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베리아* 증후군
안미선
싹을 잘라 물 컵에 담근 산세베리아
하얗게 뿌리 내립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실눈 뜨는 산세베리아
그늘을 받아먹은 귀가 파랗게 자라고
우리 엄마 혓바닥도 퍼렇게 자라납니다
허둥지둥 시작한 오늘 아침
나는 한쪽 귀를 뚝 떼어 놓고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엄마 혓바닥이 자라 입 밖으로 나오기 전
떼어 놓은 내 귀에도 산세베리아가 돋아야 할 텐데
오늘따라 늑장 부립니다
잔뜩 웅크린 귓불이 결국
어제와 똑 닮은 아침을 만듭니다
나는 산세베리아 귀에 대고 말합니다
엄마, 학교 늦겠어요
꽁무니를 붙어 다니는 치와와가 따라 짖습니다
엄마도 쟁반에 토스트 한 쪽, 우유 한 잔을 담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아침 한 끼 굶는다고 큰일이야 나겠어요
엄마는 혓바닥을 길게 내어 놓으며
수험생이 아침 거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남은 한쪽 귀도 어떻게 떼어 놓을까 고민합니다
하루쯤 귀 없이 산다 해도 별 일 없겠지요
엄마 혓바닥은 내일 아침에도 어김없이 자랄 텐데
나는 활짝 핀 산세베리아 귓불로 얼굴을 가리고
현관문을 나섭니다
가방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또 하나의 귀
꺼내 붙이고 학교에 갑니다
*산세베리아: 영명 MotherinlawTongue로 잔소리를 많이 하는 장모의 혓바닥 같다는 뜻.
할머니의 식사법
밥을 먹으며 그녀가 엄마를 큰 소리로 읽는다
숟가락을 뜰 때마다 활자가 조금씩 짙어진다
책갈피처럼 펼쳐진 밥상이 엄마처럼 가벼워지고
낱장마다 줄을 그으며
그릇에 담긴 엄마를 조금씩 덜어내는 일
언제나 낯설고 언제나 익숙하다
끼니때마다 책을 펴드는 그녀
오늘은 뒷장으로 넘기며
엄마의 어제와 그제를 거슬러 읽는다
벌써 십 이년
책표지가 열리듯 수술실 문이 펼쳐지고
백 년처럼 길었던 열다섯 시간이 찢겨졌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있던 엄마 얼굴은
구겨진 책장이 되었다
낱말 빼곡히 들어찬 부록처럼 우리는 남겨진 채
마흔 둘째 쪽에서 굵은 제목의 아버지가 찢겨나갔다
그때부터 그녀는
엄마를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우리는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문자
짜거나 싱겁게 몇 번이나 지워지고 다시 쓰여
갈피마다 너덜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상에 오른
엄마라는 책,
서른여덟 쪽에서 책장을 덮는 그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책표지가 되라 한다
비둘기는 심심해
주인님은 각본대로 신문지를 찢고 나를 꺼내요
처음인 듯 어리둥절하게 태어나는 나를
사람들은 천사라고 부르지요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어나 잠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만
박수 소리와 함께 금방 지워지지요
머리부터 꼬리까지 바싹 구워진 한낮
장구밤나무가 나뭇잎으로 허겁지겁 부채질하고
흰 장갑 낀 주인님은 손바닥을 보이며 마술 부리죠
천 원짜리 지폐가 만 원으로 부푸는 손바닥 세상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가 유일한 출구예요
신문지 속에 빠진 내 깃털이 시들시들 말라가는데
사람들은 주인님 손끝만 보고 있어요
나에게 허공은 아무 의미가 없는데
날지 못하는 나를 왜 천사라고 하는지
아이들도, 어른들도 심심해서 그럴까요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태우고
딩디기딩딩딩, 누군가 손가락을 튕겨요
문득 박자 맞추기에 턱없이 짧은 부리가 슬퍼졌어요
부리에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물이 났죠
눈물 맛도 심심해 무척 화가 났어요
나에게는요, 심심한 것만큼 슬픈 일은 없거든요
박수 소리는 아무리 쪼아도 허기를 채우지 못해
붉은 발톱으로 주인님 손가락을 움켜쥐었죠
하지만 곧 새장 속에 갇혀버려요
걱정하지 않아요 나만의 세상을 만들면 되죠
주인님을 공중에 날려 마음껏 쪼아 먹다가
아침이 되면 훅, 날리는 상상
멋지지 않나요?
중심이 기울다
가슴에 봉곳한 두 칸짜리 방
기한이 남아 있는데 철거 통보를 받았다
심장에 백기 한 장 꽂아두고
사후관리가 전문이라는 철거대책반 찾아갔다
철거 동의서는 대책반 임의대로 체결되었고
이제 짐 싸는 일만 남았다
미처 짐을 다 옮기기 전, 차디찬 기계음으로
방 한 칸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후처방으로 특수기능이 첨가된 뽕브레지어로 문을 잠갔다
유선을 따라 부풀던 방,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남은 방이 여진으로 마구 흔들렸다
이미 마그네틱이 손상된 희망은
인식 기능을 잃은 마음 감식기를 끊임없이 긁어대고
그 자리에 타이커브*, 페미라*로 모든 가능성을 타진했다
기한이 표기되지 않는 권리증을 가졌던 시절
평생, 이 자리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아 있는 방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경고등마저
중독성이 강한 불안으로 먹통이 되었다
출입이 통제된 방
굳게 채워진 자물통의 무게로 기우뚱 거린다
불안한 중심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여간다
저울추 같았던 두 칸의 방
내 몸의 축이었다
*타이커브, 페미라 : 유방암 치료제
와산교*가 늘어졌어요
와이퍼가 몸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내요
라디오 볼륨을 타고 피아졸라*의 젖은 목소리는 차창에 엉겨 붙어요
입술을 더듬어 내려와 젖가슴이 춤을 추게 해요
빗물은 줄기 마디마디를 움직이고
부푼 엔진소리는 탱고를 추어요
물방울이 흐름새를 앞서며 입김을 불어요
가랑이를 벌리는 다리가 가쁜 숨을 쉬고요 날숨의 부력으로 어둠이 발광을 해요
차창이 물광으로 화장을 해요 와산교가 행렬을 가늠해요
우산을 높이 쳐들고 잡아당겨요 끌려가고 싶어 와이퍼를 더 빨리 작동해요
신음하는 속도는 바퀴에 깔려버려요
중심 잃은 속도가 손바닥에 엉켜 붙어요
손바닥과 와이퍼가 키스를 해요 우산 끝으로 와산교 꼬리가 길게 빠져나와요
한껏 흥이 난 피아졸라는 엉덩이를 흔드는데 제기랄, 욕설처럼 늘어지는 저녁이에요
* 와산교: 은평구 증산동 불광천 다리 이름
* 피아졸라: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연주가이며 작곡가 탱고음악의 거장
첫댓글 가작으로 멈출 수는 없는 수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좋은 시 읽음에 감사를 놓습니다, 할머니의 식사법, 중심이 기울다-란 시 앞에서 꾸벅! 늘 평안으로 봄날을 여십시오. 북어로 보답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