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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북사태 발발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 봉기
사북탄광 노동항쟁은 1980년
4월 21일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에
위치한 동원탄좌사북광업소에서 노동자
들의 시위가 발생하 면서 시작되었다.
광부들은 회사 입장에 서서 임금인상을
결정한 어용노조의 위원장에게 사퇴를
촉구하며 투쟁을 벌였다.
경찰이 동원되었고 광부들과 경찰의 충돌
과정 에서 광부 한 명이 경찰차에 깔려서
부상을 입었다.
이에 흥분한 광부들에 의해 한 명의 경찰
이 사망하였으며, 광부들이 사북 지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북 탄광 노사분규 유혈사태로 번지자 이
에 흥분한 광부 노동자들이 노조지부장의
집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고 그의 처를
사북광업소 정문게시판 기둥에 묶어 집단
폭행을 하고 성적 가혹행위를 하였다.
4월 24일 경찰과 노동자들이 노조위원장
의 사퇴 등으로 합의를 보면서 종결되었다.
사건 이후 오랫동안 폭동으로 취급되었으
나 지난 2005년 사건의 주역인 이원갑씨
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바 있다.
▶2014년 호흡기 질환 '메르스'가 사우디
아라비 아 및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창궐
(81명 사망).
▶2012년 원로 작곡가 김성태 별세
▶2011년 일본 도호쿠 지방 부근 바다에서
규모 5.0 이상의 지진 연쇄 발생.
▶2010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전 국제 을림 픽 위원장 별세(향년 89세 278일).
2010년 사마란치 전 IOC위원장 별세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체육 관료를 거쳐 1980년 제7대 IOC 위원장에 당선된 사마란치는 2001년 자크 로게(벨기에) 현 위원장에게 자리를 넘길 때까지 21년간 IOC를 이끌어 왔다. 재임 기간 올림픽에 대한 거액의 스폰서십과 TV중계권 계약 등을 성사시켜 IOC의 재정적 기틀을 마련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지나친 상업화로 아마추어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사마란치 아래에서 올림픽은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로 성장했다. 그러나 1999년엔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뇌물 스캔들에 휘말려 위기를 맞았다. 미 솔트레이크시티가 올림픽 유치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을 IOC 수뇌부에 뿌렸다는 폭로로 사마란치는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으며, 이는 결국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원인이 됐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통해 한국 스포츠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쎄울(Seoul), 코레아”라고 1988년의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한 이가 그였다. 구소련과 미국의 대립으로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과 1984년 LA올림픽이 각각 반쪽 대회로 치러진 상태에서 사마란치는 적극적으로 서울올림픽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그는 또 한국의 국기(國技)인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대회부터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마란치는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공동 입장을 막후에서 적극적으로 중재해 성사시켰다.
▶2009년 제네바에서 이성주 주제네바 대사와
주제네바 EFTA회원국대사 간 서명된 "대한민국- 유럽자유무역연합 공동위원희 결정"
▶2009년 유럽 남방 천문대, 지금까지 발견된
외 계 행성들 중 지구와 가장 비슷한 크기의
'글리제 581 e’를 발견했다고 공식 발표.
▶2008년 참여 정부 말기(2008년 2월 중순)
청와대 전산망이 해킹당한 사실에 뒤늦게 알려짐.
▶2008년 대전컨벤션센터 개관.
▶2008년 대한민국 기상청 소속 국가태풍센터
개소(위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2007년 한국고속철도
(KTX의 누적 승객수 1억명 돌파)
▶2007년 이대호, 부산 사직야구장 개장이래
최 초로 장외 홈런 기록.
▶2006년 새만금 방조제 15년 만에 연결,
세계 최장 33Km
▶2004년 황우석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윤덕용 한국과학기술원 신소재공학과 석좌교수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상 수상
▶2002년 대구제일교회 새성전 헌당예배가 동산 동 234번지(전 영남신학교 부지)일대에 새 성전을 건축하고드려졌다.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 니 신사 참배 강행.
