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끝을 마주하는 세 가지 방식
이현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격언이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인 ‘요기 베라’가 감독 시절에 남긴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다. 그러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의미이니,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명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9회 말 3아웃이 되는 순간 야구 경기는 끝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경기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끝이 났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모두가 경기장을 떠난 뒤에도 홀로 객석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상상해 본다. 그는 시합을 계속 복기하며, 거기서 그랬더라면 우리 팀이 이겼을 거라고 안타까워한다. 시즌 우승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였기에 아쉬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집에 가서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그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술에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자주 꿈도 꾼다. 경기는 10년 전에 끝났지만, 그의 시간은 여전히 객석에 앉아 있다. 그의 삶에서 그 시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처럼 ‘끝’은 객관적인 사실이면서, 그것을 느끼는 이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영역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끝장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이라고 말한다.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이 있고, 끝난 줄 알면서도 끝내지 못하는 것도 있다. 더는 그것을 붙잡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에야 끝은 비로소 끝이 된다. 끝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에 생겨난다. 끝은 그것을 겪어내는 사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고 보면 ‘끝’은 사건이나 현상이 아닌 태도에 가깝다.
어느새 한겨울. 달력은 얇고, 자연스레 ‘끝’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시기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끝’을 화두로 한 세 편의 작품을 살펴본다. 이들 작품은 끝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각기 다른 태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결국 중요한 것은 끝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는 시간 속을 같이 걸어왔다
우리에겐
어떤 의심도 불가하다
어떤 편견도 불가하다
어떤 재단도 불가하다
단지
서로를 향한, 서로에게 속한
너와 나였을 뿐
평행선을 걸어온 순수가
각자의 저녁을 따라 저물어간다
앞서가는 걸음에 함께한 기억이
맞잡은 실타래를 풀며 하얀 꽃길을 연다
끊어진 실을 잇는 것은
두 손 모은 땅의 일이 아니라서
구름 훑고 간 길목 맴돌다
무지개다리 앞 멈춰 선
나의 늙은 개
안녕 안녕, 다시 만날 안녕
나의 눈에 고인
너의 호수를 웃으며 건너가렴
너의 까만 눈망울 위로
잠들지 않는 섬이 자라나도록
그 섬에
내가 잠들 수 있도록
― 강신명, 「슬픔의 비중」 전문
이 작품은 반려견의 죽음을 다룬다. 아마도 죽음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형태의 끝일 것이다. 죽음으로 단절된 관계는 결코 회복하거나 되돌릴 수 없다. “끊어진 실을 잇는 것은/ 두 손 모은 땅의 일이 아니라서”라는 구절은 이러한 죽음의 비가역성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기도하여도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남겨진 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함께한 기억”을 곱씹으며, 떠나간 이의 안녕을 비는 것뿐. 여러 이별 중에서도 사별死別이 더욱 슬픈 것은 이 무력감 때문이 아닐까.
시는 “평행선을 걸어온 순수가/ 각자의 저녁을 따라 저물어간다”라며,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이별을 담담하게 그린다. 화자가 애써 슬픔에 담담할 수 있는 까닭은 지금 맞이한 끝이 관계의 소멸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은 오히려 영원한 재회의 약속이다. 화자는 순응이나 체념이 아닌 초월의 방식으로 끝을 대한다. “무지개다리 앞 멈춰 선/ 나의 늙은 개”에게 건네는 “안녕 안녕, 다시 만날 안녕”이라는 말이 그렇다. 이때 ‘안녕’은 작별 인사이면서, 먼저 건네는 재회의 인사다. 또한 이제 먼 길을 떠나는 이의 평안平安을 비는 안녕이기도 하다. 이처럼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안녕’ 속에 진짜 이별은 없다. 화자는 안녕을 반복함으로써 끝을 말하는 동시에 끝을 취소한다. 그렇게 이별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다시 만날 안녕”이라는 미래의 약속을 통해 오늘의 슬픔을 받아들일 힘을 얻는다.
