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T7liNUTS6vo
월남의 달밤♬♬
편안한,
마음으로 파월 날짜를 기다리는데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연말 연시라 잠시 오음리
에서 대기하면서 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유일한 낙으로 삼고 라디오 주변에 병사들이 빙
둘러 앉아서 청취하고 있었다,
그날이,
7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이라 특별식과 함께 간식으로 사탕과 비스킷 한 봉지가 나와서
사탕 빨고 잡담 하고 병영에서는 잡담 중에 여자 나오는 음담패설이 으뜸이라 욕쟁이 이 병장
인기 최고지,
걸쭉한,
음담 잡설에 귀를 쫑긋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흥분한 아나운서 목소리가 명동 대연각 호텔
화재 상황을 속보로 흘러나오고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에 직접 나오셔서 현장에서 지시 내리고
있다 는데 많은 사람들이 화마에 희생되는 참혹한 현장 중계에 병사들은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병사들은,
입대하기 전에 어디 대연각호텔 같은 특급호텔에 투숙한 경험이 있겠는가 사회에서 어렵고 힘
들었던 삶의 한복판에서 고생했던 전우가 대부분 이어서 타서 죽고 질식하고 투숙객이 고층에
서 뛰어내리다 추락사하는 아비규환에 발가벗은 여성이 줄사다리 타고 내려온다는 현장 중계
에 구석에 앉아 있든 최일병 내뱉는 한마디
?놈들 싸다~싸.
"반발심인가 열등감의 발로 인가 우리는 이국땅 멀리 목숨걸고 전쟁하러 가는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호텔에 들어가 있는 것이 몹시 비위 상했나보다 나라위해 먼 나라 이국 땅에서 총들
고 싸우는 사람 따로 있고 남녀끼리 호텔에서 유희하는 사람 따로 있는가 병사들아 남이야 잡
질을 하든 발광을 하든 신경 쓰지 말자고 전투력에 도움이 안돼,
교육훈련 끝나고 봉급 일년치 받았지 훈련 중에 친한 동료 에게 막걸리 한 사발 받아주고 같은
부대 헬기부대 배치명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되었건 익숙치못한 정글 비행에서 전우애 다짐하
고 살아 돌아와서 명예롭게 제대하자던 전우는 지금은 미국에서 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봉급 받는,
날은 오음리는 대목이지 외상술값 갚고 단골로 들락거렸던 아가씨와 작별 인사하고 외상으
로 키스한 값 갚아 줘야지 대한민국에서 외상으로 입맞춤 하는곳은 오음리 밖에 없지 전투에
나가는 병사에게 관대했었지.
72년 새해가,
시작되고 트럭에 분승하여 출발하는데 병사들에게 위로해 주었든 아가씨들 분바르고 눈썹 화
장하고 손에 손에 태극기 들고 열심히 흔들며,
오빠 꼭 살아서,
돌아와 왠 지 가슴이 찡 하게 들리는지 헬기타고 베트콩 많이 잡아 꼬옥 살아서 돌아와야 해 드
문드문 주민들 모습도 보이고 트럭 좌우로 앉은 우리는 답례로 주먹을 마구 흔들어 주었지 선
두차를 필두로 엔진시동 소리와 함께 서서히 차량이 움직이고 질서 정연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운 오음리를 뒤로한 채 승리하고 살아 돌아오리라 다짐하면서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춘천
으로 향했다.
춘천에서 군악대의 환송식 끝내고 전용 야간열차로 부산에 도착하니 수송선이 대기해 있었다
처음 타보는 여객선은 해운대 촌놈 얼을 빼고도 남았다.
배는 왜 그리 큰지 가설해 놓은 발판으로 배에 올라타니 의장대와 여고생들은 백마 군가 합창
으로 환송해 주었다 가설해놓은 발판은 철거되고 부두와 배 사이에는 바닷물이 넘실대고 육지
와 유린된 상황에서 여인들은 오빠 여보 하고 소리쳐 봐도 주위에선 안타까운 눈물과 메아리만
들릴뿐,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데 누군지 머리가 잘 돌아가 선물 꾸러미에 빨
랫줄 단단 하게 묶고 한쪽끈으로 사과를 칭칭동여 매어서 배위로 힘껏 사과를 집어던지면 갑
판에 있든 병사가 사과를 받아 줄을 잡아 끌어 올리면 선물 꾸러미가 배위로 올라오는데 계급
성명을 적은 것을 보고 본인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전우애를 발휘하고,
인기 있는,
내용물은 김 오징어,볶은고추장 고추장에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우리 아들의
무사함을 밤낮으로 빌고 또 빌었겠지 속으로 얼마나 우셨을까?
