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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튀르키예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군사·외교적으로 중요하고 복잡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튀르키예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에 군사원조를 제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튀르키예 3국 간의 관계 동향, 그리고 튀르키예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중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튀르키예-우크라이나 관계의 배경
튀르키예는 지난 10여 년간 우크라이나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해 왔고, 2020년에는 대(對)우크라이나 투자액이 40억 달러(한화 약 5조 3,000억 원)를 넘어서며 우크라이나 최대 투자국 반열에 올랐다. 현재 700여개 이상의 튀르키예 기업이 우크라이나 내 다양한 부문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Pehlivan 2021), 일례로 투르크셀(Turkcell)은 우크라이나 무선 통신사 중 3위인 라이프셀(Lifecell)의 소유주이고, 오누르그룹(Onur Group)은 키이우(Kiev)-오데사(Odessa) 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와의 무역 증진은 군사장비 판매실적 증대로도 이어지기에 튀르키예-우크라이나 관계는 경제적 특성 이외에 전략적 특성도 함께 지닌다. 특히 튀르키예의 방산 기업인 바이카르(Baykar)가 2019년부터 우크라이나에 공급한 바이락타르(Bayraktar) TB2 무인기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상징적 무기로 떠올랐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는 튀르키예가 관심을 보이는 제트엔진 및 함선용 가스터빈의 주요 생산국이다. 2021년 6월에는 튀르키예항공우주산업(TAE, Turkish Aerospace)이 우크라이나의 항공기 엔진 제조기업인 모토르 시치(Motor Sich)와 차세대 공격헬기 사업에 쓰일 엔진 공급계약을 체결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바이카르가 또 다른 엔진 제조기업인 이브첸코-프로그레스(Ivchenko-Progress)와 신형 무인기인 키질레마(Kizilelma)용 엔진 공급에 합의했다.
양국 간의 이러한 경제·전략적 연계를 감안하면 튀르키예가 지난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꾸준히 지지해온 점도 놀랍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나 2022년 개전(開戰) 이래 튀르키예의 입장은 강경한 의사표명보다는 외교적 중재 노력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2022년 7월에 성사된 흑해곡물협정(Black Sea Grain Initiative)의 중재 역을 들 수 있다. 당시 국제연합(UN)과 튀르키예의 주도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은 우크라이나의 초르노모르스크(Chornomorsk), 오데사(Odessa), 피브데니(Pivdennyi) 3개 항구를 기점으로 흑해를 통과하는 우크라이나산 곡물, 식품, 비료의 안전한 수출을 보장하는 인도주의적 해상 회랑을 만드는 것을 취지로 했다. 협정에 의거해 이스탄불(Istanbul)에 설치된 합동조율센터(JCC, Joint Coordination Center)는 상선의 이동을 모니터링해 우크라이나 항구를 경유하는 화물의 협정 규정 절차 준수 여부를 감독했다. JCC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와 UN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흑해곡물협정은 2023년 7월을 마지막으로 러시아가 연장을 거부하면서 효력이 정지되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튀르키예 대통령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 대통령과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8월 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의 튀르키예 방문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으나, 실제 튀르키예-러시아 정상회담은 예정보다 늦은 9월에 러시아 소치(Sochi)에서 개최되었다. 해당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은 곡물협정의 재개는 거부하였지만 추후 수 주간 튀르키예에 100만톤(ton) 분량의 곡물을 우대 가격에 제공하고, 현지에서 처리 공정을 거친 러시아산 곡물을 아프리카 소재 6개 빈곤국에 공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Gulf Times 2023).
튀르키예-러시아 관계의 배경
튀르키예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러시아와의 관계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먼저 튀르키예는 자국 내 천연가스의 55%를 러시아에서 수입할 정도로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으며(Tastan 2022: 2), 서방의 제재로 갈 곳이 줄어든 러시아 관광객들의 튀르키예 방문이 증가하고 있다. 아울러 튀르키예는 크림반도(Crimea)를 기점으로 흑해 북부를 통제하고 시리아를 일종의 실질적 보호령으로 삼고 있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경계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자 하고 있으며, 만약 푸틴 대통령이 현재 시리아 이들리브(Idlib)에 묶여있는 수십만 명의 난민을 그대로 풀어줄 경우 수많은 난민이 시리아에서 튀르키예로 넘어오며 정세불안을 초래할 위험성도 감안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튀르키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데 더해 적극적 중재자의 역할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술된 일부 지정학적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와 러시아는 여전히 실리적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양국 간 연계의 긴밀성을 설명해주는 요소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양국은 자신들을 중심에서 배제하는 현존 국제질서에 대항해 대안적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다극체제를 지향하고 지역간 협력을 중시하며 이른바 보편가치의 제도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유한다. 이에 따라 양국이 지지하는 대화체의 형식에는 이란, 러시아, 튀르키예 3개국이 시리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출범시킨 회의인 아스타나 프로세스(Astana Process) 등이 있으며, 이외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현행 UN 체제를 비판하며 “세계는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5개국보다 넓다”라는 주장을 자주 내세우고 있다(Dedeoglu 2016).
