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18:50분, 정승화 연행조는 합수부를 떠나 19:00 조금 지나 총장광관에 도착했고, 허삼수 조정통제국장, 우경윤 수사2국장은 총장 부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이들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길성 수사분실장, 김대균 수사과장, 박원철 수사관, 등 3명은 부관실에 가서 대기했고, 현관 앞에는 신동기, 김덕수 수사관이 있었다. 한편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 이종민 육본헌병대장, 이장석, 양일균 수사관은 공관입구에 있는 헌병초소로 가서 ‘오늘저녁 발생할 일에 대해서는 상부지침에 의한 것이니 개별행동을 하지 말 것’을 지시한 후 정승화가 연행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경윤과 허삼수가 총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대한 총장님의 관련부분에 대해 새로운 증언을 받아야 하니 한-두 시간 합수부에 가셔서 진술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가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어디서 왔어” 우경윤이 다시 말했다. “총장님에 대한 조사는 대통령께 이미 보고가 된 것으로 압니다. 잠깐만 가셔서 녹음만 하시고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말에 정승화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가긴 어딜 가. 내가 적어도 육군참모총장이야.”
이어서 부관과 경호원을 불러 대통령과 장관에 전화를 걸라고 고함을 쳤다. 밖에 있던 6-7명의 경호원이 몰려들자 정승화는 “이놈들 잡아”하고 소리를 쳤고, 경호원들은 우경윤과 허삼수를 체포하려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에 우경윤이 경호원들에게 “공무집행 중이니 방해하지 말고 나가라” 하면서 이들을 밀어낸 후 응접실 밖으로 나가 복도에 접어드는 순간, 2층 계단에 있던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총소리에 밖에 있던 경호원들이 모두 도망했고, 응접실에는 정승화, 허삼수 단 둘이만 남게 됐다.
총성과 때를 같이 하여 부관실에 있던 수사관들과 정승화 측 장교들(이재천 부관 및 김인선 경호대장)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전속부관이 장관에게 전화를 거는 등 외부지원을 요청하려 하자 한길성 수사관이 이를 제지했다. 그러자 부관 및 경호대장이 권총을 빼들자 다급해진 한길성이 권총 개머리판으로 이재천 소령의 머리를 쳤고, 박원철 수사관은 경호대장을 잡았다. 이러던 중, 청년이 우경윤을 향해 발사한 총성이 울리자 부관실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져 이재천 소령과 김인선 경호대장이 부상을 입었다.
부관실이 정리되자 응접실 상황이 궁금해진 한길성이 응접실로 향하던 중 우경윤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에 허삼수가 납치됐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이 때 허삼수가 다시 정승화에 동행을 요구했고, 정승화는 포기상태에서 순순히 응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오는 도중 우경윤을 쏜 청년이 다시 허삼수를 겨누고 있는 것을 발견한 박원철이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유리창을 부수고 뛰어들었고 청년은 2층으로 도망을 쳤다. 연행이 완료된 이후 합수부를 지원하던 33헌병대 병력과 공관 외곽을 지키던 해병대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33헌병대 4명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났다. 12.12. 군벌의 할거
12.12. 17:00! 세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최규하 대통령 집무실에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청하다가 최규하가 노재현 국방장관을 부르기로 하면서 지연되어 기다리고 있었고, 정승화 연행조는 이미 약속해 놓은 대로 총장공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으며, 30경비단에 전두환이 초청해 놓은 8명의 장군은 장태완으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으면서 대통령실에 간 합수부장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초청된 장성은 유학성(군수차관보), 차규헌(수도군단장), 황영시(1군단장), 노태우(9사단장), 박준병(20사단장), 박희도(1공수여단장), 최세창(3공수여단장), 장기오(5공수여단장)이었다. 이들은 전두환이 정승화 연행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 초청받은 사람들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실에서 나와 30경비단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윤성민 참모차장이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30경비단을 무력 공격하겠다는 협박성 전화를 했다. 대통령실에서 재가를 받지 못하고 돌아온 합수부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백운택, 박희도 등 5명의 장군들은 '수경사령관은 협박을 가해오고, 참모차장이 반발하고 있는 긴박한 시기에 마냥 노재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한 후 대통령을 찾아가 호소하기로 하고 전두환과 함께 대통령실로 갔다.
이들은 국방장관의 행방이 모연한 상태에서 대통령이 전권으로 재가해 줄 것을 정중하게 건의했다.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신군부가 대통령을 협박하러 갔다고 비난한다. 22시10분 노재현이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를 했고, 곧 가겠다고 했지만 그 후 노재현은 계속 잠적했다가 그 다음날 아침 4:00경에야 헌병에 의해 국방부 계단 밑에서 발견됐다.
2008.2.2. |
첫댓글 흠........ 협박이 아니라 건의라...... 논쟁의 시발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