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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재미 없는 거 하나 올립니다.
저는 나쁜 크린이이니………
지금까지 온전하게 문단 마친 분량 다 올립니다. 어차피 이거 다 올려도 이 시점에서 '화자'는 고작 만 20세 한국 나이 21세………
+)이 '화자' 시점이기 때문에 '화자'가 잘못 알고 있는 기술 등이 있습니다. 콩스탕스는 몸이 약한 게 아니라 남편이 미웠던 거지만 그걸 사위가 알 턱이 없지……
로스는 언제나 바람이 거칠게 울었다. 험준한 산악에서 내리는 노성에 초목은 늘 푸르르 떨며 비명을 질렀다. 탁하고 검푸른 바다가 얼음 서린 외침을 지르면 주위의 모든 소리는 파랑에 휩쓸려 묻혀버렸다. 사방의 색채는 재를 펴 바른 것처럼 칙칙해 태양을 보는 날보다 안개를 보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아주 드물게 있는 맑은 날에는 저 먼 동토에서 온 날렵한 배가 털옷을 껴입은 노르만인을 여럿 태우고 남쪽으로 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난파돼 부서진 판자조각과 함께 가여운 익사체가 해안으로 떠내려오기도 했다.
고향은 그런 곳이었다.
물론 영주의 성이라는 건 이 척박한 로스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로스 백작의 거성에 로스 백작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스 백작이었던 이는 있었으나 그는 이제 백작이 아니었다. 선대 백작이었던 아버지 말콤이 불과 23세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등진 후, 아비 없이 외롭게 남겨진 조카 4남매를 백부 모레이 공작 앵거스가 거뒀다. 영민들을 위해서라도 로스의 주인은 그가 되어야 했었다. 그렇지만 사신은 불과 한 달 만에 핏빛 어린 도끼날로 모레이 공작의 목숨을 거두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외아들 길크리스트에게 맡겼다. 로스의 전 주인 시몬과 현 주인 길크리스트는 겨우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사촌 형제이고 모두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앵거스를 기억하는 이들은 말콤의 아이들을 경계해 그들의 어린 주군과 떨어뜨려 놓았다. 스코틀랜드 국왕 루나흐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들은 평범한 나무꾼의 아이처럼 손에 도끼를 쥐고 직접 장작을 패러 다녔다. 해는 너무나 빨리 졌고 겨울은 한참이나 길었다.
손에 검댕이 묻는 게 싫었다.
계절의 흐름은 하늘보다도 지상에서 더 빨리 나타났다. 여문 낟알을 추수하기도 전에 시냇물은 이가 딱딱 부딪칠 만큼 차가워졌다. 습기가 어린 장작을 불에 던져넣으면 매캐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라 코를 찔렀다. 병약한 작은형은 콜록거리면서도 난롯가를 떠나지 못했다. 내 손은 작은형이 묻혀야 할 몫까지 흙먼지와 잿가루를 뒤집어썼다. 메마른 손은 찔린 곳도 없으면서 살이 트고 피가 맺혔다. 등유도 귀한 곳이라 턱없이 비싼 향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남쪽에서 사자가 찾아왔다.
2년 전, 프랑스에서 아키텐과 부르고뉴, 피카르디가 분리되었다. 프랑스 국왕보다 프랑스를 더 많이 가진 아키텐 대공이 처남이기도 한 군주에게 칼을 겨누고 1년 이상 항전을 벌인 끝에 스스로 왕이 되었다. 술독에 빠진 프랑스 국왕을 파문한 바티칸은 프랑스 국왕의 반역자에게 선선히 신성한 통치권을 인정하고 직접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 벽지까지 소식이 닿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키텐 대공, 아니 아키텐 국왕이 나를 안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맏사위로 생각한다니. 내가 얼떨떨한 사이 남쪽에서 온 사자는 통역을 통해 부드러운 얼굴로 장황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와 명문가 던켈드의 딸인 어머니, 증조부 루나흐 왕까지 언급하며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내 고귀함을 찬양하더니 자신의 주인이 얼마나 명예롭고 고결한 군주인지 설명했다. 특별한 감상은 없었다. 그저.
- 예뻐요?
