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국면: “김재규의 3단계 혁명 계획”
그런데! 11.8. 김재규가 실로 놀라운 사실을 새롭게 털어 놓았다. “3단계 혁명 계획”이었다. 제1단계: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제2단계: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한다. 제3단계;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는다.
김재규는 제2단계까지는 성공했는데 뜻하지 않게 김계원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며 매우 아쉽다는 표현까지 했다. 수사관이 이런 사실을 왜 숨기고 있었느냐고 하니까 폭로하면 정승화가 위험에 빠져 영원히 실패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만일 지금처럼 변호사 접견이 자유롭게 이뤄졌다면 김재규는 정승화가 당시까지 상황을 잘 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따라 옥에 갇혀있는 김재규는 이 무서운 추가 자백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유 정교하게 진술됐다.
“나의 분신 같은 심복이 있다. 그는 중정의 안전국장 김근수다. 계엄이 선포되면 그 즉시 중정으로 가서 김근수에게 나의 의도와 범행내용을 실토하고 그에게 임무를 주려 했다. 현장에 남아 있을 궁정동 국정원 요원들을 연행,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현장 만 조사케 한 후, 현장증거를 인멸케 한 후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나의 범행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 채,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한다. 현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한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내가 되고,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감찰부와 혁명대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처단케 한다.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내가 정보부장으로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본인은 일약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구체적인 혁명계획인 것이다.
그런데! 제2단계까지는 성공한 계획이 어째서 실패하게 됐는가? 이에 대해 김재규는 11.8. 이렇게 털어놓았다,
“다 된 밥에 김계원이 배신을 했다. 아쉽다. 그러나 정승화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뜻을 받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육본 벙커에서 정승화는 부대출동 등 중요한 상황처리를 했다. 국방장관이 와 있는데도 정승화는 나에게는 보고 및 의논을 하면서도 국방장관은 돌려놓았다. 이는 국방장관은 안중에도 없고, 나를 받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정승화가 말을 안 들으면 쏘아 죽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백이 나오자 합수부는 비로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수사국장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정승화의 구속수사를 건의했다. “김재규가 검찰로 넘어가기 전, 우리 손에 있을 때 정승화를 연행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11.8일의 일이었다.
정승화의 정치적 행보 김재규가 계엄군법회의에 송치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야에서는 김재규를 “유신에 마침표를 찍은 민주화투사”로 미화하기 시작했다. 구명운동도 활발했다. 이에 고무된 김재규는 태도를 바꾸어 “시해 동기는 자신의 집권이 아니라 비민주적인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79.11.17.자 계엄군법회의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유신체제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힘을 가진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통령 살해 방법 밖에는 없었다. 이런 뜻을 실행에 옮긴 후 자살하거나 망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혼란한 정국을 수습-설거지를 하고, 내가 구상한 대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여당에는 인물이 없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이다. 김영삼은 역량이 미미하다. 이철승은 ‘사꾸라’라서 지지기반이 없다. 그래서 이후의 정국을 이끌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내란음모사건 소송기록 1079-1090쪽)
김재규의 범행 동기 진술이 있은 지 1주일 후인 11.24. 계엄선포 이후 처음으로 민과 군이 함께 참여한 ‘계엄확대회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정승화는 이런 발언을 했다.
“10.26사건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니다. 박대통령 체제는 잘못 되었으므로 시정돼야 한다.”
이는 박대통령에 대한 비난임과 동시에 김재규를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이에 대해 진종채 2군사령과, 백석주 육사교장 등, 일부 장군들이 반발했다. 이건영 장군까지도 반발했다.
“박대통령이 서거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을 하려면 살아계셨을 때 해야지, 왜 지금 하느냐, 박대통령 체제가 잘못되었다면 여기에 있는 군 지휘관들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이런 심한 반발로 인해 회의가 중단됐다. 계엄확대회의에 참석했던 황영시 1군단장은 총장의 말에 격분하여 합수부장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시해사건 때 불투명한 행동을 한 정승화를 조사하지 않으니까 이런 사태가 나타나지 않느냐.”
