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글쓰기
⑥ 결말 쓰기- 화룡점정 매듭
화가가 사찰의 벽에 용 그림을 그렸다. 비늘이며 발톱이며, 이빨이며 곧장 날아갈 듯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용의 눈에 눈동자가 없었다. 그 이유를 묻자 화가는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이 벽을 박차고 날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용의 눈을 그릴 것을 재촉했다. 화가가 눈을 그리자 그 용은 벽 속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화룡점정(畵龍點睛)에 대한 고사성어 풀이다.
이제부터 당신은 글을 쓸 때 이 이야기를 늘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주문처럼 외워야 한다.
‘나는 멋진 결말을 쓰겠다. 그럼으로써 그 글을 한 마리 새처럼 독자의 가슴으로 날아가게 하겠다.’
드라마나 영화 혹은 만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의 결말에는 ‘방점’을 찍어야 한다. 때론 평범한 마침표가 될 수도 있고, 느낌표나 물음표가 될 수도 있다. 말없음표(……)처럼 독자가 결말을 쓰도록 떠넘길 수도 있다.
‘서두는 호기심을 끌고, 결말은 여운을 남겨라.’ 글쓰기의 금칙이다. 그로 인해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인공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다. 희극보다 비극의 유통기한이 긴 까닭이다. 이는 결말 쓰기의 중요성과 중압감의 상징이다.
결말은 매듭이다. 운동화를 신고 끈을 질끈 동여매는 작업이다.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야 한다. 읽는 이가 ‘참 야무지다.’고 느낄 수 있는 매듭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화룡점정이 될까? 다음은 언론 기사를 수정해 만든 글이다.
축구에서 페널티킥은 특별하다. 그 순간, 수만 명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인다. 그라운드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페널티킥을 하는 선수는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 실패하면 모든 비난을 혼자 감수해야 한다. 그런 까닭에 페널티킥에는 ‘11m 러시안 룰렛’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었다.
흠잡을 데 없이 좋은 글이다. 승부차기를 러시안 룰렛에 비유한 부분은 보통의 글쓰기 실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비유컨대 용의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런데 다음처럼 하면 화룡점정이 된다.
‘11m 러시안 룰렛.’ 페널티킥의 다른 이름이다. 선수들은 수만 명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동시에 실패할 경우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엄청나게 큰 부담과 긴장이 총구 속에서 격발을 기다리는 셈이다.
결말은 온몸을 던지는 일이다. 계곡 사이를 휘젓고 내려온 물줄기가 장대한 폭포 아래로 낙화하는 일이다.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거나 웃음보를 빵 터뜨린다. 아래는 소설가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서문이다. 그는 작가로 인기를 얻은 뒤 방송과 강의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문득, 에너지의 고갈과 몸과 마음의 소진을 느낀 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외국으로 떠났다.
저녁이면 젖은 비옷 같은 영혼을 추슬러 여의도를 향했다. (중략) 방송 역시 강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것 역시 한 편의 쇼다. 정해진 시간에 시작되어야 하고 또 끝나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손님들이 다녀간 빈자리에 남아 나는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내 내면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중략)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전적인 저주의 형식을 닮았다. 너는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소설 쓰기에 대한 얘기를 해도 좋다. 그러나 절대로 그 시간에 네 자신의 소설을 써서는 안 된다. 너는 다른 사람의 예술에 대해 얼마든지 말해도 좋다. 신나게 떠들어라. 하지만 그 시간에 네 소설을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써서는 안 된다.
나는 그 저주의 대가로 월급과 연금을 보장받고 꽤 쏠쏠한 출연료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이었다. 쉬익쉬익,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작품 이외의 활동으로 창작의 샘이 말라버린 상황. 작가는 빈 내면의 허허로움을 빨대에 빨린 상황을 빗대 생생하게 드러냈다. 한마디로 화룡점정이다. 결말은 반전이다. 평범한 글을 센스 있는 글로 둔갑시킨다. 진부한 글을 괜찮은 글로 변신시키고 맥없는 글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독자는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아래 글은 강력한 끝 문장의 기술을 구사하고 있다.
“당신 진짜로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해?”
나는 약간 주저하다 대답했다.
“응, 가끔…”
아내는 잠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바로 몸을 내 쪽으로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만족하는데…”
내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데, 아내의 나지막한 한마디가 내 가슴을 깔끔하고도 깊숙하게 찌른다.
“아주, 가끔…”
―김정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결말은 조용한 드라마다. 극적인 의도를 숨긴 채 살짝 드러낸다. 독자의 감각세포를 일깨우며 뇌리에 자리 잡는다. 다음은 영화 〈건축학계론〉을 들으면서 첫사랑에 감전되고, 훗날 집 짓는 과정을 통해 감회에 젖는다.
이 영화는 보편적 연애의 구체적 경험을 바닥에 깔고 첫사랑을 구성하는 1만 개의 너트와 볼트로 견고한 집을 짓는다. 이 집에 들어선 이후 관객들은 순간 먹먹하게, 때론 아련하게 정신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기억의 최루다.
―경향신문, 2012년 3월 15일자
‘건축’이란 키워드를 가지고 ‘첫사랑을 구성하는 1만 개의 너트와 볼트로 견고한 집’이라는 재치 있는 비유를 통해 영화의 완성도를 말하고 있다. 영화를 정밀하게 세공한 건축으로 비유한 뒤 관객이 그곳에서 느낄 여운을 예쁘게 드러냈다.
글은 미사여구가 많다고 잘 쓴 글이 아니다. 무난하게 써도 전혀 문제없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 포인트를 주면, 다시 말해 독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지도록 만들면 전체가 살아난다.
슬픈 사랑을 한 적 있는가.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마지막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좋은 끝 문장이 그렇다. 결말 쓰기를 잘하면 일상에서도 멋진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다 보면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혹은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어느 순간 용기가 혀를 쑥 내민다. 이럴 때 딱 들어맞는 표현이 있다.
희망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 ‘글쓰기, 어떻게 쓸 것인가, 한 줄도 쓰기 어려운 당신에게(임정섭, 경향BP, 2013)’에서 옮겨 씀. (2020.12.20.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