사자는 이미 모레이 공작의 혼인 허락을 받고서 왔다. 내 의향 따위나 공주의 미추가 지금 중요할 리가 없다. 알고서 심술을 부렸다. 프랑스 국왕의 조카이며 아키텐 국왕의 맏딸, 신성로마제국 선대 황제의 당조카인 공주와 모레이 공작의 땅 한 뼘 없는 종제 따위는 아무리 어린애가 따져보기에도 어울리는 짝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공주에게는 문제가 있을 거다. 난 내심 사자가 당혹스러워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 파트리샤 공주님은 아주 우아하고 총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괜히 물었다. 사자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공주가 얼마나 상냥하며 정숙한지, 아키텐 국왕 부부가 맏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부드럽게 물결치는 긴 머리카락과 활짝 핀 하얀 꽃처럼 해사한 얼굴이 얼마나 고운지 쉬지도 않고 줄줄이 쏟아부었다. 걸러 듣지 않아도 될 정보는 공주가 나보다 네 살 연상이고 검은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단순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며칠 더 머물던 사자는 통역관을 남겨두고 아키텐으로 돌아갔다. 통역관은 그대로 내 선생이 되어 옥시탄어를 가르쳤다. 그는 처음에 주위의 사물과 간단한 회화부터 시작하더니 이내 교본을 만들어 내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형들과 말하거나 시집간 누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때 외에는 스코틀랜드어를 금지당했다. 그것과 함께 짐을 옮기거나 나무를 하고 흙을 헤집는 모든 일도 금지당했다. 철마다 아키텐에서 보내는 선물이 우리 형제를 귀족으로 만들었다. 옥시탄어로 된 학문서와 역사서를 막힘 없이 술술 읽을 수 있게 되자 선생은 라틴어를 비롯한 아키텐 주위 국가들의 언어를 가르쳤다. 나는 서투른 선으로 유럽 대륙 지도를 그리고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그렸다. 책을 읽을 기름은 들어가 몸을 씻어도 될 만큼 풍족했다.
가족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말해두지만 척박한 고향을 버리고 번화한 곳에서 새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알량한 향상심은 결코 아니었다. 내 뜻이 한 줌도 섞이지 않고서 결정된 미래에 대한 체념 어린 순응도 아니었다. 작은형의 기침 소리가 줄어들고 큰형이 좋은 옷을 입게 됐다. 더는 거무튀튀한 손을 씻으려 얼음물에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아키텐으로 간다면 가족은 푸아티에 왕가의 사돈으로서 호사를 계속 누릴 수 있다. 가족을 떠나는 대가는 그거면 충분했다. 설령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폭설을 헤치며 찾아온 사자는 아키텐 국왕이 베아른 백작을 재무관에서 해임하고 맏딸을 새 재무관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난 내 약혼녀가 백치이거나 미치광이일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러자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순수하게 그이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옥시탄어로 축하 편지를 썼다. 일부러 멋을 들여 날려 쓴 글씨로 서명까지 마치고 나니 무언가 허전했다. 장자가 아닌 나는 장래 신부에게 줄 반지 하나 없었다. 내가 가진 값나가는 건 모두 아키텐에서 왔으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편지 귀퉁이를 조금 구겼다. 초라한 편지는 재가 될 운명을 겨우 피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은 내가 보낸 그 어떤 겨울보다도 길었다. 언제 얼음이 녹고 언제 새싹이 돋았는지 기억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소매가 짧아져 그대로 드러난 손목에 토시를 덧대지 않아도 될 즈음 으레 오던 배편에 실린 답장을 받았다. 대필자가 썼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유려한 글씨로 쓴 편지가 공주의 친서이기를 바랐다. 안부를 전하며 직접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상투적인 인사치레라도 그이가 내게 조금이나마 호의를 가져서 보낸 것이었으면 했다. 바로 답장을 쓰려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일필휘지로 썼던 첫 번째 편지는 환상이기라도 했는지 수신인을 쓴 밑으로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결국, 아까운 기름만 낭비하며 며칠 밤을 공쳤다. 사자가 다시 아키텐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서야 답장을 완성했다. 고향에서 맞는 마지막 여름은 이상하게 무덥고 초록이 짙었다.
16세 생일은 성년식과 송별식이 더불어 있었다. 며칠 후 그들에게는 오랜, 하지만 나한테는 처음이었던 항해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해가 뜨고 지는 며칠이 지나 아키텐에 상륙했을 때, 나는 너무 더워서 옷을 가볍게 바꿔 입을 수밖에 없었다. 로스에서 10월이면 흔히 봤던 찬 서리가 보르도에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보르도는 아직도 꽃이 피었고, 어딜 가나 곡식과 과일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 수고 많았다. 아들아.
아키텐 국왕을 본 순간, 천 번은 더 되뇌었던 격식 있는 인사가 혀끝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는 내가 몸을 숙이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날 덥석 안았다. 정말 며칠간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자식을 맞는 것처럼.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키텐 국왕은, 아니 장인은 웃고 있었다. 나는 ‘국왕 폐하’라는 호칭을 구석으로 밀어두고 대신 누군가를 향해 한 번도 불러본 일 없던 ‘아버지’라는 호칭을 새로 익혔다. 아키텐 국왕 부부는 새로운 부모가 되었고 나이 비슷한 왕자와 어린 공주는 동생이 되었다. 다만 부왕의 재무관으로서 그 곁을 지키고 서 있었을 신부만큼은 관습에 따라 볼 수 없었다. 내가 신부의 손을 잡기까지는 붉은 노을 여러 번과 10월의 가을비를 한 번 거쳐야 했다. 비를 맞은 단풍은 사과보다도 더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 반가워요. 길.