1996.5.20 “12.12사건” 제8차 공판에 출두한 피고 전두환은 변호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변호인: “10.26 사건 이전에 정승화 총장은 ‘박대통령은 이 나라의 태양이요, 민족의 지도자요, 우리나라 중흥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고 했지요?”
전두환: “예. 그리고 그 때는 박대통령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도 없고,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11.17.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는 김대중-김영삼-이철승이 모두 인물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그 후 9일 만인 11.26. 정승화는 언론사 사장단과 편집국장들을 초청하여 이런 말을 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이다. 김영삼은 무능하다. 김종필은 부패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다.”
이는 소위 “3김 토론”으로 불렸다. 이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평소에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아니었나 한다. 이는 김재규를 감싸기 위한 수순으로 의심되기도 했으며, 당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마당에 이런 쿠데타 발언을 한 것은 최규하 대통령을 무시하는 건방진 자세요, 도전으로까지 비쳐졌다. 이는 정가와 군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야당이 반발하여 국회가 유회되기도 했다.
정승화: 최규하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하라고 지시
1996.7.4.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제1심 19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정승화는 이렇게 진술했다. "계엄군법회의로 송치된 기소장에는 '최규하가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군검찰 부장 전창렬 중령에게 직접 최규하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받은 일개 중령인 검찰관으로서는 명령을 수행할 방법이 난감했다. 따라서 당시 모든 수사기관을 조정통제하는 입장에 있는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건의해 왔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의 지시내용으로 군검찰이 제게 찾아왔습니다’는 취지의 보고를 했고, 최규하는 “좋다. 언제든지 와서 조사하라”는 말을 했다. 1996.7.4.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제1심 19차 공판에서 정승화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두환이 며칠 후 정승화 연행에 대해 재가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미리 손보기를 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김재규의 '3단계 혁명계획"에 대한 자백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김재규의 행위는 계엄군법회의에서 정당화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의 천하가 됐을지 모른다. 당시 김재규와 정승화와 군 인맥이면 능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시대는 정승화의 시대였다. 정승화 위에는 오직 최규하뿐이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하라는 것은 차후 그가 하는 일에 최규하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손보기 순이 아니었나 싶다.
역사의 터닝 포인트
잘 나가고 있는 정승화에게 김재규는 또 하나의 돌을 던졌다. 1980.12.8. ‘김재규내란음모사건’ 제2회 공판에서 김재규는 정승화가 자기의 범행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협조하였음을 사실상 시인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 군법회의는 정승화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이었다.
검찰관: “만일 정승화 총장이 피고인의 의도에 불응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김재규: “불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의 상황은 모든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습니다.”
이어서 12.10.에 열린 제3차 공판에서 김재규 변호인 김정두는 정승화가 시해사건과 무관하고 김재규를 선처하는 것이 계엄사령관의 내심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129-130쪽에는 이런 글이 있다.
『1979.12.10에 열린 김재규 사건 제3차 공판에서 김정두 변호사는 공판 벽두에 미리 준비한 변론서를 통해 “여기 있는 재판관들은 과연 계엄사령과의 뜻을 알고 이 재판을 진행시키고 있는가. 검찰관의 뜻은 전군과 나아가 관활관인 계엄사령관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되고 검찰관의 모든 행동은 계염사령관의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재판을 공개하여 국민에게 궁금했던 것을 알려줌으로서 국민들 간에 떠도는 불신감과 유언비어를 막을 수 있다. 가까운 예로 시해사건 당시 계염사령관과 김재규 간의 모종관계 여부에 대해 억측이 구구했다. 그러나 이 법정에서 김 피고인이 단독으로 한 일이며, 사령관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밝힘으로서 세간의 유언비어는 그야 말로 유언비어에 불가하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과거지사는 모두 공개하여 국민과 역사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서 우리 후손들은 이 사건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요지의 진술을 하였다. 정승화 총장을 정당화시키고 재판부에 김재규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라는 것이 정승화 총장의 뜻임을 암시하는 것 같은 이 발언인 것이다. 그 후 김정두 변호사는 동료 변호사에게 “그 전 날밤 군 고위층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그런 발언을 부탁한 바 있다” 고 실토하였다.』
당시 이 문제의 발언은 정승화가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글이 정승화 자서전에 있는 것이다.