둘째,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개인적 측면에서도 유사성을 지닌다. 이들 모두 2000년대 초반부터 자국의 지도자로 군림했고, 지금까지 수차례 정기적 만남을 통해 상호 간의 이해도를 높여왔다. 또한 양 대통령은 내부의 반대를 억누르고 강한 지도자상을 추구한다는 권위주의적 비전도 공유하며, 결과적으로 실패한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시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반면 푸틴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Aktürk 2019: 100).
셋째, 관광·부동산 ·석유 등 다양한 부문에 걸친 양국간의 경제적 연계 또한 최근 더욱 긴밀해졌다. 이러한 튀르키예-러시아 파트너십은 특히 원자력 발전을 비롯한 전략적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기업인 로사톰(Rosatom)은 현재 튀르키예 남부에 신규 원전을 건설 중에 있다. 게다가 튀르키예는 자국에서 소비하는 천연가스의 50%, 석유의 60%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결제대금 중 일부는 루블(RUB)로 지급하고 있다.
넷째, 러시아 기업들이 점차 강화되는 제재에 봉착한 상황에서 제재 참여를 거부한 튀르키예는 러시아 올리가르히(oligarch) 등에게 일종의 도피처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부유층의 자금이 부동산 투자 등의 방식으로 튀르키예에 대거 유입되고 있다(Adar 2022: 1).
그러나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파트너이기는 하나 완전한 동맹국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역사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고, 냉전기 소련과 튀르키예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한 바 있다(Baev 2021: 8). 현대에 들어서도 양국은 리비아 내전이나 코카서스 지역의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전쟁에 관해 대립된 입장을 보였으며(Cheterian 2020: 4), 2015년 튀르키예군의 러시아 전투기 격추, 2016년 주(駐)튀르키예 러시아 대사 암살 등 비교적 최근에도 양국 간 중대 긴장이 조성된 바 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는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경계해 1952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한 나라이다(Guner 2022: 85).
국제 분쟁 중재자로서의 튀르키예
튀르키예 정부는 이전에도 국제 분쟁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이력이 있으며, 대표적 사례로 튀르키예가 아직 권위주의로 이행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중재(Ayaz 2019: 680), 아랍의 봄 도래 이전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시리아 내 분쟁 중재, 인도-파키스탄 분쟁 중재 등이 있다(Zeeshan 2017). 현재 분쟁 중재역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인사는 에르도안 대통령으로, 최근 재선에 성공한 그는 자국의 국익 수호와 더불어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처하고 있다(Gegelashvili 2022: 1424). 에르도안 대통령은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모두와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며, 국제사회에도 튀르키예가 외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2022년 7월 22일 튀르키예와 UN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은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한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협상력 측면에서 독보적 입지에 있는 튀르키예의 뒤를 잇는 잠재력을 보유한 소수의 국가 중 하나는 카자흐스탄이다. 카자흐스탄도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 모두와 지리적으로 인접한데다 지난 수년에 걸쳐 튀르키예, 러시아, 이란이 참여하는 시리아 평화회담(Syrian Peace Talks)을 주재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카자흐스탄은 튀르키예에 비해 유럽과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튀르키예가 최근 추진 중인 걸프지역 군주국과의 관계개선, 에르도안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은 파트너국을 다변화하고 영향권을 확대하고자 하는 튀르키예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튀르키예가 러시아의 역사적 안마당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도 입지를 넓힐 수 있을 것인가? 이 의문에 관해 튀르키예가 현재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동질감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고자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러시아와 동등한 수준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존재한다(Aktürk 2020: 100). 다만 NATO를 비롯한 서방 안보동맹 가맹국이라는 지위는 튀르키예가 서방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교량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잠재력을 부여해 준다(Aktürk 2020: 155).
결론 및 함의
우크라이나 분쟁 발생 이후 튀르키예는 다채로운 이익을 조율하면서 최대한 많은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걸프지역 군주국 및 이스라엘 등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양 교전국 간 필수적인 연결고리로 부상한 국가는 튀르키예 뿐이다. 따라서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이 극단적으로 격화되지 않는 이상 튀르키예는 지금과 같은 중재역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할 확률이 높으며, 튀르키예 당국은 이 점을 활용해 서방과 러시아 사이를 잇는 다면적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튀르키예의 외교정책은 동맹이 지니는 일시적이고 거래적인 성격이 더욱 강조되는 신규 국제관계 패러다임의 부상을 시사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처럼 일명 미들 파워(middle power, 중견국)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강대국이 주도하는 지역별 위기 해소 노력의 필수 파트너로 자리잡으면서 자국 이익에 관한 발언권을 높이는 외교적 신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평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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