솔직히, 그간 내가 공주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이 다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공주가 아름답지 않을 거라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아니 비관했던 모든 것이 민망스러워 자칫하면 다 털어놓고 용서를 빌 뻔했다.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때는 많이 버벅거렸다. 상기한 이유 말고도 둘이 더 있었는데, 첫째는 공주가 옥시탄어가 아닌 스코틀랜드어로 인사를 건넨 탓이었고 둘째는 날 부른 이름 탓이었다. 고향에서는 모레이 공작 길크리스트와 이름이 겹치기 때문에 길패트릭이란 이름에서 길을 빼고 알아서들 불렀다. 공주의 이름이 파트리샤이니 여기에서는 반대가 된 셈이다. 난 멈춰버린 혀를 움직여 가장 떠오르는 말을 입에 담았다.
-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성대한 결혼식이 무색하게도 다음날부터 나는 크게 앓았다. 처음엔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흘러도 울긋불긋한 살갗은 홧홧하니 뜨거웠고 먹은 것도 없는데 배앓이가 잦았다. 궁의는 마시는 물이 달라져서 병이 났다고 진단했다. 내가 고향에서 가져온 흙을 물에 타 마시는 동안 하늘은 어느 틈에 북쪽에서 시린 눈구름을 가득 몰고 왔다. 온화한 곳이었지만 보르도 사람들도 겨울에는 옷을 두텁게 입었다.
평탄하고 번화한 보르도에서 보는 겨울 풍경은 험준한 로스에서 보던 것과 아주 달랐다. 가롱 강은 유유히 흘렀고 눈 내린 너른 평야는 서리 거인의 자취도 찾을 수 없었다. 내 신부는 강설량을 헤아리며 겨울 가뭄을 걱정했다. 그이는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의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여줬지만,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설명하고 의논할 때 가장 활기찼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들을 때에도.
총명한 여자였다.
공주는 날 위해 일부러 쉬운 말을 골라 썼다. 나는 내 고향의 이야기를 할 때면 내가 알고 있는 익숙한 관념을 옥시탄의 언어로 길게 늘여 설명했고,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그녀의 하얀 얼굴에 발그레하게 홍조가 올랐다.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밖에서 왕자와 어린 공주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쌓인 얕은 눈을 그러모아 작은 눈사람들을 세웠다. 왕자는 언제나 숙부인 플랑드르 공작 위그를 가장 크게 만들었다. 내 눈사람은 내 신부를 흉내 낸 눈사람 옆에서 같은 키로 나란히 서 있었다. 아프고 열이 올라 잠 못 들던 밤과 즐거웠던 낮을 수없이 지나니 공주는 나보다 작아져 있었다. 그녀는 훌쩍 다가온 신록보다도 더 짙고 맑은 초록빛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 ……파티.
짧은 말이었지만 몇 달 치 용기는 다 끌어와야 했다. 아키텐에서 공주를, 아니 파트리샤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다 꼽을 만큼 적었으니까.
- 고맙습니다.
봄날의 하얀 햇살을 받은 파트리샤는 한층 더 눈부셨다. 가장 안온한 곳에서 세상의 모든 곱고 귀한 것만 모아 소중히 자라난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태양의 따사로운 열기가 내 얼굴로 다 몰렸다고 느꼈다. 그래서 파트리샤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을 때, 있지도 않은 구름을 떠올리며 그것에 가렸던 태양이 다시 나왔을 거라는 착각을 했다.
- 길, 내가 당신을 잡아먹나요?
뜻밖의 반문에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파트리샤는 아주 재미난 것을 본 양 작게 박수를 쳤다. 난 내게서 말주변이 좋다는 장점을 지워버렸다. 정정. 난 말재주가 없다.
- 난 그냥….
- 고마워요. 고맙다고 해줘서.
파트리샤는 하얀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잡았다. 이제는 익숙한 손길이었다. 보드라운 왼손과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인 오른손. 왼손 약지의 백금 반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무지개를 비췄다. 그 반지는 내 것과 한 쌍이었다.
아쉽게도 파트리샤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렇지 않은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아키텐 왕비, 그러니까 내 장모 콩스탕스는 당시 채 40세가 못 된 젊은 사람이었지만 자주 몸이 불편했다. 자연히 보르도의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의 여주인보다 맏딸이 부왕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더 자주 보았다. 국왕은 변함없이 왕비를 사랑했고 때로는 왕비가 활발했었던 대공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에게서 아쉬움이 클수록 그만큼의 공백을 공주가 메꾸게 되었다.
파트리샤가 재무관에 왕비 대행까지 할 동안 스물도 안 된 내가 할 일은 왕태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뿐이었다. 아키텐에서 자라는 소년 중 가장 귀한 왕태자는 필연적으로 동무가 없었다. 나는 한 살 어린 처남의 일상 대부분에 참가하게 되었다. 밤에는 파트리샤와 종종 침대를 함께 썼지만, 그녀는 많이 고되었는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지쳐 잠이 들기 일쑤였다. 서로가 오늘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는 직접 듣거나 남에게 물어야 알 수 있었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난 파트리샤가 날 귀찮아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안심하게 되었다.