합수부의 젊은 장교들은 정승화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히 챙겼다. 시간이 가면서 김재규의 자세가 바뀌었다. 합수부에서는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하다가 정승화가 관할하는 법정에서는 “유신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시해했다”고 말했다. 이를 재야가 부추기고 있었다. 김재규에 대한 구명운동도 활발해 졌다. 이에 따라 정승화는 박대통령을 비난하고 김재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김재규가 3김 불가론을 펴자 1주일 후에 정승화가 똑같이 3김 비토론을 주장했다. 쿠데타라도 불사하여 정치개입을 하겠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치개입을 서슴치 않았다. 임시 대통령을 최규하로 정할 것과 그 임기를 2년으로 할 것도 최규하나 국무위원들과 아무런 논의 없이 정승화가 결정했다. 김종필 후보선출을 무산시켰다. 공개적으로 김재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방해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보고 합수부 젊은 장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승화를 연행하지 않고서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확산되는 의혹의 여론도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재야세력, 김재규, 정승화가 정국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학봉 대령은 몇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연행 조사를 전두환에게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미루어 왔다. 그러다가 합수본부장은 실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연행조사하자” 이는 김재규와 정승화의 심복들이 이끄는 수도권 정예부대들과의 전투행위까지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래서 보안과 속도가 생명이었다. 빨리 연행하고 언론에 대서특필하면 기정사실화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연행 계획
연행일은 12월12일로 정했다. 12.8.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차기 대통령(취규하)을 선출하는 날이고, 12.12는 육군진급심사 예정일이었기 때문에 진급심사에 충격을 주지 않을 12월12.일을 연행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12.6. 전두환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정승화를 김재규 관련사건의 관련범’으로 연행 수사할 수 있도록 재가문서를 작성하라 명했다. 군 주요지휘관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관례에 따라 이학봉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12.8일 전두환에 보고했다.
1)대통령 보고 시점에서 정확히 30분 만에 연행조를 총장공관에 보낸다.
2)연행조는 우정율 합수부 수사2국장, 허삼수 합수부 조종통제국장 및 7명의 합수부 수사관으로 한다.
3)총장공관에는 1개 분대 규모의 헌병이 특별경계를 하고 있고 외곽에는 50여명의 해병대 병력이 상주하기 때문에 수사관을 보호하고 통과로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합수부에 배속돼 있던 33헌병대 병력 60여병을 활용할 것 등이었다.
연행 시에 김재규-정승화 계열의 반발을 예상하여 전두환은 수도권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12월12일 오후 6시30분에 30경비단으로 초청하여 연행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여 이해를 구하기로 했다. 차규헌 수도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특전사3공수여단장, 박희도 측전사1공수여단장, 장기오 특전사5공수여단장 들이었다. 이들은 박대통령에 충성하던 사람들이며 그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다. 그 충성심 하나로 이들은 정승화에 대한 체포 수사에 동조하였고, 이에 강하게 저항하는 김재규-정승화 군맥을 일거에 진압했다.