▶2001년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에 농둑만 선출
▶2000년 러시아 의회,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1999년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 사퇴
▶1999년 동티모르 독립지지 게릴라와 반대파
무장 민병대 평화협정에 서명
▶1998년 쿠바와 도미니카 외교관계 정상화
(1959년 6월 26일 외교관계 단절)
▶1996년 체첸 독립 상징 조하르 두다예프 사망
▶1993년 제49회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
(ESCAP)가 방콕서 개막
▶1993년 지하철 4호선 상계-당고개 구간 운행개시
▶1989년 덕혜옹주 사망
일제에 모든 것을 잃은 고종 외동딸
덕혜옹주는 조선 제26대 고종의 외동딸로 1912년 태어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고종은 딸이 4명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외동딸이었다. 환갑의 나이에 궁녀 복녕당 양귀인이 낳은,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위해 고종은 즉조당에 유치원까지 만들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덕혜를 일본총독부에 빼앗겨 생이별을 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황실 시종과의 혼인을 추진했지만 1919년 갑자기 승하했다. 어린 덕혜를 지켜줄 울타리는 사라졌다. 10살쯤에 복녕당 아기씨는 ‘덕혜’옹주라는 이름을 얻은 황족이 됐다. 이름을 얻자 자유는 사라졌다. 일본총독부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돼야 한다고 요구했고 어린 덕혜옹주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모와 떨어져 일본의 수도 도쿄로 보내졌다. 그가 탄 기차가 선 역에는 왕세자 이은의 부인이자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내성적인 아이는 말이 없었다.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지만 말이 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17살이던 1929년에는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숨졌다. 덕혜옹주는 어머니의 묘소 곁에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 봄, 소녀는 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다.
19살이던 1931년에는 일본 조정의 명령으로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했다. 다음 해에 딸 정혜가 태어났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정신분열증은 쉽사리 낫지 않고 덕혜옹주의 삶에 무거운 족쇄가 됐다. 결국 1946년부터 15년 동안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10년쯤 뒤인 43살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당했다. 딸 정혜도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23살의 나이에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일각에서는 현해탄에서 투신해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일본에서 모든 것을 잃은 덕혜옹주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봐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방자 여사로부터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의 귀국을 추진했다. 62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89년 4월21일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1984년 한국-카타르, 경제기술무역협정 체결
▶1983년 한국여성개발원 개원
▶1980년 강원도 정선군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 봉기
▶1980년 한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송욱 사망
▶1979년 로디지아 정부 초대수상에
무조레와 주교 취임
▶1978년 KAL기 소련 무르만스크에 비상착륙
소련에 비상착륙한 KAL기.
▶1977년 충북대, 청원군에서 20만년전 동물벽화 발견
▶1975년 티우 남베트남대통령 사임
▶1971년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사망
▶1967년 과학기술처 공식 설립
▶1965년 한국-감비아 국교 수립
▶1961년 황윤석 판사 변사사건
1961년 4월. 4 19혁명 1주년을 맞아 19일과 20일은 전국적으로 각종 이유를 내건 데모 시위가 밤늦게까지 벌어졌다. 이런 소용돌이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던 21일,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의 의문사였다. 이날 오전 9시경 서울시 중구 신당동 자택 방에 숨져있는 황윤석씨를 시아버지 손병도씨가 발견,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우리나라 여판사 1호, 황윤석 판사, 그녀는 19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당시 사학가 황의돈의 딸이었던 황윤석은 어려서부터 철학과 문학에 관심이 컸으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됐다. 스물 셋 나이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황윤석은 이듬해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판사가 됐다. 황윤석의 죽음이 신문, 라디오를 통해 떠들썩하게 보도되자 검찰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담당 검사에 오탁근 부장검사를 배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황윤석의 시체해부 결과 밝혀진 것은 베나드릴이라는 약물이 검출되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황윤석 판사의 사인이 뚜렷하게 규명되지 않자 항간의 관심도 점차 커져만갔다. 그러나 때마침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1960년 브라질, 브라질리아로 천도
1960년 4월 21일, 브라질이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이전했다. 해안을 따라 밀집해 있는 인구 편중을 시정하고 내륙 개발을 목적으로 한 천도(遷都)가 결정된 것은 1955년. 민주사회당 주셀리노 쿠비체크 대통령의 선거공약이었지만 1889년에 이미 제국헌법에서 규정했던 사항이었다.
브라질의 첫 수도는 1549년 포르투갈인들이 정한 살바도르였고, 이후 1763년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겼다가 이날 다시 브라질리아로 옮겼다.