해가 바뀌고 다시 꽃이 피자 모레이 공작의 사자가 보르도에 당도했다. 내 손님이었다. 그러나 평소 같았으면 접견 이후 바로 내게 보냈을 장인은 해가 저물고 나서야 날 내려오게 했다. 내가 다소 의아해하며 들어서자 사자는 내게 큰형이 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의 내용은 작은형의 부고였다. 이미 석 달이나 지난.
- ……먼 길에 수고하셨습니다.
길크리스트는 자신의 어린 딸과 내 큰형을 약혼시켰음을 함께 알렸다. 이제 큰형은 안전하다. 이로써 내가 처음 로스를 떠날 결심을 했던 이유는 모두 사라졌다. 그럴 뿐 아니라 돌아갈 곳도 사라졌다. 로스에서 날 기다릴 사람은 물론 내가 필요한 사람도 없다. 아슬아슬하게 겹쳐있던 두 갈래 길의 한쪽은 벼랑이 되어 무너져내렸다. 나는 고향 소식을 더 듣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울음을 삼키던 목은 뻣뻣하게 아팠고 세상은 통째로 물에 잠긴 듯이 부옇기만 했다. 어둠은 날 빠르게 집어삼켰다.
나는 꿈을 꾸었다. 다시 손에 검댕을 묻히고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난로에 던져넣는 꿈을. 주인을 잃은 모포는 구겨진 채 자리에 남고 성에는 사람 하나 없어 돌벽을 지나는 바람 소리만 요란히 울리는 꿈을. 마지막 방문까지 열고 나니 꿈에서 튕겨 나오듯 자연히 눈을 뜨게 되었다. 내 앞에는….
- 일어났어요?
이마가 차가웠다. 파트리샤는 내 목과 이마에 꼭 짠 물수건을 올려두고 침대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같이 갈 데가 있어요. 일어나 준비해요. 기다릴게요.
오늘 파트리샤는 말과 행동이 달랐다. 기다리겠다더니 빈속을 달랠 걸 가져오게 해 깨끗이 비우는 걸 지켜보고 옷을 입는 것도 도왔다. 낯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걸 자세히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던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파트리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우리 둘 다 승마를 할 줄 알았으니 그것도 색다른 행동이었다. 호위 없는 마차는 조용히 성문을 빠져나가 수도원 인근 묘지에 이르렀다.
- 조슬랭은 몰라요. 줄리아나도 모르고요. 그래도 내 동생이에요. 이름은 솔렌이고 당신과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파트리샤는 비석도 없는 작은 무덤을 쓰다듬었다. 침침한 하늘 아래 차분한 목소리는 스산한 바람 소리에 섞여 이어지다 끊어지곤 했다. 나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무덤의 주인은 처남 바로 위에 태어난 셋째였으나 여덟 해를 살다 가는 동안 누구에게도 가족 대우를 받지 못했다. 너무 어렸던 둘째와 그 이후 태어난 넷째에게 셋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 그래도 아버지는 솔렌을 미워하지 않으셨던 거 같아요.
세례도 받지 못했던 아이는 죽어서야 신의 품에 들 수 있었다. 동정이었을까, 아내와 딸을 배려해서였을까. 난 파트리샤의 옆에서 그 무덤에 손을 얹었다. 파릇하게 돋은 풀 사이에 이름 모를 작은 꽃이 피어 있었다.
- 파티.
나는 파트리샤를 돌아보지 않았다. 파트리샤도 나를 보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방향을 보며 나란히 있었다.
- 내 집은 이제 여기 보르도 뿐입니다.
왕가의 치부일지도 모를 사생아 동생의 존재를 굳이 알려준 것은 그 나름대로 내게 건넨 위로일 것이다. 나는 하늘을 덮은 자욱한 구름 사이에서 가려진 하늘의 틈새를 찾았다. 세상이 내려다보일 그곳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성탄과 신년 연회의 여흥은 처숙부 플랑드르 공작 위그의 죽음으로 서둘러 끝이 났다. 그림자처럼 형을 따랐던 하나뿐인 아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장인은 식음을 전폐하고 몸의 절반을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왕제에 대한 조의를 마치기도 전에 국왕의 맹우이며 친척인 부르고뉴 공작 외드도 서거했다. 언제나 활기가 감돌았던 보르도 왕성은 서리 내린 겨울 벌판보다 더 을씨년스러웠고 신년을 축하하던 이들은 주인의 기색을 살피며 살얼음판을 걸었다.
