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들러서 초기불전연구원의 여러 좋은 글과 책으로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작에 인사는 못 드렸지만 초기불교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계시는 여러 스님들과 불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모이는 곳에서 독서토론을 정기적으로 하는데 근래에는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공자, 노자 등의 성인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부처님을 주제로 했었고요. 도서는 숫따니빠따로 정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나온 니까야 시리즈로도 꼭 진행하고 싶습니다.
독서토론회에서 발제의 의미로 글을 썼는데 빠알리 삼장과도 관련된 글이어서 여기에도 실어 봅니다. 많은 의견과 지도, 편달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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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따마 붓다, 빠알리 삼장, 숫따 니빠따에 대한 소고 ]
1. 한국 현대 종교문화사의 두가지 사건
현대 한국의 정신문화사, 더 구체적으로는 종교분야에서 저는 크게 두가지 사건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1970년대 중반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모여 공동번역 성서를 번역한 일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사건이지요. 두 번째 사건은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일로 흔히 빠알리 삼장이라고 불리우는 초기불교 시절의 경전이 여러번의 중역을 통하지 않고 빠알리어에서 직접 번역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죠. 초기불전연구원을 통해 각묵스님과 대림스님,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통해 전재성 박사 등이 작업하고 있는 이 역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는 비단 불자뿐만 아니라 초기불교와 붓다의 육성을 최대한 가까이 확인하고 느껴보고 싶은 인문지성들에게도 귀한 사건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점에서 빠알리 삼장 중에서 경장에 해당하는 쿳다까 니까야의 한편에 해당하는 <숫따 니빠따>를 통해 붓다의 사상과 초기불교 시절을 이해해 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습니다.
2. 고따마 붓다
고따마 붓다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에 네팔 지역의 샤까족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석가모니로 불리는 것은 샤까족의 모니(성자)라는 한자어의 다른 표기입니다. 원래 이름은 고따마 성을 지닌 싯다르따 즉 고따마 싯다르따입니다. 붓다(부처, 불타)라는 표현은 깨달은 자라면 누구나 붙일 수 있는 일반용어인데 우리가 흔히 부처님이라고 하면 고따마 싯다르따를 일컫습니다. 붓다는 고따마 붓다 이외에 더 구체화하자면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 붓다, 미래에 오실 미륵 붓다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고따마 싯다르따, 붓다, 부처님, 불타는 대개 고따마 붓다를 지칭합니다. 그는 물질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많은 것을 누릴 곳에서 태어났으나 29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을 시작합니다. 수행 전에 그는 이미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출가를 한 불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걱정없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놀라운 것은 29세에 출가를 하여 불과 35세에 대오각성을 하였다는 점이죠. 출가를 한 이후에 그는 여러 수행자와 사문을 찾아다니고 극한 고행을 하기도 했지만 편한 방식으로 하거나 극한 고통의 방식으로 하는 양쪽의 방법이 능사가 아님을 인지하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후에 알려진 중도의 방식(중도철학)으로 큰 깨달음을 이룹니다. 붓다는 80세에 열반하기까지 40년 넘는 세월동안 교화와 설법을 통해 인도지역과 주변의 많은 이들을 수행과 깨달음의 길로 이끕니다.
3. 결집과 빠알리 삼장
붓다께서 열반하시고 불과 얼마 안되어 수백명의 제자들이 붓다께서 남긴 말씀을 확인하는 모임을 가집니다. 이것을 ‘결집’이라고 하는데 이는 수백년의 긴 시간의 간격을 두고 4차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빗대어 얘기하자면 기독교의 사상과 성경 구성을 정리하기 위해 모인 니케아 공의회와 대비되는 사건인 셈이죠. 놀라운 것은 40여년 넘게 설법하신 붓다의 방대한 말씀들을 1, 2, 3차 결집때에는 주로 확인, 낭독, 암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원전 80여년전, 즉 붓다 열반 500년이 지난 후 4차 결집을 통해 붓다의 말씀은 비로소 빠알리어로 기록이 되어 경전으로 전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접하게 된 빠알리 삼장의 기원입니다.
