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서야 되겠습니까.
자국국민을 지켜야할 군대가 자국 국민을 학살 하는게.
어느나라가 이런 개같은 짖을 한답니까.
그런 범죄을 저질러 놓고도 아직 까지도 살아 쉼쉬는,
인간들 저승사자는 뭐합니까,
세상이 개탄 하고 통곡 할 일 이라고 부르짖고 싶네요,
개보다도 인간들 지금이라도 활복해서 지은죄 조금이라도,
뉘우치는 성의를 보여주면 올바른 세상이 되겠지요
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80년 5월 광주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은 1979년 5월이었다.
공수 교육과 특수전 교육
(구체적으로는 게릴라 침투나 사회 소요에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에 배치된 것은 9월 말 경이었는데
다음 달 10월에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12,12 사태가 발생하면서 특전사 장병들은
당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던 신군부 세력의 기반이 되어
자신들도 모르게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시해 사건이 있고 난 후
전쟁 경계령인 데프콘Ⅲ가 발동되자
강원도 화천의 최전방 공수여단에서 근무하던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긴장된 군생활을 해야 했다.
더구나 12· 12 사태 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 의지가 드러나면서
일어난
1980년 봄의 수많은 소요와 혼란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될
공수 요원들의 생활과 훈련을 한없이
고달프게 만들었다.
게다가 정신 교육을 통해 대학생들에 대하여 들은 것이라고는 그들이
모두 좌경 용공분자들이라는 것뿐이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훗날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서슴지 않게 한 심리적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전남대학교 학내에서 비상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로운 집회를마친 학생들이민주주의 사망을 알리는 상여를 메고
비상계엄을 땅에 묻는 장례를 치렀습니다
가자!! 도청으로...
가자!! 도청으로...
전남대 정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학생들
전남대 정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학생들
1979년 12월 30일
경 종무식을 하면서
연초 3일간의 휴무에 들어갈 때
마지막 종회 시간에
들어온 중대장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 공수 요원들은 점프(낙하) 수당으로
일반 보병 부대의 병사들보다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새해부터는 특전 병사들을 200%의
봉급과
500%의 점프 수당 인상이라는 파격적인
대우 향상을 약속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들뜨고 즐거워하던 부대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당시 일병이었던 나도 그 이야기를 믿고
나의 봉급을 계산하니
꽤 큰 액수여서
군생활을 하면서 돈을 좀 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아마 이러한 조치들은 특전 요원들을 자신의 충성스런 친위대로 만들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의도한 선심이었을 터이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학생들이 도청앞에 집결하자
그러다
강원도 화천에 있던 우리 여단이 서울로 대대적인
부대 이동을
한 것은1980년 5월 초 무렵으로 기억된다.
이는 잠시 시위 진압을 하기 위해 출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장기적인 주둔을 목적으로 한 출발이었다.
매년 7, 8월이 되면 공수 부대 원들은 바닷가로 나가 몇 주씩
수영 교육을
받는데 봄에 부대를 옮기면서 수영 교육
준비까지하고 가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는 시위를 진압하고는 부대로 복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비상 계엄과 그 이후의 일들을 계산한 장기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가?
공수 요원들은 신발끈도 풀지 못하고 전투복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며
언제라도 출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해야만 하였다.
또 비상 계엄이 선포되기 며칠 전인가는
특전사령관이
공수여단 산하의 모든 부대에 1,500만원씩의 하사금을
내려
우리 대대에서도 400만 원을 받아 돼지를 잡고
술을 마시며 큰 회식을
한 일도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며 우리는 정신 교육을 받기도 하였는데,
강사는 부마 사태를 진압한 여단의 한 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단호하게 시위를
진압하였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고
부대원들 역시 그것을 영웅시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여단이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된 것은 다음날인 18일
오후5시
경이었다 새벽 2시경에 도착해 보니 광주였고 우리가 들어간 곳은
조선대학교였다.
시민들이 합세하여
군중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평화로운 집회를 마친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학교로
거기에는
이미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피로에 지친 우리는 대충 짐을
정리한 후 3, 4시경에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었을까?
아침 식사도 끝내기 전에 갑자기
출동명령이 떨어져
우리는 급히 단독 군장을 하고 총검을 꽂고
군용트럭에 탑승하여
소위 무력 시위라는 것을 하여야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전라북도 금마에 있던 한 공수여단이
어제 광주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대학생들의 저항이 거세었고,
이에 강경하게 맞선 공수여단의 진압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상당수가 다치고 여론이 나빠지니까
그들을 대전인가로 빼고
우리를 대신 투입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대가 광주에 처음 도착한 것은 19일 오전이었다.
