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黃昏)
오장환
직업소개소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모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알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群集)의 대하(大河)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 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鄕愁)는 실마리처럼 풀려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우고 밟히며 스미어오는 황혼에 맡겨버린다.
제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흩어져 버리고
나는 공복(空腹)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띄엄띄엄 서 있는 포도
(舖道)우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어 나의 마음을 전서구
(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 묻은 회상이 맺어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鶴)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隋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
에서, 아무도 보는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
어버린다.
(시집 『성벽』, 1937)
[어휘풀이]
-알로 : 아래로
-포도 : 포장도로
-저자 :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가게. 큰 길거리에서 반찬거리를 사고파는 장(場)
-전서구 :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
-고삿 : 마을의 좁은 골목, ‘고샅’이 표준말
-아베 ; 아비, 아버지
-타태 : ‘타태(隋怠)’와 같은 뜻. 게으름.
[작품해설]
1930년대에 들어서 지식인 실업자(룸펜)들의 급격한 증가는 많은 문학 작품들의
주요 제재로 등장하는데, 소설로 보자면 채만식(蔡萬植)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
유진오(俞鎭五)의 「김강사와 T교수」(1935)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이러한 지식인
의 문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더욱 첨예
하게 드러난 식민지 모순에 직접적으로 근거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1
930년대 후반부터의 문학 세계는 그 동안 직접적으로 드러났던 현실 인식이 내면화되
어 상징적으로 표출되거나, 아니면 현실을 도외시한 먼 역사로의 도피이거나, 일상사의
사소함 속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획득하는 자기 침잠의 세계로 전환된다.
이 시는 이렇듯 1930년대 후반 식민지 지식인이 겪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황혼’의
이미지와 연관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정든 고삿, 썩은 울타리, 늙
은 아베의 하-얀 상투’의 고향을 떠나온 ‘병든 사나이’로서 황혼의 거리에서 자신의 ‘키
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서 있다. 일을 찾아 직업소개소에 들러 보지만, 자신과 같이
병든 사람이 할 일이라곤 전혀 없다. 자신의 키보다도 작은 가로수에라도 의지하고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는 병약한 몸으로서 거리를 나서 보았지만, ‘공복의 가는 눈’만 겨우
뜰 수 있을 뿐, 근육은 풀어져서 ‘힘없는 분노와 절망’ 속에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적 롸자에게도 아름답던 고향의 추억은 있다. 그러나 그 고향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날마다 야위어가는 병든 학일 뿐이다. 그러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지만, 도시의 현실은 어떤가,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
계는 나날이 늘어나’서 더 이상의 병약한 노동력은 요구하지도 않는 황혼 속에서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버’릴 뿐이다.
이 시는 이처럼 황혼의 어스름에서부터 밤이 밀려오기까지의 시간적 경과 속에서 시적
자아가 가로수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지식인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명시적으로 작품 속에 지
식인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젊음의 자랑과 희망’, ‘타태와 무기력’ 등의 이미지
와 ‘노동’, ‘포도’, ‘전서구’, ‘학’ 등의 시어는 그를 통해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지
식인적 성격을 어느 정도 드러내 준다. 한편으로 이 시는, 과거의 밝은 이미지와 현재의 어
두운 이미지의 겹침 효과가 밝음에서 어두움으로 전환하는 ‘황혼’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잘
조화되어, 시적 자아가 처한 비극적 환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날마다 야위아가는’, ‘병든 학’,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가고’ 등의 구절은 그
러한 비극적 환경이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식민지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근거함을 보여
준다.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우리는 1930년대 후반의 한국시의 내면화된 현실주의적 특성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작가소개]
오장환(吳章煥)
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1930년 안성보통학교 졸업
1931년 휘문고보 입학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을 발표하여 등단
1936년 『낭만』,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맹원, 월북
시집 : 『성벽(城壁)』(1937), 『헌사(獻詞)』(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오장환전집』(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