시의 마지막 세 연은 “우리”의 재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화자는 반려견에게 “나의 눈에 고인/ 너의 호수를 웃으며 건너가렴”이라고 청한다. 내 눈물은 “너의 호수”이자 네가 건너갈 길이 된다. 이 길은 이별을 관계의 영속으로 잇는 여정이다. 그것은 “너의 까만 눈망울 위로/ 잠들지 않는 섬이 자라나도록” 하고, 훗날 “그 섬에/ 내가 잠들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슬픔에 침몰하지 않고 자라나는 이 “잠들지 않는 섬”은 “함께한 기억”의 힘으로 빚어지는 초월적 공간이다. 끝이 오히려 관계를 영원히 지속하는 새로운 공간을 여는 것이다. 「슬픔의 비중」에서 끝은 이렇게 시작의 다른 얼굴이다.
4층 동쪽 끝방에 삽니다
창틀에는 녹슨 풍경이
바람을 기다리고
책상에선 밤마다 불면이 자랍니다
아무도 오지 않지만
아침은 가장 먼저 오고
어둠은 저절로 스며듭니다
밤이면 성간을 유영하는
보이저호의 꿈을 쫓아
멀리 떠날 수도 있습니다
골든 레코드 속
베토벤의 카바티나 선율이
어두운 우주를 적십니다
보이저호에 실린 쉰다섯 가지 인사에는
어떤 감정이 담겼을까요
“안녕하세요, 평안하십니까?”
내가 아는 유일한 인사입니다
지구에서 240억 킬로미터
별과 별 사이 암흑을 떠도는
보이저 1호처럼
동쪽 끝방은
너무 멀리 떠나온 걸까요
혼자 흐르는 음악처럼
당신과의 교신이 끊긴 이유를 떠올립니다
발신만 있고 수신이 닿지 않는
저절로 자라나는 머리카락처럼
어두운 책상 아래 숨어든
가느다란 희망이
아득한 공간 저 너머
무한히 흐르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침이 눈을 뜨면
끊어진 교신을 다시 잇겠습니다
그곳의 안부를 한 번쯤,
재생해 주시겠어요
― 박숲, 「혼자서도 멀리」 전문
알다시피 “보이저1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우주 탐사선이다. 시에 나오듯이 2025년 현재를 기준으로 지구에서 약 “240억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 간격에서 보이저1호와 지구 간의 통신은 한쪽이 보낸 신호가 도착하는 데 23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아득한 거리다. 「혼자서도 멀리」는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당신과의 심리적 거리를 보이저1호의 상황에 빗댄다.
“4층 동쪽 끝방”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머무는 화자는 자신을 보이저1호와 동일시한다. 이 공간 설정이 절묘하다. “4층 끝방”은 “동쪽”에 있다. 동쪽은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즉 “아침”이 가장 먼저 오는 ‘시작’의 방향이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도 오지 않지만/ 아침은 가장 먼저 오고”라는 구절과 조응하며, (관계의) 끝에 있으면서도 시작을 가장 먼저 맞이해야 하는 화자의 아이러니한 처지를 드러낸다.
보이저1호는 성간 우주를 항해하며 지금도 계속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보이저1호처럼// 동쪽 끝방은/ 너무 멀리 떠나온 걸까요”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 역시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당신에게서 멀어져 있다. 그렇지만 화자는 “발신만 있고 수신이 닿지 않는” 일방적인 통신을 계속하며, “가느다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 희망은 ‘밤마다 자라는 불면’이나 “저절로 자라나는 머리카락처럼”, 멈출 수 없는 생리 현상에 가깝다. 그렇기에 화자는 희망이 “아득한 공간 저 너머/ 무한히 흐르도록 내버려둡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의 관계는 끝났지만, 화자는 그 끝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끝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끝난 상태 자체를 무한히 이어간다. 그에게 끝은 한 번에 벌어지고 마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아침 “동쪽 끝방”에서 다시 맞이해야 하는 현상이다. “아침이 눈을 뜨면/ 끊어진 교신을 다시 잇겠습니다”라는 다짐과 “그곳의 안부를 한 번쯤,/ 재생해 주시겠어요”라는 질문은, 끝이 끝내 끝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보이저1호가 인류의 인사가 담긴 “골든 레코드”를 싣고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것처럼.
