 아님에도 친구들이 특별한 대접을 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겸손 모드가 되어 친구들에게 고마워했다.
나는 어땠냐 하면,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선지식 한 분을 친견한 기분이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길이란 말은 늘 들어왔지만, 한순간에 지나고 만, 인생 황금기라고 여겨온 그 짧은 세월을, 이렇게 지금 숨 쉬는 순간까지라고 길고도 편안하게 늘여서 말해 준 사람이 있기는 있었던가. 내게 금보라의 존재는 훌륭한 스승들을 공경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 하셨던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였다. 나는 존경하는 배우 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더할 수 없이 행복했다. 배우 금보라는 인도적인 선행에 앞장선 오드리 헵번이나 자기의 신념을 대차게 피력한 제인 폰다와 같은 세계적인 배우의 대열에 올릴 만한 한국의 세계적 배우라 말하고 싶다.
청명한 가을날, 배우 금보라가 일으킨 즐거운 반란에 나의 움츠려졌던 어깨가 절로 펴졌다. 글을 쓸 때 나이티를 안 내려고 애썼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주었다. 친구들에게 말해 주었다. 친구들아, 우리의 전성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끝나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