전날의 잔혹한 진압 때문인지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는 했지만
간혹 몇백 명쯤 모여 구호를 외치다 군인들이 쫓아가면 도망할 뿐
그렇게 격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학생들의 시위와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화가 난
군인들은 난폭해지기 시작하였고,
이제는 시장이나 거리 어디서고 젊은이들은 무조건 잡아서
두들겨 패고 옷을 벗기고 진압봉과 총검으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여 명의 공수 요원들은
흩어져 시위하던 학생들이 건물이나 주택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 들어가 거기 있는 젊은 사람들은 다 데모대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밟고 때렸다.
그러다보니 생업의 현장에서
혹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애꿎게 잡혀 짓밟힌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속한 중대 병사들이 한 여관에 들어가 한 젊은이를 찾아내 얼마나 심하게 다루었는지,
얼굴과 머리에 피가 낭자하고 공포에 질린 그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빌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IMG1@공수부대 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오고
@IMG2@ 대학 교수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IMG3@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졌지만
@IMG4@중고등 학생들까지 시위에 나섰다
이런 사정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에게 잡혀 온 사람들은
옷을 벗기우고 군화에 채이며 머리를 땅에 박고
줄지어 앉아 있다가는
군용차량에 실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나 조선대로 온갖 학대를 다 받아가며 연행되어야 했다.
시장이나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에는 용감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태가 도를 넘는 순간부터는 감히 대드는 사람도 없고
다들 눈치만 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
시내를 평정하고 돌아오던 지휘관들과
공수부대 요원들의 자신만만한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저녁 늦은 시간부터 시위대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군인들은 자제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있을 뿐 무력 해산을 시키지 않았는데,
거리에는 시위대뿐 아니라 시민들의 숫자 또한 엄청나게 늘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위한 군인들을 보며
당신들 대한민국 군인들 맞느냐, 혹시 공산군 아니냐고
묻기까지 하였다.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이런 사태 앞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어떻게 할 바를 결정하지
못하고
열심히 상급 지휘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작전
지시를 받는 것을 보았다.
@IMG5@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와
@IMG6@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 군인들
@IMG7@ 무차별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 군인들
@IMG8@곤봉으로 내리치고
@IMG9@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짓밟고
@IMG10@학생들을 진압하는 공수부대 군인들
@IMG11@원산 폭격을 시키고
@IMG12@붙잡힌 학생들을 옷을 벗겨 연행하는 군인들
@IMG13@포로처럼 손이 뒤로 묶인채 끌려가는 학생
@IMG14@짐짝처럼 군 트럭에 실린 학생들
@IMG15@일반 시민도 연행하는 공수부대 군인들
@IMG16@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
@IMG17@군 트럭위에 무릎꿇은 시민
이윽고 부대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그대로 두고 조선대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군인들을 환송하는
일도 있었고,
시위대는 퇴각하는 군인들을 뒤따르며 군가를 불러
주기도 하였다.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순순히 퇴각하는
공수 요원들을 보고
군인 대열에 뛰어들어 군인들에게 악수를 신청하고
안아 주기도 하며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은 참으로 묘한
느낌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태가 심각한 양상을 보이면서
군인들은 작전상 철수를 하는 것인데,
마치 군인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좋아하다가
결국은 더 크게 멍든 게 아닌가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토록 좋아하던 순진한 그 젊은이는
과연 살아남아 있을까?
우리가 퇴각하던 그날 밤 공수요원들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대 앞에서는
무서운 충돌이 일어났다.
아마 9시쯤이었을 것이다.
뒤따르는 시위대를 막기 위하여 군인들은 최루탄을
계속 터뜨리며 퇴각하였는데,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중 일부가
소방차를 탈취하여 군인들의 저지선을 뚫고
지나가는 위험한 일이 발생하였다.
@IMG18@신발은 나딍굴고
@IMG19@흩어진 신발 사이에는 핏자국만
@IMG20@ 들것도 없이 부상자를 나르는 시민들
@IMG21@ 사망자 속출
또 밤하늘에 화광(火光)이 솟았는데
후에 듣기로는 세무서인가가 불에 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둡고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갑차를 앞에 놓고 공포 사격으로 시위대를 막던 대대장은
무전으로 급히 실탄 사격을 요청하는 것 같았는데,
허락되지 않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자꾸만 조르는 것 같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시위대가 돌아가라는 군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라온 것은
조선대 내에 잡혀 있는 시민들을 풀어 달라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과격한 일부 학생들이 소방차로 저지선을 뚫기도 하고
돌을 던지며 기습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두운 밤에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은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였고,
장갑차를 앞세워 추격하며 잡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하였는데,
아마, 이날 밤이 광주사태에서 본격적인 살륙이 시작된
날이 아닌가 싶다.
ㅡ 다음 ㅡ
이경남*<25년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중에서
특전사 11공수 63대 9지역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일병으로 광주에 투입되었고
현재는 강원도 횡성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경남 목사가
당대비평에 투고한 글을 사진 자료와 함께 재구성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