쿠비체크는 대통령에 당선되자 7억달러의 차관을 빌려 ‘50년을 5년으로’라는 구호 아래 브라질의 현대화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신수도 건설과 공업성장 등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했다. 리우에서 600마일 떨어진 중부의 광대한 고이아스 고원에 위치한 브라질리아는 천재 건축가인 루시오 코스타와 유엔 빌딩 설계자인 오스카 니마이어 등의 설계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날개를 펼친 제트기 모양의 시가를 하고 있다. 수도건설로 내륙개발의 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와 함께 열정적 브라질 사람들의 생활습관과 동떨어져 사람들이 정 붙일 곳이 없고, 산업시설 부족으로 물가도 비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960년 소설가 이무영 사망
▶1950년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50년 한국은행법 국회 통과
▶1946년 `케인즈 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즈 사망
존 메이너드 케인즈
케인즈 경제학'의 창시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46년 4월 21일 63세로 사망했다.
영국 케임브리지셔에서 태어난 케인스는 영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이튼고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공무원이 되어 인도부 및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1911년~1945년 영국의 대표적 경제잡지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재무성 수석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 후 재무상 고문, 국민상호보험회사 사장, 투자회사의 경영자, '뉴 스테이츠먼 앤드 네이션'지의 사장, 브레튼우즈 협정 영국대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총재, 20세기 문예운동의 하나인 블룸즈버리그룹 회원, 음악미술장려회 회장 등을 지냈다. 케인즈는 경제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철학, 고전, 사상 및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케인스 경제학'의 원전은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다. 케인즈는 1930년대 대공황시대의 대량 실업을 배경으로 집필한 이 책에서 흔히 '케인스 혁명'으로 불리는 유효수요의 이론을 제창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용을 늘리려면 자유방임주의를 폐기하고 소비와 투자, 곧 유효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공공 지출 등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실업의 원인을 유효수요의 부족에서 찾고, 유효수요의 창출을 위해 정부가 조세, 화폐, 금융, 재정 등 경제 전반에 걸쳐 간섭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944년 주기철 목사 순교
▶1941년 그리스, 독일에 항복
▶1926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출생
1945.3.4 2차 대전 참전을 위해 군대에 가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엘리자베스 2세가 통치했던 영국은 무사했고 영국인들에게 마음의 여왕(Queen of Heart)이 됐다.또한 수많은 왕가들이 붕괴된 20세기에 두 개 이상의 독립국을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이다. 과연 무엇이 그녀를 여왕이게 했을까?
정치적 실권은 의회가 쥐고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영국은 역사상 시민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나라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백 년도 훨씬 전인, 1625년에 영국인들은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찰스 1세를 조용히 저승으로 보냈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지 63년 뒤, 영국인들은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가볍게 나라밖으로 내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군주제를 폐지하지 않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영국인들은 왜 왕조를 유지한 것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다. 영국의 왕가는 몰락한 다른 왕가들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엘리자베스2세의 할아버지 조지5세와 할머니 메리 왕비
명예혁명 끝나고 얼마 후, 영국에는 왕위를 이어받을 스튜어트 왕가 자손이 바닥나 버렸다. 결국 의회는 독일에서 스튜어트 왕가의 먼 친척을 데려와 왕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하노버 왕조의 시조인 조지 1세다. 평생 독일에 살았던 조지 1세는 영국의 정치 상황에 대해 잘 몰랐고 아예 영어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 후로 영국에서 정치적 실권을 쥔 것은 의회였고 왕은 자연스럽게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하노버 왕조의 가장 큰 문제는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왕의 위엄을 유지하느냐’ 였다. 어떻게 해야 군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것인가?
시간이 걸렸지만 하노버 왕조는 그럭저럭 자신의 역할을 찾아냈다. 그것은 국기나 국가처럼 왕이 국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왕의 역할이란 대외적으로는 영국을 대표하고, 대내적으로는 계급은 달라도 우리는 폐하의 신하라는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자손을 많이 두어 다른 나라 왕실과 사돈을 맺어 외교적 결속을 다져놓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이 모든 역할을 아주 잘 수행했던 하노버 왕조의 군주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런데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음으로써 하노버왕조가 끝이 난다.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출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의 아이들에게는 하노버가 아니라 작센-코부르크-고타라는 성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작센-코부르크-코타 왕조가 시작되면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아주 나빠졌다. 세계 1,2차 대전 일어나자, 영국과 독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입장이 곤란해진 것은 독일에 본가를 두고 있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였다. 더군다나 1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얼마나 많은 왕조들이 무너졌던가? 그들도 같은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한 몰락을 막기 위해서,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한다. 우선 작센-코부르크-코타라는 성부터 '윈저'로 바꾸었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들을 격려했다. 또 국민들이 싫어한다면 외국 왕가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왕가는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은 국민들에게 통했다. 이러한 혁신을 통해 윈저 왕가를 모범적인 왕가로 탈바꿈시킨 인물이 바로 메리 왕비였다. 사실 그녀의 남편 조지5세는 군주로서의 임무보다는 사냥을 더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이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바로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세기의 스캔들,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 덕분에 훗날 왕위를 물려받게 되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26년 4월 21일 런던의 브루튼가(Bruton Street) 17번지에서 태어났다. 곧 그녀에게는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Elizabeth Alexandra Mary)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고 알렉산드라는 증조할머니의 이름을, 메리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왜 그녀의 이름에 고조할머니의 이름, 빅토리아가 붙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은 그 긴 이름대신 그녀를 릴리벳이라고 불렀다.
