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짐 지고 사셨던 아버지
이시은 (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친정아버지께서는 1922년에 팔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2002년 겨울 79세로 세상을 뜨셨다. 군 내에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가 두 세 군데밖에 없던 시절이라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 산 고개를 넘어 먼 길을 오가야 했다. 입학을 시켜놓고 할아버지께서 혼자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버지를 산 고개 위에까지 데리고 가서 지켜보시다가, 아버지가 학교 교문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돌아오셨다고 한다. 학생이 몇 안 되던 때였으니 산길에는 인적이 드물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하셨다. 교직에 계시면서 어려운 살림으로 초등학교 입학을 못 하는 어린이들을 학교에 다녀서 배울 수 있도록 계몽하고 도우셨다고 한다. 그 중에 대표적인 분이 일곱 살이나 적은 아이들과 학교에 다녔던 시조 시인이기도 하신 오현스님이다.
아버지께서는 공책과 연필을 사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주곤 하셨다. 아버지께서 가장 기쁠 때는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에 다니지 못할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녀서 배울 때였고, 제자들이 찾아올 때라고 하셨다. 학교장으로 계시다 가족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축하를 받으며 정년 퇴임을 하시던 날 만감이 교차한다고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친정에는 교직에 종사한 분이 여럿이다. 아버지를 비롯한 막내 작은아버지와 셋째 고모부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섰으며, 큰 형부 또한 서울에서 국어 교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팔십 중반의 작은아버지와 셋째 고모부, 그리고 팔순이 되시는 큰 형부이시다.
아버지께서는 부지런하셨다. 학교가 쉬는 날에는 나무를 심을 만한 땅에는 감나무를 비롯한 과실수를 심으셨다. 집 뒤안에 작은 묘목밭을 만들어 놓으셨다. 고욤을 심어 감나무의 접목 수를 기르시고,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꺾꽂이하여 옮겨 심으셨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에는 개울가에 있는 논에 양어장을 만들어 키우고 싶은 물고기를 키우기도 하셨고, 정미소도 사들여 운영하게 하셨다. 그 후에는 양계장을 만들어 양계도 하였으며, 양돈장을 만들어 돼지를 사육하고 한우를 기르게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년 퇴임을 하고 놀이터로 삼겠다고 하시며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만들기 시작한 단감밭은 만여 평을 만들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일로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일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도 우리 집 일에는 품팔이하는 것을 자기 일을 하듯이 도와주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와 의논을 하시며 집안을 이끌어 가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머슴들을 데리고 농감을 하시며 관리를 하셨다.
1950년대부터 배 내기 준 소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소들이 비싸 작은아버지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배 내기 준 어미 소를 팔아 학비에 보태기도 하였다고 한다. 어느 해에는 2,000여 평이 넘는 논에 소나무 묘목을 키워 납품하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직접 일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선진 농업을 하고 계셨다는 생각이 든다.
친정집에는 언제나 누렁이들이 2마리씩 집을 지켰고, 가축들은 살이 찌고 유난히 털이 빛났다. 소죽을 끓일 때 밀 겨울과 쌀겨 그리고 콩 찌꺼기를 넣어 끓이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소죽에 된장을 넣어 끓이게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소에게 일을 시켜도 먹이고 시켜야 한다고 하셨다. 대농을 하여 일이 많던 소를 생각해서다. 일꾼들의 밥그릇에 밥을 담고 또 담게 하시던 할머니를 닮으셨다.
내가 집을 떠나 공부를 할 때, 일요일에 집에 가면 다시 갈 때까지 학업과 생활에 필요한 돈을 주실 때는 언제나 넉넉히 주셨다. 꼭 필요한 금액만 말하던 우리들의 마음을 아시고, 집을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어려움을 덜어주시려고 애쓰신 것이다. 부모님을 생각해 알뜰히 아껴 쓰던 기억이 난다.
정년 퇴임을 하시고 시골집에서 계실 때는 아침과 해 질 녘에 아버지께서 만들어 놓은 과수원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마당에 심어놓은 잔디를 깎고 정원수를 키우시며 노년을 보내셨다. 많은 가족을 부양하신 아버지는 형제분들이 모이는 것을 그리도 좋아하셨다. 팔 남매 맏이에 칠 남매를 두셨으니 모였다고 하면 잔칫집 같았다. 여름 방학 때 어머니의 생신에 모이면 아버지는 손주들이 맨발로 뛰어놀게 마당의 양잔디를 깎아 놓으셨고, 사위들이 잘 방에 모기장을 쳐놓고 불편함이 없도록 살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세상을 뜨신지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해마다 제사를 모시러 가던 일도 코로나가 길을 막았다.
아버지께서 키워놓은 꽃밭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계신 사진 속의 아버지를 바라본다. 많은 가족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사셨던 아버지이셨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거웠던 어깨를 버티고 사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가족을 지키고 교육 시켜야 하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구상하여 실행하셨을 것이다. “반듯한 돌을 주워 모아도 우리 집 쓰임새에 드는 돈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쓰임새가 많은 집의 가장으로 부단히 노력하셨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가족들의 행복했던 기억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을 위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희생한 덕분이다.
아버지께서는 무던히도 동생들을 아끼셨다. 자식같이 생각하고 뒷바라지하던 동생들이다. 언제나 “저희들 잘살면 된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이셨다. 아버지의 가족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으로 가족들이 우애 있게 지낼 수 있었다. 넷이나 되는 막내딸을 결혼시키고 “딸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패혈증으로 유언도 없이 “동생들이 보고 싶다”는 말씀만 남기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다.
2022. 2월 한국문학신문<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
첫댓글 넉넉하고 인정 넘치는 글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니 부모님 생각이 더하고.
부모님의 어려움도 다시 생각하게 되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