빠알리 삼장은 티-피타카(Ti-pitaka;세개의 바구니)라고도 하는데 크게 경(經;숫따 삐따까 Sutta Pitaka), 율(律;위나야 삐따까 Vinaya Pitaka), 논(論;아비담마 삐따까 Abhidhamma Pitaka)의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장은 붓다의 말씀을 주로 담았습니다. 경장은 구체적으로 디가 니까야(Digha Nikaya;긴 길이의 경),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중간 길이의 경),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주제별로 모은 경),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부수별로 모은 경),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15개의 독립된 경)이라는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산스크리트 원전에서 한자로 번역된 아함경과 대비됩니다. 말하자면 디가 니까야는 장아함경, 맛지마 니까야는 중아함경, 상윳따 니까야는 잡아함경, 앙굿따라 니까야는 증일아함경에 대비되고 굿다까 니까야는 전부 한자로 나오지 않고 법구경(담마빠다)과 경집(숫따 니빠따)등의 일부만 소개가 되었습니다. 또한 니까야 시리즈와 아함경은 각각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를 토대로 했기에 모든 구절과 문장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좀더 신경써야 할 부분은 한자로 쓰여진 아함경의 경우 한자로 접하거나 다시 한글로 번역되는 것을 봐야 하는데 문제는 이의 원전격인 산스크리트어 경장이 거의 소실이 되어 현재로서는 알기 힘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4. 아함경과 대승불교에서 니까야와 초기불교로 가는 걸음
아함경은 금강경이나 화엄경 등 대승불교 경전 위주로 보던 한국의 사례에서 보자면 외면받았던 경전에 속합니다. 금강경이나 화엄경은 그 숭고함과 깊이의 철학에 있어서 두고두고 음미할 가치가 높은 경전들입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한자로 된 책을 통했기에 진가가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 면도 있었으나 근래의 각묵스님의 금강경과 오리지널 화엄경이라고 평가받는 전재성 박사의 십지경 번역본은 우리 정신수준의 역량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 덧붙여 초기불교와 붓다의 생생한 육성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함경, 더 나아가서는 빠알리어로 이루어진 니까야 시리즈를 봐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대승불교 위주의 한국에서는 대승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소승이라 치부되던 아함경에 대한 무시나 외면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아함경은 그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니까야 시리즈의 전부도 아니고 산스크리트어를 통한 한문번역인데다 일부 고승들이나 한자가 익숙한 전문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한글로 다시 중역이 된 것을 봐야 하므로 초기불교의 아름다움과 깊이가 전해지기 힘들었던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에 성과가 이루어지고 있는 빠알리 삼장의 번역작업들은 불자들과 수행자들과 지성들과 다른 독서애호가들에게도 크나큰 환영의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는 초기불교의 모습을 아함경과 후기불교 내지는 대승불교의 시선을 넘어 소승불교로서만이 아닌 초기불교의 시선으로 보고 음미하고 재해석할 때가 되었습니다.
5. 숫따 니빠따
숫따 니빠따(Sutta Nipata)는 말씀의 모음이란 뜻으로 ‘경집(經集)’이라고도 합니다. 숫따니빠따는 빠알리어 삼장 중에서 담마빠다(법구경)와 함께 쿳다까 니까야에 속하는 경전입니다. 한국에서는 법정스님과 다른 분들에 의해 일찌기 소개된 책입니다. 제가 보기에 붓다의 말씀을 접하는 길은 숱하게 많은 경전들을 보는 방법이 있지만 굳이 한 권을 통해 먼저 접한다고 하면 저는 주저없이 숫따니빠따를 꼽고 싶습니다. 문체가 소박하고 직관적이며 쉬울 뿐만 아니라 삶의 자세와 세계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따니빠따 역시 일역이나 영역을 통한 중역이 대부분이어서 그 책의 진가가 드러나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있었는데 근래에 일아 스님과 전재성 박사 등을 통해 빠알리어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스님과 불자들도 이 책을 통해 숫따니빠따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불교나 부처님에 대한 숭배나 외면 등의 선입견을 걷어내고 2600년전에 오셨던 뛰어난 지성이 어떤 말씀을 남기셨는지 타 신자들이나 무교자들도 한번은 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역사적으로 숱한 철인들이나 지성들의 이야기는 곧잘 보는 반면 정작 성인급 인물들의 말씀은 종교나 제도의 영향으로 접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6. 성인들의 말씀과 종교와 역사
아무리 뛰어난 지성인들의 말씀이더라도 사후에는 그 뜻이 온전히 전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 역사가 2000년이 넘어가는 세월에는 왜곡과 변형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의 경우는 그 뜻의 왜곡을 막기 위하여 경전을 정리하고 수립하고 전하는 일에 많은 정성을 쏟기는 하지만 문장과 책의 강조점을 어디에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분파가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같은 종교 내에서도 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사랑과 고따마 붓다의 자비라는 큰 정신에 비춰봐서도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분파와 종교라는 외피를 벗어놓고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겼던 지성들의 원래 말씀과 뜻을 이해하고 음미하고 이 시대에 맞게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할 시간입니다.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지구촌의 시대, 인간들의 문명활동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생태계가 위협받는 시대라면 더욱 더 그렇습니다.