릴리벳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고조할머니처럼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다음 왕위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큰 아들이었던 에드워드 왕세자가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조지 5세가 죽자 에드워드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가 바로 에드워드 8세이다. 그러나 운명은 때때로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일 년도 못 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했다. 이것이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리는 윈저공과 심슨 부인의 사랑이야기다. 이제 영락없이 차남이자 릴리벳의 아버지인 앨버트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할 차례였다. 그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거기다가 앨버트는 사람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말더듬이가 아니었던가!
어린 시절 릴리벳이라고 불렸던 엘리자베스2세
1936년 결국 앨버트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조지 6세이다. 더불어 릴리벳은 아버지의 추정상속인이 되었다. 그 말은 앞으로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는 한,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자, 릴리벳의 교육문제가 중요해졌다. 릴리벳의 아버지는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 되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왕이 될 교육을 받은 큰아버지는 자신의 자유연애를 위해 왕위를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릴리벳은 아버지, 조지6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이 때부터 왕에게 필요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또 큰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개인의 행복보다는 왕으로서의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배워야 했다.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은 훌륭한 교사들 밑에서 배우면 그만이지만 왕으로서의 책임은 교사들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릴리벳에게는 군주로서의 책임을 가르쳐줄 누구보다 훌륭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릴리벳의 할머니인 메리 왕비와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왕비였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에도 런던을 떠나지 않았던 조지 6세 왕가
할머니 메리 왕비는 엄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왕실의 위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에게 대중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보다 왕실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왕실의 의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다. 릴리벳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런던이 독일 비행기에게 폭격을 당하자, 릴리벳과 그녀의 동생 마가렛은 버킹검을 떠나 윈저성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두 공주들을 캐나다에 있는 하틀리성으로 피난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렇게 거절했다.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거에요. 나는 왕의 곁에 있어야만 해요. 그리고 왕께서는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으실 겁니다.” 전쟁 도중 메리 왕비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누구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고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국민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릴리벳, 2차 대전 참견을 위해 군대에 가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릴리벳은 열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 조지6세를 귀찮게 졸라댔다. 자신에게도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신도 입대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이다. 딸을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조지6세는 결국 타협책을 찾아냈다. 1945년 3월 4일 릴리벳은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투부대에 배치되는 대신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1938년 창설된 WATS는 젊은 여자들로 구성된 부서였다. 원래 WATS는 부대 안의 취사와 심부름, 그리고 매점 관리를 맡아보던 곳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자 WATS의 업무도 점점 커져 운전이나 탄약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릴리벳의 계급은 소위(Second Subaltern)였고 군번은 230873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맡은 일은 군용 트럭을 모는 일이었다. 릴리벳은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트럭을 몰거나 탄약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지금까지 거친 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었던 그녀가 흙바닥에 앉아 타이어를 바꾸고, 보닛을 열어 엔진을 수리했다. 그러나 릴리벳은 아주 즐겁게 그 일을 해냈다. 아마 그 시절이 그녀의 인생 중 유일하게 같은 또래 여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기회였을 것이다. 릴리벳은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는 동생 마가렛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 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때의 경험이 즐거웠던지 훗날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가정교사에게 교육시키는 대신 학교에 보냈다. 같은 해 5월 8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세계 2차 대전이 끝났다. 그녀는 동생과 함께 시내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게 큰 시련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트럭을 몰거나 탄약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던 릴리벳
아버지 조지 6세 타계에 연이어 할머니 메리 왕비까지 세상을 떠난 가운데 대관식 거행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과거 대영제국의 위상은 하루가 무섭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독립하였다. 그 후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가 잇달아 독립했다. 한때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제 영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몰락의 속도만큼은 늦추어야 했다. 영국은 영국연방을 통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1953년6월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엘리자베스2세 왕위 대관식을 치르고 있다.