“혼자 흐르는 음악”은 끝을 떠도는 화자 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음악은 “골든 레코드 속/ 베토벤의 카바티나 선율”과 다르지 않다. 끝을 유보함으로써 끝에라도 머무르려는 화자의 애처로운 기다림과 응답 없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고독한 발신. 「혼자서도 멀리」에서의 끝은 이렇게 닿을 수 없는 상대를 향해 안부를 묻는 실존적인 차원에 맞닿는다. 이 작품이 단순히 이별한 연인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이다.
끝이라는 말에서 놓여나기를
돌고 돈다는 세상사처럼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끝은 오는 것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곳에서
‘다시’를 외치기보다
‘그래’를 노래하기를
내게 있는 그 무엇으로도
너를 되돌릴 수는 없는 것
엇박자로 흐르던 것도
어느 순간 제 길을 찾는 것처럼
수많은 흔들림이
너와 나의 삶이 되더라
그래도
늦게 찾아올수록 좋은 건
끝이라는 말
― 조경옥, 「늦어도 괜찮은 말」 전문
앞선 두 작품이 끝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늦어도 괜찮은 말」은 끝 자체를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온다. 화자는 먼저 “끝이라는 말에서 놓여나기를” 소망하는데, 이는 단순히 끝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끝’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주는 중압과 공포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이를 위해 화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끝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 즉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돌고 돈다는 세상사처럼/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오는 ‘환승역’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끝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그는 “ ‘다시’를 외치기보다/ ‘그래’를 노래하기를” 택한다. 여기서 ‘다시’가 끝을 부인하는 말이라면, ‘그래’는 끝이 불러오는 “수많은 흔들림”조차 “너와 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긍정은 “엇박자로 흐르던 것도/ 어느 순간 제 길을 찾는 것처럼” 삶의 혼돈 속에도 보이지 않는 질서와 흐름이 있다는 믿음, 즉 순리를 향한 신뢰에서 비롯한다.
「늦어도 괜찮은 말」의 전언이 미더운 것은 ‘끝’을 낭만화하거나 맹목적으로 예찬하지 않는 데 있다. “늦게 찾아올수록 좋은 건/ 끝이라는 말”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앞선 긍정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이성적으로는 ‘그래’라고 긍정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내게 있는 그 무엇으로도/ 너를 되돌릴 수는 없는” 상실의 아픔과 한계를 절감하는 것이다. 그저 초연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여전히 두렵고 피하고 싶음에도 그것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려는 태도이다. 끝을 대하는 이 성숙한 자세를 보면, “늦어도 괜찮은 말”은 ‘끝’이 아니라 ‘그래’ 같기도 하다. 시를 읽으며, 끝 앞에서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함이 우리 삶에 조금 늦게 찾아와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저마다의 목소리로 ‘끝’을 풀어낸 세 편의 작품을 훑어보았다. 먼저 반려견과의 사별을 다룬 「슬픔의 비중」은 끝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며, 죽음이라는 절대적 끝을 재회의 약속으로 승화시킨다. 「혼자서도 멀리」의 시선은 끝의 경계에 머무른다. 그곳에서 이별을 유예하는 화자를 통해 끝을 단발성 사건이 아닌 동적인 현상으로 그린다. 「늦어도 괜찮은 말」은 끝을 삶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조망하며, 그것을 자연스러운 순환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긍정의 자세를 드러낸다.
세 작품은 모두 끝을 허무, 공백, 절망 따위로 방치하지 않는다. 끝 앞에서 침묵하거나 도망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해석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려 애쓴다.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끝이라는 한계에 맞서는 태도일 것이다. 그 태도에 따라 끝은 더는 끝이 아닐 수 있다. 또 한 해가 끝나가는 이때, 이들 작품을 읽으며 끝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가만히 점검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