파트리샤는 조금 더 바빠졌다. 국왕이 툴루즈와 새 영토 알바라신을 잇기 위해 바르셀로나 원정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은 성내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는 극비였다. 그 탓에 파트리샤는 무덤가에 핀 하얀 꽃처럼 창백히 질려갔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때도 종종 있었다. 나는 파트리샤가 잠시 잠을 청한 틈에 몰래 궁의를 불렀다. 피곤에 절은 그녀는 궁의가 진맥을 해도 꼭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성내에 감도는 죽음의 그림자가 내 아내마저 노리는 게 아닐까 불안해져서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똑똑한 사람이니 나 혼자 진단을 듣는 것보단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하든. 난 꿈결을 헤매던 그녀가 이슬 젖은 풀잎색과 닮은 눈을 깜빡이는 걸 긴장하며 보았다.
- 경하드립니다. 두 분께서는 곧 부모가 되십니다.
- ……뭐라고?
파트리샤는 적이 당황해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나는 넋을 놓고 있느라 막지 못했다. 궁의가 우리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돌아갔지만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순수히 기뻐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께 알려드려야 할까요?
첫 아이였다. 우리에게 찾아온 첫 가족이었다. 그렇지만 파트리샤는 부왕부터 심려하는 착한 딸이었다.
- 알려드려야지요.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 노여워하시면 어떡해요?
- 그러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우리 아이는 왕가의 성을 받을 첫 왕손입니다.
파트리샤는 이불을 꾸욱 그러쥐었다. 축복받아야 할 경사 앞에서 그녀는 명백히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좋은 일은 좋은 일로 남게 만들어야 한다. 그때 내 손은 꼴사납게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시간에 국왕은 내려오지 않았다. 왕가는 평범한 가정처럼 식구들이 둘러앉은 식사를 종종 하곤 했지만 가장 상석은 온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파트리샤는 반주로 나온 포도주를 거절하는 것으로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할머니에게 희소식을 알렸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을 두고 직접 장인의 방을 찾았다. 그러나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받은 궁내관에게 가로막혀 그를 통해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꼭 알려드려야 한다. 내일 다시 찾아뵈면 된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상반된 두 명령어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내 발을 그물처럼 칭칭 감았다. 나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발을 들어 파트리샤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왜 그랬을지, 그 진짜 의미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은 후였다.
눈을 뜨자마자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파트리샤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하늘은 우중충하고 땅은 색이 짙어 음침했다. 우리가 불길한 예감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아키텐 왕좌의 주인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신왕 조슬랭은 부왕과 함께할 아침 식사를 기다리다가 첫 하례를 들었다. 그날은 가족 누구도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했다.
- 당신에게 무거운 짐을 맡겨서 미안해요. 이 방법뿐이었어요.
주군을 영결하기도 전에 그들은 주군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을 왕국 재무관에서 강제로 해직시켰다. 파트리샤의 손바닥에선 깊게 팬 손톱 모양대로 피가 흘러 맺혔다. 난 붕대를 칭칭 감은 그녀의 손을 겹쳐 잡았다.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어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못 미더울 거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파트리샤는 바깥의 시종들이 듣기 어려울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스코틀랜드어였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원정을 준비하며 소모된 국고와 향후 지출, 현재 왕가가 보유한 남은 자산 등을 새겨들었다. 기억하기에는 제법 많은 양이었으나 파트리샤는 내가 제대로 외웠는지 밤을 새우며 확인했다. 눈치 없는 닭들이 홰를 치며 길게 새벽 울음을 울었다.
- 파티, 시간이 너무 지났습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 당신까지 날 전날과 다르게 취급하나요?
그녀의 두 눈이 순간 불꽃이 피어난 것처럼 형형해졌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파트리샤는 내가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양 날 쏘아보았다. 나는 더 권하지 않았다.
새 시대는 신왕을 비롯해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가 사는 작은 세상에서 주인이 바뀐 적은 이걸로 총 네 번이었다. 나는 이제 선왕이 되어버린 장인을 그리워했고 새 주군인 조슬랭에게 나름대로 충실했다. 본래 부지런한 성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편한 자리를 가릴 여유는 우리 모두에게 없었다. 그리고 파트리샤는 여전히 왕성의 실질적인 여주인이었으며 내 스승이었다. 신혼 때와 비교하면 함께 있는 시간은 훌쩍 늘었지만, 우리 부부의 대화는 어느새 주위의 동향과 공무에 대한 화제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 길, 당신은 나랑 달라요. 모두가 당신에게 거는 기대를 스스로 무너뜨리지 마세요.
파트리샤는 내게 더는 칭찬하지 않았다. 웃어주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받을 수 있는 감정들은 모래시계 속의 모래알처럼 그렇게 서서히 줄어만 갔다. 파트리샤는 여전히 완벽한 공주였지만 홀로 있을 때는 흡사 30년간 탑에 갇힌 사람처럼 우울함에 잠겨 있었다. 아이를 가진 그녀는 좋아하던 승마도 금지당했다. 파트리샤는 지금까지의 자신을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했다.