배는 천천히,
오륙도를 바라보면서 떠나는데 부웅 부웅 구성진 뱃고동소리와 3부두에서 흘러나오는"아아아
잘있거라 부산 항구야 아~아아"구슬픈 음악에 긴여운을 남기고 육지와 서서히 이별하면 웅성
대든 장병들은 갑자기 숙연해지며 눈물을 보인다.
뱃전을,
잡고 훌쩍이는 장병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병사 부산 제3 부두를 향해 넋나간듯 바라보는
장병들 이기고 죽지않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지요.
같은 비행대 장글창공을 누비든 절친 이 ?? 대위는 귀국 후 1994년 서해지역에서 헬기 조정 중
돌발사고가 발생 순직 하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였으며,
당시 미 해병 중위 제임스 하이네스 (James Hainse)전우 오른쪽 현제까지 서로의 안부를 주
고 받고있답니다
제임스 하이네스 (James Hainse) 예비역 미 해병 대위의 현재의 모습
첫댓글
부산항을 출발할 때 작은 배가 큰 군함(파월장병을 태운배)을
이끌고 뱃머리를 돌릴 때의 그 뱃고동소리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내가 이 배를 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는지???
하는 생각이.손톱 발톱 깎고 머리카락 뽑고 유서 써는 그 기분을
지금도 아찔아찔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향수가 느껴집니다..
~단결~!
한참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배안에서주던 양식이 얼마나 맛잇던지 월남가면 매일 이래 먹는줄 알았더랫는데 ㅎㅎ
참전 시 미 그린베레 장교가 소지한 비상식량으로
닭고기 분말을 본 기억이 납니다 .A 레이션 B 레이션 C레이션 다 먹어보니
맛의 차이가 있더군요..
지금도 C레이션 맛은 잊지를 못한답니다 ㅎ
참전마중 고맙습니다
늘 강건하소서
월남전을 통해 우리 나라는 현재의 경제 발전을 이뤘지요
혹 자는 민간인의 희생을 말 하는데 그것은 전쟁이 뭔지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 합니다
전쟁은 그 자체가 사람을 죽고 죽이는 만행인 것을 ....
총탄은 남녀 노소 빈부를 알아 보지 못해요
아직까지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제의 실정
어떤 명분이라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그래도 나라를 지키시는 님들이 있었기에 ..
튼튼한 국력많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 아닐까요
저는 역사속에서만 배웠던 그시절의 월남전 참전의
이야기를 접하는 군요
고운글 감사합니다.
항상 건행하십시오^^*
그래요 지금의 이 나라가 70.80.90년대 일밖에 모르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데 일을 할 수 있도록 그 역권을 마련 한 사람의 뜻은
표현되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60년대에 국민소득이 60여 불에 불과 했으나 70년대 초에
목숨을 담보로 월남에서 전쟁 후 철수할 때의 국민소득이
몇 년 만에 120불이 넘는 엄청남 성장은 피의 대가로
이룩했습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지금의
3만 불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귀한 걸음 감사합니다.
마초님~
그 당시 친한 친구의 오빠들은 동생들
월남 갔다 돌아 올때까지 잘있어 하고 떠났습니다.
친구 오빠는 돌아왔지만 저를 귀엽게 봐주든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네요.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울부짖는 그 모습들 지금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참전 용사들은 그 트라우마로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들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크지요.
샛별사랑님도 전쟁의 고통스러운 그런 상흔을 겪으셨군요.
이 지구상에 전쟁은 없어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는 전쟁의 역사로 지금도 이어져 가네요.
인간 세상에서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참 가슴 아픈 삶입니다.
귀한 걸음주심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부두에 나가서 배웅했던 초등 생일때의
내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 분들의 있으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선배 님 수고 하셨고 고맙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 주신 선배 님들 에게 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그 당시 배 갑판에서 내려보니 아우님
태극기 흔들고 환영하는 것 보고 있었제 푸하하
참전시절뿐만 아니라 요즘도 월남전에
관한 방송을 보면 먼저 헬기소리와 헬기의
모습이 화면에 뜨는데 이게 월남전을 대표하는
중요병기 대명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늘 항구여일로 흔적주신 아우님 새해 더욱더 축복받으소서
오빠 살아서 돌아오라는 그 말이 저에게도 공감이 갑니다.