1949년 조지 6세는 영국연방 국가들에 의해 영국연방의 수장으로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53개국이나 되는 영국연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결속을 다지기에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 그 일을 맡은 것이 그의 후계자였던 릴리벳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지 6세의 병은 점점 악화돼갔다. 1952년 2월 6일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을 미처 슬퍼할 틈도 없이 의회는 그날로 그녀의 왕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관식은 조지 6세의 장례식과 애도 기간이 끝난 뒤에 치르기로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그녀에게 또 한 차례의 슬픔이 찾아왔다. 엄격했지만 그녀를 매우 사랑했던 할머니 메리 왕비가 죽은 것이다. 메리 왕비는 죽으면서 이렇게 유언을 했다. "절대로 내 장례식과 애도 기간 때문에 릴리벳의 대관식이 연기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리고 그 유언은 지켜졌다. 연이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속에서 릴리벳은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영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신 앞에 맹세했다. 거기에는 작은 릴리벳은 없었다. 군주의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엘리자베스 2세만이 있었을 뿐이다.
▶1915년 배우 안소니 퀸 출생
▶1910년 `톰 소여의 모험` 작가 마크 트웨인 사망
1897.6.2 <뉴욕저널>을 통해 자신의 사망설을 부인하다
어린이 세계명작전집이든 완역(完譯) 소설이든 영화든 TV 만화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마크 트웨인의 작품을 한 번도 접하지 않기란 힘들다. ‘미국 문학의 링컨’, ‘미국 현대문학의 효시’로도 평가 받는 그다. 헤밍웨이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대해 ‘현대 미국 문학이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했다. 트웨인은 작가로서뿐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사회비평가로도 크게 활동했다.
"내 죽음에 관한 보도는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
1897년 한 저널리스트가 마크 트웨인의 건강 상태를 조사 추적했다. 그는 마크 트웨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마크 트웨인 사망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 61세. 그러나 그는 건강하게 살아 있었다. 그의 친척 한 사람이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이 마크 트웨인 와병설과 사망설로 오인, 확대되어 버린 것. 트웨인 자신도 자신의 사망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나갔지만 사망 기사가 언론에 실리지는 않았다. 트웨인은 1897년 6월 2일자 <뉴욕저널>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죽음에 관한 보도는 대단히 과장된 것이다.”
트웨인은 이후에도 사망설, 정확히 말하면 실종사망설의 주인공이 됐다. 1907년 4월, 트웨인은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박람회 개막식에 참석하러 증기선을 탔지만, 짙은 안개 탓에 증기선은 여러 날을 지체했다. 일행 가운데 일부는 열차 편으로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트웨인은 기차 여행을 싫어해 더 기다리는 쪽을 택했고 뉴욕이 아닌 다른 곳에 기항했다. 기자들은 그가 탄 배의 소재와 항적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예정대로 돌아오지 않자 1907년 5월 4일 <뉴욕타임스>는 마크 트웨인이 ‘바다에서 실종된 듯하다’고 보도했다. 뉴욕에 도착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트웨인은 다음 날 <뉴욕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바다에서 실종되었다는 설에 대해 부디 좀 더 철저히 조사해주시기를. 만일 문제의 보도에 그 어떤 근거라도 있다면, 나는 애도하는 시민 여러분께 즉시 알려드려야 하니 말이다.”
독서를 통한 자학자습으로 지식을 쌓아 작가가 되다
마크 트웨인의 본명은 새무얼 랭혼 클레멘스다. 필명 ‘마크 트웨인’은 배가 지나가기에 안전한 수심, 정확히 말하면 ‘두 길(fathom) 물 속’을 뜻한다. ‘한 길’은 약 6피트(약 1.8m)에 해당하고 ‘트웨인’은 ‘둘’(two)의 고어체, 그러니까 ‘두 길’을 뜻하는 셈. 미시시피강 수로안내인들은 조타수를 향해 ‘마크 트웨인!’이라 외치곤 했는데, ‘배 밑으로 수심이 두 길이니까(약 3.7m) 지나가기 안전하다’는 뜻이다. ‘마크 트웨인’ 이전에는 조쉬(Josh), 토머스 제퍼슨 스노드그래스(Thomas Jefferson Snodgrass) 등의 필명을 사용했다.