- 파티, 사랑합니다. 내 아내가 되어줘서 고맙습니다.
웃는 걸 보고 싶어서 방안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태어날 아기가 쓸 물건을 있는 대로 사서 늘어놓기도 했다. 파트리샤를 축복해주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나 혼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방은 자주 어수선해지곤 했다. 모두가 파트리샤를 사랑했고 우리 아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 ……이 많은 선물 중에 왜 내 건 하나도 없을까요?
나는 바라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선물이 올 때마다 홀로 씁쓸히 웃던 파트리샤는 결국 볕이 너무 많이 들어 덥다는 이유로 방을 옮겼다. 새 방은 장인이 자신의 첫 아이를 위해 준 방 크기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보려 평소보다 스무 배가 넘는 거리를 걷다가 이내 내 방도 그쪽으로 옮겨버렸다. 우리 부부의 시중을 들 시종들과 임신 기간의 안태를 도울 궁의들까지 우르르 방을 옮겼다. 파트리샤는 한 달 만에 다시 원래 쓰던 방으로 돌아갔다. 옮긴 짐은 책 몇 권뿐이었다.
가을이 다가올수록 나는 파트리샤가 깨어있는 모습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수확을 앞두고 내가 할 일이 많아져서였고 둘째는 아이가 태동을 하면서 아이 엄마가 수시로 잠을 설쳐서였다. 어떤 날은 안쓰럽게도 창가 의자에 앉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그 발치에서 아무렇게나 바늘이 꽂혀 뒹구는 옷감을 치우고 잠든 그녀를 안아 들었다. 솔직히 창가에서 침대까지 가는 동안 난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었다. 그래서 내가 파트리샤를 내려놓았을 때 파트리샤는 이미 몽롱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 깨워서 미안합니다. 좀 더….
-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더 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파트리샤는 내게 그렇게 물었다. 처음 묻는 거였다. 나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넘기며 선선히 대답했다.
- 당신 닮은 딸이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국왕 조슬랭은 미혼에다가 고명아들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동으로 후사 없는 왕의 유일한 조카가 되고 강력한 계승권을 가진다. 손이 귀한 가문이고 왕조 초기이니 아들이라면 자연히 중요한 인물로 부상할 것이다. 그러나 국왕에게 장차 후계자가 생겨도 우리 아이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조카로 남을 수 있을까. 그 다음 대는….
- 나처럼 살면 어떡하려고요.
말을 인식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멈췄다. 파트리샤는 희뿌연 안개가 낀 퀭하고 피로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행복하지 않은 건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서 자란 공주가…. 내 아내가 된 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게…….
-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가슴에 비수가 콱 박힌 것 같았다. 나는 벼락을 맞은 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손을 그녀의 머리에서 거뒀다. 파트리샤, 파티. 내 부름은 전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목울대에서 막혀 사라졌다. 이대로 밖으로 뛰쳐나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 …그 아이는 행복할 겁니다. 우리 아이잖습니까. 내가, 우리가…. 많이 사랑해주면…….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그런 위안 따위가 통하지 않을 여자니까. 내가 결혼한 여자는….
- ……잊은 것이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늦을지도 모르니 기다리지 마세요.
나는 이불을 끌어 그녀의 목까지 덮고 도망치듯 침대를 벗어났다. 힘이 풀렸는지 내 다리는 문에 다가가기도 전에 비틀거렸다. 길.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몇 겹으로 된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웅웅거렸다.
-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대체 뭐가.
- ……주무세요.
나는 내 아내에게서 도망쳤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이미 밤이 깊어 복도에는 내 발소리만 울렸다. 아예 복도를 빠져나가자 모래알처럼 흩뿌려진 별빛에 실려 마지막 여름날의 밤공기가 가슴에 들어찼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정처 없이 걷던 나는 아무 방이나 들어가 주저앉아버렸다. 지금은 다른 사람을 볼 자신이 없었다.
당신의 자리를 뺏은 건 내가 아니잖아.
난…….
보르도에 오고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지 못했다.
5일 내내 오락가락하며 내린 첫 가을비로 강이 다시 범람하고 미처 거두지 못한 작물은 비 피해를 당했다. 선왕 대부터 삽을 떴던 성곽 증축 공사도 잠시 중단되었다. 나는 국왕의 직할령인 보르도, 푸아티에, 생통주를 바쁘게 순회하며 피해 현황과 예상 수조량 등을 점검했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록 처남이 직접 오지 않았지만 나를 본 것만으로도 기꺼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부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재무관 공주를 기억했고 그 반려인 나를 진심으로 반겼다. 나는 날짜를 세는 걸 깜빡 잊어버렸고, 그렇게 내 20번째 생일은 나조차도 잊은 채로 훌쩍 지나갈 뻔했다. 해가 저물기 전까지.
