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길은 멀까.
박래여
시어머님은 다시 119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코로나 검사 후 면회가 가능하단다. 가래도 끓고 폐렴이 다시 온 것 같단다. 이번에는 소생이 불가할 것 같다. 새벽꿈이 어지러웠다. 며칠 전 꿈에 시아버님과 형님, 동서를 봤었다. 남쪽인 시댁 대문간을 북쪽으로 냈다. 우리가 외출한 사이에 시아버님이 집을 고쳤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던 방 앞을 깨끗하게 다듬어 그쪽으로 대문을 냈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갈 생각일까. 가실 분은 편하게 보내드리는 것도 마지막 효도지 싶어서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마침 막내시누이 부부가 어머님 면회를 왔다. 이미 정해진 코스인데도 딸의 입장은 다르다. 나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는다. 내가 어머님을 잘못 모신 것처럼 들린다. 나도 할 도리는 다 했다. 자격지심일까. 엄마가 그리 소중하면 모시고 가지. 좋은 병원 찾아서 모시지.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면 입이라도 닫고 있지. 시누는 병원도 후지고 욕창치료도 제대로 안 했다고 화를 낸다. 우리가 어머님을 후진 병원에 모셔놓고 방치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평생 모시고 다닌 단골 종합병원이다.
어머님은 산소 호흡기를 꽂았다. 산소 수치가 자꾸 떨어진단다. 기운이 없어 눈도 못 뜬다. 산송장 같지만 여전히 몸을 움직이고 눈을 뜨려고 애를 쓴다. 말귀는 다 알아 듣는 것 같다. 병동으로 옮겼다. 지난번처럼 한 이틀 지나면 또 소생할 것인지. 이대로 돌아가실 것인지. 노인의 수명은 감을 잡을 수 없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링거 병, 온갖 검사는 기본이다. 죽음도 자신의 의지대로 편안하게 맞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일까. 무슨 애착이 저리 많아 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일까.
어머님을 바라보는 내 눈 밑이 씰룩거린다. 눈꺼풀이 파르르 떤다. 뇌졸중이나 뇌경색 전조증상 같다. 예민한 성격을 예민하지 않은 척 하다가 넘어질지 모르겠다. 복병은 언제 어떻게 나를 덮칠지 모른다. 어머님이 더 이상 회생할 수 없다면 고생 덜하고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무거운 짐 진 자들 중 한 명이 되어 그 무거운 짐을 벗고 홀가분해지고 싶다. 홀가분하다고 느끼는 순간 나를 강타할 복병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너무 힘들다.
어제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자르고 나오며 참 오랜만에 개운하고 후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님의 임종을 예감했던 것 같다. 지난번 한 달 여 병동에 계시다가 퇴원하고 다시 요양원으로 모신 후 불안하고 불편했다. 하루도 편안하지 않아 불면의 밤을 보내는 중이었다. 언제 임종 소식이 올지 몰라 긴장하고 살았다. 머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미음을 끓여 면회를 갔을 때 의외로 눈빛도 맑고 건강해 보여 좀 더 오래 사실라나 싶었다. 시아버님 꿈을 꾸고 시아버님 생신을 생각했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가려나 보다. 미리 짐작했었다.
오늘, 내 예감이 적중한 느낌을 받았다. 달력을 봤다. 아버님 생신날이다. 어쩌면 어머님이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형제자매간에 나온 이런 저런 잡음에 시달릴 때마다 내 심장에 상처가 났다. 그 상처는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해결될까. 시댁 식구들 안 보고 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없어질까. 남편까지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를 내가 안쓰럽게 바라본다. 처녀가 임신을 해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각자 제 할 짓은 다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평생을 시부모 모시며 고생한 내게 돌아오는 것은 칭찬보다 비난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효자효녀면서 왜 두 노인을 안 모셨느냐고 괌이라도 지르고 싶다. 내가 힘들어 허덕일 때 당신들이 뭘 도와줬느냐고. 우리는 빚으로 살면서 두 어른 모실 때 당신들은 뭐 했느냐고 따지고 싶다. 마지막 길에서 처신 잘 못하신 시아버님께 맺힌 응어리는 아직 단단하다. 돌아가신 시아버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상노인이 되면 분별력이 떨어져 그렇다고. 워낙 살고 싶어 하신 어른이라 그럴 수 있다고.
병동에서 어머님을 지키다가 집으로 왔지만 저녁 8시 반 경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산소 포화도가 자꾸 떨어진다고 사망할 수도 있단다. 서둘러 병원에 갔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다고, 선머슴아 같은 며느리 사람 만들어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이제 편안하게 저승길 가시라고. 누구나 한 번은 가야할 길이라면서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 환생하여 하고 싶은 것 다 하시라고 덕담도 해 드렸다. 남편은 운다. ‘엄마, 고생만 시키고 끝까지 집에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하면서.
그러나 어머님의 산소 포화도가 안정을 찾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11시가 넘었다. 대구 삼촌도 오셔서 어머님을 뵙고 갔다. 눈도 못 뜨는 어머님이 살아있는 것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숨결이다. 한 번씩 몸을 뒤척인다. 얼굴은 편안해 보인다. 죽음을 무서워 말라고 했다. 누구나 한 번은 겪는 길이라면서 부처님이 좋은 곳으로 모실 것이라고 안심하고 떠나시라고 했다. 어머님이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아흔 네 해를 사셨으니 적게 산 것도 아니다. 임종 소식이 올 것 같아서 우리 부부는 밤잠을 설쳤다. 저승길은 멀까.
다음 날 오후, 어머님은 떠나셨다. 남편과 손녀가 잡은 손을 놓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곳으로.
2023. 8.
첫댓글 돌아가신 시아버지 생일을 기억하는 효부 이십니다. 저는 우리 엄마 아버지 생일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늙은 부모님을 봉양하는 종부의 진솔한 마음이 그대로 녹아 있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다시 건강을 회복해서 일상으로 돌아 올 희망이 없는 목숨의 끈을 연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할 때 비극 그 자체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멸해 가는 삶을 자연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가족들이 쓸데 없는 말로 상처를 남깁니다. 그들이 무지한 탓입니다. 저는 그 일로 제 형제들과 절연해 버렸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지차들도 그들 자신이 그들 집안의 조상이 되는 게 자연임으로 형제간의 인연도 순리를 찾아서 멀어지려고 그런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애면글면 하면서 마음 썩힐 필요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게 순리이듯 형제지간도 멀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죽은 제사 아무리 챙겨봐도 밥 한 술 못 뜨고 갑니다. 살아 있을 때 손이라도 한번 더 잡아 주는 게 중요 합니다. 나는 아버님이 요양병원에 계실 때 둘이서 "반포지효"를 이야기 했습니다. 제 말을 알아듣고 제 손을 잡고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통했습니다. 그렇게 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