첫댓글 _()_불국토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초기불교 불자입니다.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가 너무 당연한 일반 상식으로 정립된 불국토를 말합니다.
선업이 결실을 못 맺고 훌륭한 조건들이 결여돼
목적과는 무관하게 쓸데 없이 연명하고 있습니다.
구부득고가 뭔지 정말 실감합니다.
법우님께서도 앞으로 찾게 될 진정한 목적을 위해
많은 선업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입장에서 법우님 글을 읽으니
각묵 스님의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을 처음 시청할 무렵 제 자신이 떠오릅니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삶의 뚜렷한 목적도 없이
그렇게 다들 많이 얘기하니까 그냥 입 밖에 내뱉는 식이였습니다.
우선적으로 초기불전연구원의
초기불교 입문, 초기불교 이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청정도론을
각묵 스님 강의와 카페 글을 통해
차분히 제대로 익혀보시기 바랍니다.
확신이 안 생기시면 어쩔 수 없지만
초기불교와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에 확신이 생기시면
이를 바탕한 목적이 생길 것이고,
이 때는 싸우지 말고 다른 종교나 사상을
인정해주자는 단순한 생각이 결코 들어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완전한 종식은 오직 사성제를 익히고 팔정도를 실천함에 의한
즉, 교학과 수행의 실천에 의한 해탈, 열반의 실현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삿된 견해의 외도들을 인정하자는 것은
‘우리 모두 그냥 계속 고통스럽자’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재가 오계는 필수이므로 폭력이나 그릇된 방식은 지양해야 하지만
외도들의 삿된 견해를 말살하고 바른 견해(정견)를 정립함은
초기불교 불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근본주의자니까 그런 소리하지!’
라 하시면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법우님 글을 읽고 떠오른 점을 적어 봤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뜻 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기 바랍니다.
혜찬 합장_()_ _()_ _()_
재가 수행자로서 이런 댓글은 제게 좋은 자극이 됩니다. 근본을 파악할수록 용맹정진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늘 좋은 의견 주시기를 바랍니다~
_()_ _()_ _()_
사두 사두 사두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 _()_ _()_
훌륭하십니다.
독서 토론 모임을 갖는다는 것 자체,
발제 방식을 택하고 있는 점,
석가모니 부처님 이해를 위해 초기불교 자료를 중심으로 삼고 있는 점,
빠알리 삼장이 한국에 번역된 사건을 주목하는 점,
발제문을 초불카페에 올리고 불자들의 의견을 들으려 시도를 한 점 등은
율리시즈 님이 얼마나 지혜로운 분인지를 짐작케 합니다.
초불카페를 발견하고 초불카페 자료에 주목한다는 것 자체가 불교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겠고요.
종교는 독특한 분야입니다.
종교의 문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 주위를 배회하는 불교 주변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삼귀의라는 문을 통과하여 불자가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저 같은 범부에게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요.
인문 지성을 추구하는 독서 토론이라면 그 한계 역시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실 것입니다.
인문 지성으로 ‘종교 주변인’은 될 수 있겠지만, 인문 지성으로 종교의 문에 들어서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인문 지성이 높아질수록 자기 생각을 내려놓기는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종교와는 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종교를 초월할수록, 종교라는 허울을 벗겨버릴수록 나는 더 성장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야말로 다양한 시각을 통해 그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놓치지 마시고 ‘겸손의 미덕’을 잃지 마시기 바라겠습니다.
