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 : 2705 글쓴이 : 시사랑사람들
조회 : 0 스크랩 : 0 날짜 : 2006.12.30 12:18
이락 후세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현지 알자라 후지 방송 보도는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을 교수형에 의하여 집행되었다고 전하며 미군 당국은 그의 소지품을 가족에게 되돌려주었다 후세인 전 대통령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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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다음넷에서 시사랑사람들카페 뉴스로
처음 보도한 내용 전문이다
다음 카페기자단 뉴스로 송고했는데 [최초 기사 입력]은
오늘 30일 12시 18분에 알자라 후지 티브 통해 다음에 기고했는데
다음이 받지않아 카페기사를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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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란을 빚어온 조금 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CNN과 BBC, 그리고 아랍권 방송 등 주요 외신들은 조금 전 12시 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에 대해 교수형이 집행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후세인 전대통령에 대한 사형집행은 이라크 주둔 미군 시설이 있는 바그다드 그린존 안에서 이뤄졌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후세인 전 대통령의 마지막 유언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사형이 선고됐던 후세인 전대통령에 대한 사형집행이 불과 나흘만에 이뤄진 것은 이례적인 일로 향후 이라크 종파 분쟁이 더욱 격렬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오늘 사형이 집행된 후세인 그는 누구인가
1937. 4. 28 이라크 티크리트출생
이라크의 대통령(1979~). 후세인은 1957년 바트 사회주의당에 입당하여 바트당이 주도한 이라크의 아브둘 카림 카셈 총리 암살사건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고 시리아·이집트 등지로 피신했다. 그곳에서는 1962~63년 카이로법과대학을 다녔으며, 1963년 바트당이 이라크에서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바그다드법과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해에 바트당 정권이 몰락하자 그는 체포되어 이라크 감옥에서 여러 해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후 다시 망명하여 바트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쿠데타를 지휘하여 1968년 다시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후 국가원수인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1972년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1979년 정부의 개방을 주장하던 그는 그해에 바크르가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후 그는 혁명사령평의회 의장, 총리 및 기타 직위를 겸임했다. 대규모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그의 지배체제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완전히 무마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그를 개인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목표는 아랍 세계의 지도국으로서 이라크가 이집트를 대신하는 것이었으며,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석유 수익을 이용하는 것 등이었다.
샤트알아랍 수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한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곧 소모전의 양상을 띠어갔다. 그는 전쟁비용과 석유수출중단 사태로 야심에 찬 경제발전계획을 축소해야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해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1988년 이란과 이라크는 드디어 종전에 합의했다. 이라크는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외채를 지고 있었으나 그는 계속해 군대를 증강했다. 1990년 8월 그의 군대는 인접국가인 쿠웨이트를 기습공격했다. 후세인은 표면적으로 이라크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쿠웨이트의 방대한 석유 수입을 이용려 한다고 밝혔으나 그의 쿠웨이트 점령은 전세계적으로 신속한 대이라크 무역 제재조치를 유발시켰다. 또한 후세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국 주도의 대규모 군사력이 증파되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비난하면서 그러한 불법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국제연합(UN) 결의안이 통과되었는에도 쿠웨이트에서 그의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국제여론을 무시했다. 1991년 1월 16일에 시작된 6주일 전쟁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이라크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구축했다. 전쟁에서 대패한 후 후세인은 국내적으로 이라크의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으나 간신히 이 폭동을 진압하고 그의 권력을 유지했다.


후세인은 집권 이후 20여년간 개인숭배와 함께 억압적인 통치를 계속해 왔다. 그의 집권 이후 한때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던 이라크는 피폐한 제국으로 전락했으며 석유로 벌어들인 국부는 낭비됐다. 아랍세계 지배를 꿈꾼 후세인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을 일으켜 무려 8년간 참혹한 전쟁을 지속했으나 많은 국민들의 희생만 남긴 채 휴전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 걸프전을 촉발하지만 미군 주도의 연합군과 유엔안보리 제재 결의안에 굴복해 개전 45일만에 항복하고 만다.
후세인의 압제는 악명높다. 그는 연좌제/P>
를 통해 자신의 정적들의 가족과 친구를 모두 처형해 단체로 땅에 묻었다. 탈영병들의 귀를 잘랐으며 외화 밀수입자들은 잡히는 족족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또 매춘부 수십명을 참수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번의 결혼을 통해 6명의 자녀를 뒀으며 그를 그대로 빼닮은 아들 우다이
와 쿠사이는 고문과 강간 등으로 악명높았다. 이들은 미군의 이라크 침공 4개월만인 2003년 7월, 이라크 모술 지방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다 숨졌다. 후세인은 5개월 후 고향 티크리트 인근 토굴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에게 검거됐다.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두자일 사건'으로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기소돼 법정에 섰으며 2006년 11월5일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후세인은 군인으로서 총살을 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26일, 후세인과 그의 측근 2명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