생통주의 숲을 지나 가롱 강을 막 건너던 차 나루를 향해 보르도의 친위기사가 바삐 달려왔다. 저 이가 움직일 때는 긴급히 왕명을 전하는 때였기 때문에 나는 다소 긴장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기사는 활짝 웃으며 내게 공주가 해산을 앞뒀음을 알렸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홀린 사람처럼 서둘러 말에 올라 그들과 함께 왕성을 향해 달렸다. 맑은 가을하늘은 가득 꽃이 핀 것처럼 주홍빛과 분홍빛, 그리고 눈부신 금빛이 찬란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정신없이 성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이미 잔별들이 서쪽을 향해 서서히 흐르는 중이었다.
- 형, 어서 와. 그리고 생일 축하해.
평온하게 생일 축하를 받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익숙하던 우리 집은 커다란 고문실로 변해 피비린내와 비명이 진동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더운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 줄줄이 사람들이 들어가더니, 들어가자마자 피가 흥건히 묻은 천을 무더기로 안고선 바삐 뛰어갔다. 아내는 쉴 새 없이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나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장모가 곁에서 달래는 목소리는 비명에 가로막혀 끊어지기 일쑤였다. 그때 산실에서 궁의가 나와 처남에게 끔찍한 선택을 물었다.
- 국왕 폐하, 만약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머니와 아이 중에 누굴 살려야 합니까?
- 뭐야?!
처남은 야수같은 눈으로 궁의를 노려보았다.
- 무조건 둘 다 살려라! 만일 내 누이와 조카가 잘못된다면 여기 있는 전원을 참수해 성벽에 목을 꽂아놓겠다!
서슬퍼런 국왕의 노성에 궁의는 더 묻지 못하고 다시 들어갔다. 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걸 벽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왕손이 태어나는 것이니 아이의 삼촌이자 가주인 국왕에게 물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내 처자 둘 중 누구도 경시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 폐하,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 목소리는 병자처럼 덜덜 떨렸다. 성을 낸 이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보다 못한 궁내관이 국왕을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는 여기에 함께 있겠다고 버텼다. 나는 우선 처남과 함께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약 20일 만에 다시 돌아온 방이었다. 처남은 의자에 구겨져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올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숙부님도 돌아가셨고……. 필리파 누나도 과부가 됐다는데, 내가 큰누나까지 잃어야 해…? 이제 그만하면 됐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19세 생일을 두 달 앞둔 어린 국왕은 몸을 부르르 떨며 눈물을 참았다. 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내 동서의 부고를 그렇게 들었다. 왕성을 비운 동안 국왕에게 보고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지만 우리 둘 다 이 와중에 일을 할 만큼 무딘 신경줄은 아니었다. 내 손은 나도 모르는 새 처남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우리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날짜가 바뀌기까지 불과 한 시간도 안 남았을 때였다. 불현듯 끓인 수프 냄새가 방에 훅하고 풍겼다. 식사시간도 아니고 시킨 적도 없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내 텅 빈 속은 허기를 느끼기 전에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종들은 국왕도 나도 입실 허가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고 테이블에 식사를 차렸다. 그들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은 이 궁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었으니까.
- 할머니. 이 밤중에 어떻게….
손녀가 왕성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있단 걸 생각하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이내 도로 앉아 순순히 배를 채웠다. 정말로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70에 가까운 어른이 걱정해서 온 건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내가 없는 동안 파트리샤가 뭘 먹으며 지냈는지를 들었다. 처조모는 진통이 오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으니 그 전에 잔뜩 먹여뒀다고 설명했다. 역시 파트리샤는 하루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는 중이었다.
내가 첫 아이를 안아본 건 붉은 달이 완전히 물 밑으로 가라앉은 후였다.
아이는 내 바람대로 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할머니를 닮아 새까만 머리카락에 맑은 초록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생김새는 나를 많이 닮았다며 크면 아주 미인이 될 거라고 가족들이 한 마디씩 덧붙였다. 이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본다던 처남은 처조모의 이름을 따서 오라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어린 처제는 갓 태어난 조카의 말랑한 볼이 만지기 좋은지 톡톡 건드려보다가 아이에게 손가락을 잡혔다. 아이 부모인 우리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신이 난 것 같았다.
- 아들이었으면 했어요. 자유롭게 살게요.
모두가 떠나고 날이 밝은 후였다. 아침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오전이었다. 파트리샤는 우리 가운데에서 눈을 끔뻑끔뻑하는 오라드를 토닥토닥 재우며 지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부은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 나는 딸이어서 더 좋습니다. 딸로 태어났으니 그냥 우리 자식일 뿐이지 않습니까.
- 나는 이 아이가 슬프지 않았으면 했는데, 당신은 내 아우가 이 아이를 해칠 것부터 걱정했네요.
파트리샤는 딸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날 노려보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눈초리가 적이라도 노려보는 양 매서워졌다. 그녀는 무례한 천것의 손을 치우는 것처럼 내 손을 쳐내고 몸을 일으켰다. 나도 따라서 일어났다.