인문지성을 지향하는 독서토론이라면
기독교인에게서 불교를 배우고,
대승불교인에게 초기불교를 배우고,
물리학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수학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판사에게 불교를 배우고,
심리학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철학자에게 불교를 배우고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문지성’을 목적으로 할 때 가능한 일이지
불교라는 종교를 제대로 배우는 방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 불교를 배우고 싶다면 불교 전문가에게 배워야 합니다.
초기불교를 배우려면 테라와다불교 전문가에게 배워야 합니다.
초기불교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해드리는 책이 있습니다.
<초기불교 이해>, <아비담마 길라잡이>, <청정도론>
독서토론에서 다루기는 부담스러운 책입니다.
인문지성을 지향하는 독서 토론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맛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싶다면’
‘깔라마 경(A3:65)’, ‘범망경(D1)’ 같은 경 하나를 정해서 그 주석까지 진지하게 읽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맛을 조금이라도 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 보입니다.
첫째는 느리게 읽기이고, 둘째는 테라와다 주석과 함께 읽기입니다.
테라와다 주석과 함께 읽기가 가능하려면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번역 출간한 책을 텍스트로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스승 없이, 기초 지식 없이, 책으로 배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깔라마 경'을 읽고는 ‘깔라마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라는 식으로 이해(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길게 적어 보았지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범부의 한 의견일 뿐이지요.
다 잊으셔도 좋겠습니다.
독서는 좋은 일이고 유익한 일입니다.
독서 토론을 통해 행복에 한 발짝씩 다가가시기 바라겠습니다.
_()_ _()_ _()_
@자나난다 부회정님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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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과 취지를 너무 잘 이해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여러 훌륭한 책들은 기나긴 한국 불교사에서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이제서라도 나온 것이 한편으론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정신성의 깊이와 유구함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라 생각됩니다. 이 값진 책들을 하나씩 모두 다 정독할 참인데 유익한 조언을 해 주셔서 더욱 감사드리고요. 종종 소감과 의견도 남기겠습니다. 아낌없는 편달 바라겠습니다.
@자나난다 공감합니다.
우리 나라 스님네들이 자나난다님이 비판하는
인문학으로 불교읽기를 하려 하고 또 그렇게 설명하고 포교하려하는 것을 좀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려하는 재가자들은 그런 스님네에게 모여들구요...
전 속으로 그냥 환속하시지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외부재가자가 아닌 스님네들이 자난난다님이 비판하는 불교공부를 하는것을 어떻게 보아야할까요?
사두사두사두
사두 사두 사두
_()_()_()_
[대머리수일 법우님께]
저보다 훨씬 견문이 넓으신 분이 이렇게 질문을 하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자나난다는 범부입니다.
자나난다가 무슨 견해를 가지고 있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테라와다불교에 귀의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한, 테라와다교단의 견해를 따릅니다. 제 개인 의견은 없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빠알리 삼장과 주석을 통해 테라와다불교를 공부하시면 되십니다.
‘외부재가자가 아닌 스님네들이 자나난다님이 비판하는 불교공부를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제가 비판한 공부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인문학적인 불교 접근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특성을 지적할 뿐입니다.
인문지성, 인문학적 소양을 목적으로 불교를 접근하는 사람은 그 목적에 맞춰서 그렇게 공부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칭찬을 하면 하지 전혀 비판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열린 시야’를 가지고 ‘전체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지요. 그러나 ‘그렇게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도 사실은 ‘내 생각’,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그것도 ‘범부’의 관점이지요, 그분이 성자가 아닌 한. 부처님을 제외하고 ‘다 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 수 없듯이, 전체를 보는 범부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한두 가지 초기불교 서적을 읽고는 마치 초기불교를 내가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의 하나라도 있을까 염려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었던 것일 뿐입니다.