제 벗은 오래전 월남전에서 뿌린 제초제인지 뭔지 그것으로 인해 저 세상을 갔습니다.
이 글로 인해 그 벗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1961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전에서 사용한 고엽제
살포량은 9,100만 Kg 이며 살포면적은 170만 약 (51 억 평)
으로서 월남땅의 4분지 1을 살포한 셈이다,
고엽제를 구성하고 있는 화학물질 중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카코딜 산과 2,4,5-T이다,
최근 미국에서 도 물의를 빚고 있는 다이옥신이라는 독성물질이
170kg 정도 불순 물로 섞여 저 있지요
다이옥신 은 170kg (약 2천만 드럼)으로서 이는 전 세계 인구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도 남을 가공할 만한 양이였지요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많은 전우들이 가족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답니다
낭만 선배님의 가슴 아픈 사연 접하고갑니다
~단결~!
1972년 10월 초 부산항 제3부두에서
배 타고 5일간 대기했다가
근 10여일간 잔잔한 바다위를 떠났던
마지막 파월 24제대인가?로 갔던 기억 생생하네요
월남 도착하자마자 휴전 된다고 하더니
1973년 1월 27일 휴전 되던 날 아침 주월야전군 사령부 인근 나트랑 바다에 포탄 몇 발 떨어저
우리 모두 지하 벙커에 들어가 있다 나온 일..
갈 때는 배 타고 올 때는 뱅기타고 나왔었지요
그래도 몸성히 귀국하셨다니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고요
두고 가는 전우의 영혼이 있기에..
이제는 간다 조국의 품 안으로 가지만
전우의 시체를넘고넘어 탈환했던 638 고지
이곳뿐만 아니라 월남 전쟁터에서 산화하신 전우님들이여
편안히 잠드소서 올 한 해를 보내면서 님들의 명복을 비옵나이다,
저 역시 마지막 비행기를 탔는데 암시장에서 구입해 쓰던 Petri 카메라,
소형Sanyo 녹음기,휴대용 Crown전축,日製 計算尺과 쓰던 물건을 넣은
따블백을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통역수당(50불)도 중앙경리단에 송금되어
박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몸성히 많으로 만족하심이
건강하게 오셨다니 다시한번 감축드립니다
이제사 이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때 당시 월남전의 실황이 생생합니다 먼 베트남의 이국땅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싸웠던 파월 군인들 고생많았습니다 . 동작동 국림묘지의 병사의 묘역에서 같이 뭍고 싶다는 군인중에 군인
채명신 장군의 그 병사들을 사랑하는 마음 ...........
글을 읽다가 가슴이 찡해옵니다. 그 어렸던 시기를 잘 넘기신 마초님 대단하십니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애국심으로 국위를 선양시켰고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애국의 혼을 바쳤던
파월용사들 국립현충원 여기 그들이 잠들어 있지요
채명신장군 미국과 동맹은 더욱 굳건해야 하지만 결코 끌려가지는
않겠다 채명신장군은 파월사령관으로, 고압적인 참전국 미군에게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꼭 해야할 말 요구할 것들을 까칠하게 따져 모두
얻어낸 장군입니다.채명신장군이 월남전에서 가장 큰 업적은 한국군
독자적 작전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 받았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지요.
채명신 사령관 님은 월남전에서 5만 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백전 백승 하신분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뛰어넘을 것입니다.이순신 장군을 오늘날 최고의 명장으로
만든 이는 바로 마산이 낳은 노산 이은상 님이 있었기 때문이지요.이은상 선생님이
뛰어난 필체와 한문 난중일기 해석으로 "이순신 장군 일대기"와 "성웅 이순신"이라는
작품을 씻기 때문에 오늘날 잘 알려져 있지요.채명신 장군님도 먼 훗날 이은상 선생님
같은 분을 만나면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알려지리라는것이 명약관화한
일이고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선 죽으면 똑같다고 하여 사병이나 장군이나 똑같이 나를 사병묘역에 묻어달라 이 얼마나 훌륭한 말씀 인지요
존경합니다 장군님
선배님 멋진 관심으로 전쟁들의 영혼이 힘이 나겠군요 감사드립니다
~단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