전광석화 같은 체포 과정
12.12.09:30 경, 합수부장의 전속부관 황진아 소령이 대통령 비서실과 협의 하에 보고일시를 12.12.18:30으로 정했다. 전두환은 이학봉 한 사람만 대동하고 대통령 공관으로 가서 정승화의 혐의점을 보고하고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건의했다. 최대통령은 노재현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 이에 전두환은 매우 당황했다. 전두환은 '관례'를 설명했지만 최규하는 끄떡도 하지 않고 노재현을 기다렸다. 전두환은 이를 최대통령의 원칙주의 차원으로 여겼고, 부결의 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는 한 치 앞이 캄캄했고, 대세가 누구에게 가느냐에 따라 책임을 지느냐 마느냐가 좌우되는 긴장과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이런 처지라 아마도 혼자서 서명하는 것보다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건의 형식으로 서명하는 게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보신주의 때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부결하려면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부결의 뜻을 전했지, 구태여 국방장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이 곧바로 재가할 것을 예상하고 보고가 끝날 시점으로 예상되는 19:00시를 연행시각으로 약속해 놓았었다. 대통령 재가가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 리 없는 연행팀은 예정된 19:00시에 총장을 연행했다. 19:40분, 허삼수는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에게 연행완료를 알렸고, 허화평은 대통령 비서실을 통해 이학봉에게 연행완료를 알렸고,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전두환은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최대통령은 알았다며 계속 노재현 국방장관을 데려오라 했다. 그러나 노재현의 행방이 모연했다. 그래서 밤 9시, 전두환이 노재현을 찾아보기 위해 대통령 공관을 나왔다. 노재현으로 인한 재가 지연
19:20분 경, 총장의 연행 과정에서 총격사태가 벌어졌다. 총장 공관은 한남동에 있었다. 그 이웃에 장관의 공관이 있었다. 노재현은 총장 공관에서 난 총소리에 놀라 부인 및 아들과 함께 이웃 단국대학으로 피신했다.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던 노재현은 20:40경, 국방부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이경률 합참 작전국장을 단국대에 오도록 하여 그의 차량 편으로 21:30경에 육분에 도착했다. 국방차관 김용휴가 장관에게 보고를 했다. “정승화가 합수부에 연행됐고, 이는 대통령에 보고됐다.”
이 말을 들은 노재현은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했다. 22:10분, 최규하 대통령과 통화가 이루어 졌다. 대통령은 즉시 오라고 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연합사 상황실에 있었다. 노재현의 소재를 어렵게 알아낸 김용휴 차관이 여러 차례 간청하며 대통령실에 가라고 했다. 12.13.01시 30분에야 국방부로 왔다. 김용휴 차관이 대통령 호출에 응하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때에! 국방부로 출동한 공수1특전사(박희도준장) 병력과 국방부를 경비하던 수경사 병력 간에 총격전이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노재현 장관은 다시 국방부 1층 계단 밑에 숨었다. 노재현의 출두가 지연되자 12.13. 02시30분에 신현학 총리와 이희성 중앙정보부 서리가 국방부로 와서 직접 노재현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12.13. 03:50분, 그는 수색조에 의해 발견되어 장관실로 돌아왔다. 04:00 경, 신현확 부총리와 이희성 서리의 권유에 의해 비로소 대통령 공관으로 향했다. 그는 도중에 합수부에 들려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 재가문서에 서명했다.
12월13일, 새벽 04:30분, 노재현은 대통령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후 재가문서에 서명해 줄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은 곧바로 거기에 서명을 했다. 배석한 신현학 총리 역시 정승화 연행 재가 문서에 ‘동의’ 서명을 했다.
그 후 정승화는 1980.3.13. 계엄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 방조죄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3월18일 징역7년으로 감형, 항소 취하로 3월26일 확정판결을 받았다(1.12.사건수사기록12권8060-8069).
그리고 전두환은 광주사태를 거쳐 1980년9월1일부터 1988년2월24일까지7년5개월24일간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2008.2.2 |
첫댓글 흠........ 매우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잘 서술했군요..
지만원 박사님이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발표한 5공화국안에 대해서는 모르셨음이 티끝만한 그러나 중대한 흠이군요. 최규하 대통령의 원안대로 5공화국은 1981년 3월에 출범했습니다. 1980년9월1일부터 6개월은 여전히 4공화국 시절이요, 최규하 대통령의 원안대로 10대 대통령이 국민투표로 5공화국 헌법을 통과시킨 후에 다시 선거하여 5공화국이 출범한 때는 이듬해 3월이었는데, 5공화국 기간에 대하여 지박사님께서 아주 중대한 혼동을 하셨습니다.
시스템클럽에 가서 나머지 글도 다 읽었는데요..역사학도님의 주장과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흥미진진했습니다
저도 어서 나머지 글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공개할 수 있는 날도 속히 왔으며 하구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무슨 갑자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김재규 글 게시판에 왠 월남전이 나와??