- 당신은 조슬랭이 제 혈육도 몰라보는 살인귀로 보여요? 4년이나 함께 지냈으면서 어떻게 그래요?
아비 잃은 조카의 재산을 빼앗은 내 백부도 악당은 아니었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길크리스트는 선량한 영주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재수 없게도 악인이나 의심 많은 치졸한 자가 큰 권력을 가져서 여러 사람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경우는 고금에 드물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본인의 품성과는 별개 문제이다.
- 조슬랭은 딸 갖고 싶다던 당신이 생각도 못 했던 아이 이름까지 지어왔어요. 그 아이가 당신에게 준 정이 부족했나요?
- 파트리샤, 당신 아우는 이 나라의 왕입니다!
나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높였다. 아이의 졸린 눈이 깜빡깜빡 불안하게 움직였다. 왕족으로 태어난 우리 딸은 가엾게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부모가 싸우는 모습부터 보게 되었다. 파트리샤는 내게서 보호하려는 양 오라드를 들어 품에 안았다. 눈은 여전히 날 쏘아보면서.
- 어떤 못된 것들이 당신에게 간악한 혀를 놀렸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그치고 나가요. 우리 딸이 태어난 날이에요. 지금은 당신이랑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언제나 남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무리를 경계했고 조그만 불씨도 남기려 하지 않았다. 알고서도 일부러 말했다. 내 말은 마치 잿불에 기름을 붓고 장작까지 던져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 나는 이 방에서 쫓겨났다.
- ……언성 높여서 미안합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외근을 나가면서 수집한 것들을 다 정리해서 조속히 발표해야 했다. 그게 파트리샤가 내게 부여한 쓸모였다.
쓰긴 씁니다…………… 연대기…… 정말로 쓰긴 씁니다. 쓸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집 나간 글빨도 안 돌아오고………
그리고 1만 3천자를 써도 안 끝납니다……………
제 푸아티에 가문 플레이 노을금빛 연대기를 읽어주신 분들은 화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죠…… 감사합니다………
어서 올리고 싶습니다………
문득 궁금해졌는데,
신랑: 어머니의 친할아버지가 스코틀랜드 국왕, 친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공작(현재 공작위는 사촌형이 승계), 차남인 부친은 백작, 본인은 3남
신부: 아버지가 아키텐 국왕, 외숙부가 프랑스 국왕, 고모부 둘이 나바라 왕세자/잉글랜드 국왕, 당숙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부르고뉴 공작
인데………
영국 말고, 유럽 대륙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이거 귀천상혼 안 걸릴까요?
크킹 시스템 상으로는 왕의 일족/공작(친조부)의 일족으로 패싱돼서 한 계단 차이였지만 좀 궁금해져서…
결론.
쓰는 중입니다. 어서 올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잼어요
잼? (딸기잼 사과잼……)
나는 기다렸다 당신의 새 글을. 이것은 매우 좋다. 하지만 나는 원합니다 본편을.
요절 연대기에서 꿋꿋이 딸을 지켜낸 왕국의 수호자의 얘기군요. 늦어도 상관없으니 연재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ㅋㅋ
힘세고 강한 아침. 만일 내게 묻는다면, 나는 왈도.
ㅋㅋㅋ ㅇ<-< (약하고 괴로운 아침입니다)(그래도 명색이 노을금빛 연대기 7~8편의 주인공이고 통치기간으로 따지면 조슬랭과 파트리샤 남매는 물론이고 기욤이 아키텐 국왕으로 다스렸던 세월을 추월하니까…)
좀 더 올려놨습니다. 스압인데도 아직 얜 고작 한국 나이 21세입니다……
@디아나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이제 요절 연대기 본편을 주시면됩니다 ㅎㅎ
자주 잊고 있는 점이 게임이나 연대기 인물들 나이가 겪는 일들을 감당하기에 벅찬 나이인 친구들이 많네요
@콤콤 애들만 남겨놓고 죽어버린 초대가 제일 잘못한 거 같고…… 길패트릭 쪽 가계도 요절가계라서 좀……
(친부 - 23세 병사 / 친모 - 48세 병사(흑사병) / 백부 - 25세 살해 / 큰형 - 48세 병사 / 작은형 - 21세 병사 / 사촌형 - 32세 병사(흑사병) )
어서 적으시면 됩니다!
지금 적지는 않았지만 좀 더 복붙해서 올렸습니다(널브랑)
제가 싸움을 붙여놓고 "아이고 얘들아 너희가 왜 싸우니 게다가 자식 보는 앞에서…" 하니 묘하게 싸패가 된 기분이지만(…) 게임 외적으로는… 제대로 된 피임도 없던 시절에 쌍방이 외도 혹은 혼인 기간 중 별거나 학대가 없으면서 외동딸 하나였을 이유와 제가 그동안 썼던 것에 대한 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