그분이 종교를 인문 교양의 하나로 접근하고 그것이 목적이라면
‘내가 책을 읽어보니 불교는 이런 것이구나. 그동안 내가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되어 만족스럽다. 다만 나는 이제 한두 가지 책을 읽었을 뿐이다. 기껏해야 멀리서 숲을 본 것이거나 나무 하나나 돌덩일 하나를 본 것에 불과할 수 있을 테지. 이제 불교에 흥미가 생겼으니, 다음에 정말 불교의 진면목을 배울 기회가 되면 진지하게 알아봐야겠다.’ 하고 지나간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마치 자기가 불교의 진면목을 이미 다 맛본 듯이 생각한다면, 그분은 후에 불교의 진면목을 배울 기회가 생겨도 그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다른 종교, 다른 사상이야 저의 관심 밖이지만, 적어도 제가 신행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그런 식으로 기회를 잃게 된다면 저는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인문 지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분이라면 ‘내가 이 종교를 파악했다’라는 식의 자만심을 갖지 마시고, ‘나는 담장 밖에서 이제 조금 들여다보았을 뿐이다.’라는 ‘겸손의 미덕’을 잃지 않아서, 후에 ‘인간 존재의 한계성(죽음 등)’에 마음이 가고 종교가 필요하고 그것을 배워서 삶의 의지처로 삼고 싶을 때가 되었을 때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확한 길로 빠르게 종교의 문 안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글을 쓴 것이지요.
그분이 기독교에 마음이 가면 기독교 전문가인 목사님을 찾아가서 배우면 되실 것이고, 대승불교에 마음이 가면 대승불교 전문가인 스님께 가서 배우면 되실 것이고, 초기불교에 마음이 가면 테라와다 불교 전문가인 테라와다 스님께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 될 것이고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종교의 문에 들어가는 가장 상식적이고 무난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는 다양한 불교를 하시는 다양한 스님들이 계십니다. 스님들께서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포교하는가는 스님들께서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저는 어떤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재가 신자입니다. 테라와다불교에 귀의했으니 테라와다교단에서 신행 생활을 합니다. 귀의했으니 테라와다 교단을 비판하거나 스님을 비판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테라와다교단이나 사찰의 스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는 그 사찰을 나가지 않으면 됩니다.(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스님이나 신도 때문에 절에 가고 안 가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비판할 생각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교단이나 절을 바꾸고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저는 범부이고 재가자인데,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교단이 바뀌고 절이 바뀐다면 그것이 성자의 불교가 되겠는지요?
제가 테라와다교단을 정말 바꾸고 싶다면 그 교단에 출가해야겠지요. 그래서 승가의 일원이 되어 여법한 절차를 거쳐 바꿀 수 있으면 바꾸어야 하겠지요. 테라와다 교단의 일은 테라와다 교단의 출가 스님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선택을 하면 됩니다. 저는 그 교단을 바꿀 자격도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마음에 드는 사찰과 스님께 가서 배우고 신행하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테라와다교단에 귀의하여 테라와다교단이 전승하는 불교를 신행하는 저의 입장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다양한 불교와 다양한 교단이 있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 없는 불교도 있고 그런 교단과 절도 있습니다. 어떤 불교든 교단이든 자기가 귀의한 불교와 교단에 따라 그것에 맞추어서 행동하시면 되겠지요.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테라와다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전혀 다른 불교라 해도, 이름에 불교가 붙어 있으면 그것은 불교라고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교라는 이름이 붙은 불교들끼리 서로 경쟁하며 나름의 불교를 펼쳐 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불교가 분열되면 안 된다. 불교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또 그분의 신념에 따라 그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의 수행은 ‘부처님 가르침을 자기 삶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각묵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법을 일으키고 선법을 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배웠고요. 마음에 들지 않는 스님이 계시면 불선법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때 빠르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아, 내가 스님에 대해 불선법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고 바로 불선법을 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외부의 대상에 대해서는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온’이라는 사무량심을 제일 먼저 떠올리려고 노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범부이고 모든 글들은 범부의 한 의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범부의 의견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테라와다불교를 배우고 따르고 있으니, 제 개인 의견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테라와다불교를 배우시면 되실 것입니다.
초기불교를 통해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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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난다 예 제가 잘못이해했군요..
말씀 잘알겠습니다.
바쁘실텐데 이렇게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공부가 짧은 절 견문이 넓다고 해주시니 부끄러울따름입니다. _()_
자나난다님 감사 합니다 ^^ _()_
적어도 불교에 관한 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한, 테라와다교단의 견해를 따른다는
말씀에 확고함이 들어있는것 같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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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사두ㅡ사두ㅡ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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