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침 / 권현옥
더럽거나 달콤한 극단의 정서. 청춘에서 멀리 걸어 나온 나는 그 끝 어느 쪽에 매달려 있는가는 뻔하다. 이제는 침을 섞었던 달콤한 기억조차도 모르쇠 하고픈 마음이고 게다가 충동도 대충 사라졌으니 맛도 잃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쪽 끝, 더럽다고 인식한 기억 쪽은 변함이 없다. 입안의 세균이 기침이나 재채기로 무차별적 분배가 이뤄진다고 말하는 건강 상식은 기분으로만 느꼈던 참에 대한 반감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 준 셈이다. 입 밖으로 나온 침과 입 안에 있는 침의 차별을 확실하게 해도 되는 힘을 얻었다.
그래, 침이 입안에 있으면 착한 침이고 입 밖으로 나온 침은 나쁜 침이다. 퇴계 이황도 ‘매일 아침 침을 삼키면 건강에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가. 입안의 침은 살균하고 음식물의 분해와 소화를 돕고 잇몸과 치아를 건강하게 하는 조용한 조력자다. 그러나 그 좋은 침이 입 밖으로 나와 존재를 알리면 더럽다고 말할밖에 없다.
침 튀기며 말한다는 것은 흥분해서 입술의 운동 속도와 침의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고, 아무 데나 침을 뱉는다는 것은 몰상식해서거나 분노의 표출이고, 악의를 품고 뱉었다면 그것은 독을 품은 뱀의 공격과 같아 치졸한 무기일 수 있다. 침을 질질 흘리는 것은 뇌가 긴장하지 않는다는 증거라 칠칠맞아 보이고 욕심을 품은 사람의 표정이나 의도를 '침 흘리고 있다'고 비유하니 절대로 침은 흘릴 일이 아니다. 입안에 있을 때는 피만큼 중요한 액체지만 밖으로 배출되면 부패한 찌꺼기나 독에 가까운 오물이어서 입안에서 잘 다스려야 하고 없는 듯 존재해야 한다.
가끔 벌레에 물려 간지러우면 그 부위에 침을 바르는데 그땐 침을 밖으로 뱉는 게 아니라 꺼낸 것이라 더럽다는 느낌이 그다지 안 들었나 보다.
어릴 적부터 침은 그다지 아름다운 액체가 아니었다.
“퉤, 퉤, 퉤. 이건 내 거야 침 발라놨어.”
군것질거리보다 형제 수가 많다던 시절. 어머니는 적절한 이유를 대면서 음식물을 나누어 주셨다. 욕심과 속도가 부족해 다 먹은 형제들의 표적이 되는 먹잇감을 쥐고 있을 때면 불안해졌다. 그때 음식을 사수하기 위해서 음식에 침을 발라 놓으면 웬만해서는 빼앗기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강력한 방어책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밥상에 앉으면 네 수저 내 수저 부딪쳐가며 먹었다. 냄비나 뚝배기에 수저를 담그며 침을 섞었다. 인식조차 못한 생활방식도 한몫했지만 피를 나눈 사이니 침 정도는 당연히 나눌 수 있었다. 정만 있으면 가족이 아니어도 한 밥상에 앉아 침을 나누었다.
요즘은 가족이라 해도 앞 그릇을 놓고 먹는다. 전골냄비에 있던 찌개를 개인 앞 그릇에 국자로 조금씩 덜어내면 냄비에 가득 찼던 음식은 금세 바닥을 보이고 각자의 음식도 방금 전에 본 것처럼 풍족해 보이거나 맛깔스럽지가 않다. 덜어내기 전 호사한 풍미를 기억하며 먹는 셈이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위생을 먼저 챙기는 문화인이 되어 버렸는 걸. 수저와 젓가락을 침을 섞는 일능 꺼림칙한 일이 되었다.
입이 바짝 마르는 세상살이를 거치면서 침에 관한 정서가 나도 모르는 사이 극단보다는 몸의 지배에 순종하고 있다. 더러움과 달콤함의 극단적 정서 가운데서 침의 효용이 내 회선을 교란시킨다. 해도 나는 입안에 침이 잘 고이기만 한다면 고마워 침을 꿀꺽 삼킬 요량이다. 반찬을 맛으로 먹기보다 영양으로 먹는 부류가 있듯이.
키스와 뽀뽀를 분류한 기준이 침이란 것을 안 것은 요즈음. 누군가가 정리해 준 말에 박수 치고 있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성행위는 사랑 없이도 할 수 있지만 키스만큼은 사랑 없인 어려운 것이란 설이 있다.
짜릿하다는 것은 원래 오래가지 않는 게 맞다. 오래갈 수 있다면 애초부터 짜릿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과 꽃과 전율을 주는 사건들이 그렇듯, 반복을 주는 짜릿함은 없다. 그러니 청춘에, 잠시 젊음에 오고 갔던 짜릿한 침의 정서가 한쪽 구석에서 순식간이었다 해도 괘씸치는 않다.
‘침은 더럽다'는 이미지를 품었다가 사랑에 의해 습격을 받고 벌떡 일어났던 또 한쪽 끝의 이미지, ‘달콤하다’를 느낄 수 있던 시간들이 대충 지나간 것 같다. 다시 달콤한 침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 하니 바늘구멍처럼 그쪽 세상이 좁아져 있다. 아제는 음식이나 세상일을 바라볼 때 입안에 침이 잘 도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극단의 정서가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