정승화가 박대통령 체제는 잘못 되었으므로 시정돼야 한다는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입니다. 스무살 여대생을 호스티스 모양 양옆에 끼고 술판 벌이다가 죽은 추접스런 대통령도 그렀고,그가 유신헌법으로 수십년 독재야망에 왕좌를 평생 갖일려고했던 박정희의 더러운 야욕을 잘 표현했다고 봅니다
늑대자슥/ 그날 삽천교 준공식이 있었다는 사실 모르시오? 삽천교 준공식 참석 후 수백리 길 달려오셨으니 저녁식사겸 축하연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요? 노무현은 연회할 때 자기가 음식 차립니까? 그리고, 노무현처럼 연예인들을 수십 명씩 불러들이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명만 불러들인 조촐한 연회였습니다.
ㅋㅋㅋ 아니 대한민국 대통령이 준공식 참석하고 왔다고 여대생들과 술 판을 벌인다는것이 목사님 생각에는 도리에 맞다고생각하는지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지 마세요 그 당시는 박대통령은 젊었고 그럼 조선조 500년동안 연회할 때는 언제나 옆에 여자들 천지인데 30-40년 전의 역사를 지금 수준으로 평가하면 되나요?
이사람 정말 세상 모르는 사람이네.2000년대 시대에 사는 세상이라면 많이 개방되어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그당시엔 남자,여자 성풍속도가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절이여.쉽게 말하면 그때는 교복 시절이라,남여 학생 같이 잇으면 색안경 끼고 보곤 그런 시대란거여.거꾸로 말하면 쓰나
임금이 여러 명의 여자를 취하는 것은 무취라고 했거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임금이던 대통령이던 무슨 일이 있으면 곁에는 언제나 여자가 옆에서 흥을 돋웠다는 것입니다. 그게 옛날로 올라갈 수록 일반화되었고 크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요
능금이 너 같이 멍청한 애들은 박정희를 임금이랑 동일하게 생각하는게 당연하겠지. 능금아 무식이 자랑은 아니니까 제발 공부 좀 하고 떠들자. 군주국가와 민주주의국가의 차이점은 알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박정희 죽은지 고작 20년 됐다. 박정희하고 조선왕조 임금들하고 결부하는게 가당키나 한 소리라고 생각하냐? 하여튼 무식한 것들이 꼭 낄데 안낄데 다 껴서 시끄럽게 떠들지.
그 당시 60년 70년도에는 한 밥상에서 부부가 같이 밥도 못먹던 시절이고 여자는 부엌에서 밥먹던 그런 시절과 비교하면 안되지요
능금님아 무슨 비유가 이래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여자도 떳떳히 남자 옆에 술도 먹고 그래도 된다 이말씀. ㅋㅋ 실례지만 님은 여성인것 같은데,생각하는것이 한참 어린듯 하군요
지금은 인권이니 머니 해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지만 그 당시는 그러는게 일반화 되어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니 말은 박정희 시대에는 인권이 없었다고 시인하는 것이냐? 인권이 무슨 뜻인줄은 아니?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를 말하는 거란다. 능금아 넌 심하게 무식해 보이니까 입 쳐 닫고 있는게 니네 패거리들한테 도움이 될 것 같다.
60~70년도에만 해도 여자는 많이 배우면 눈만 높아 시집거려 하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학교에 보내지 않았는데 그 시절과 비교하다니요.
능금이 넌 아직도 그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구나.
지금은 먹고 살만 하니 인권이 많이 좋아졌고 그런 식으로 비교하면 조선조 500년을 지금와서 비교해 보세요 모순 덩어리지
먹고 살만하니 인권이 좋아진게 아니라 자유와 민주를 위해 힘겹게 싸워온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좋아진거란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와 전제군주 국가를 비교하는건 당연히 모순이란다. 그걸 왜 비교하니? 멍청한 거 그렇게 티내고 싶니?
능금씨 한참 공부좀 하고 와야 할 것같군요 할 것없으면 장기아님 바둑이라두 나에게 와서 배워요 난 농구 감독이나 코치처럼 성폭력같은 것은 않하니까..저에게 배우면 장기나 바둑 왼손으로 두고 이기는 법가르쳐 줄게요..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