1847년 트웨인이 11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그는 인쇄소 견습공이 됐다. 1851년부터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18살 때부터 뉴욕,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등을 전전하며 인쇄공으로 일했다. 변변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공립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자학자습으로 지식을 쌓았다(그는 예일대 명예문학박사, 미주리주립대 명예법학박사, 옥스퍼드대 명예문학박사 등의 명예학위를 받았다).
22살 때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로 가던 중 증기선 수로안내인 호레이스 E. 빅스비가 트웨인에게 수로안내인 일을 권했다. 월 250달러 수입이 보장되는, 당시로서는 고소득 직종이었다. 트웨인은 1861년까지 수로안내인으로 일했다.
1884년에 출간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표지
어린 시절부터 미시시피강을 무대로 생활하고 뛰놀던 경험, 그리고 수로안내인 경험은 이후 트웨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첫 단편집 [캘리베러스군(郡)의 명물 뛰어오르는 개구리]를 내놓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각각 1876년과 1884년에, [왕자와 거지]는 1881년에 내놓았다. 트웨인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종종 미국의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됐다. 예컨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트웨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흑인을 비하하는 표현, 대표적으로 ‘Nigger’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여 인종적 편견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트웨인에게 흑인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고, 오히려 흑인들이 차별 받고 천대받는 현실을 여실하게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과 발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쏟다
매체 기고와 작품 활동으로 트웨인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발명에 쏟아 부었고,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와 친하게 지내며 그의 연구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트웨인은 유아를 위한 침대 부속, 새로운 방식의 증기 엔진, 콜로타입 인쇄기, 개량 허리띠, 식자기계 등을 발명했지만 쓸모나 수익성 측면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작품 [아더왕 궁정의 코네티컷 양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작품에서 미국인 시간 여행자는 아더왕 시대 영국에서 과학 지식을 활용한다. 이 작품 때문에 그를 과학소설(SF) 장르의 선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발명에 많은 돈을 쓰고 출판사 경영, 기타 여러 투자에서도 실패해 트웨인은 재정적으로 큰 곤란에 빠졌지만 강연과 작품 활동을 통해, 그리고 1893년부터 우정을 쌓기 시작한 친구 스탠더드오일 회장 헨리 H. 로저스의 도움으로 점차 극복할 수 있었다. 로저스는 채권자들이 작품 저작권을 가져가는 걸 막기 위해 트웨인의 저작권을 아내 올리비아 소유로 해놓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트웨인은 헬렌 켈러와도 절친했다. 헬렌 켈러가 1903년에 내놓은 자서전을 읽고 크게 감명 받은 트웨인은 헬렌 켈러에게 편지를 보내 감동을 표현했고, 그녀가 래드클리프칼리지에 진학했을 때 로저스에게 그녀를 소개해 학비를 지원하게 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차별, 여성차별에 반대하다
마크 트웨인은 진보적인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제국주의에 강하게 반대했다. 1901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미국 반(反)제국주의연맹의 부의장이었다. 이 연맹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데 반대했다. 1906년 미군이 필리핀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포함한 600여 명을 죽인 모로족 학살 사건을 규탄하는 내용의 [필리핀 사건]은 그의 사후인 1924년에 출간됐다. 그는 유럽의 제국주의에도 매우 비판적이어서, 대영제국의 판도를 확장시킨 세실 로드,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꾀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1882년1월. <하퍼스 위클리>에 실린 마크 트웨인의 캐리커쳐
필리핀-미국 전쟁 당시 트웨인은 반전(反戰) 우화 [전쟁을 위한 기도]를 집필하여 <하퍼스 바자>에 투고했지만 <하퍼스 바자> 측은 “여성지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했다. 트웨인은 이 일이 있고 며칠 뒤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이 기도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출간될 수 없을 것 같군. 죽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려나.” 트웨인은 <하퍼스 바자>를 발행하는 하퍼앤브라더스 출판사와 독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기도]를 다른 곳에서 발표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사후 1923년에야 출간될 수 있었고, 이후 반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 받아왔다.
트웨인은 여성의 권리 신장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연을 통해 알리는 데 열심이었다. 노동 운동과 노조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했고, 노예제도 철폐를 지지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흑인 노예들은 물론, 백인들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는 흑인 학생이 예일대 법과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학비를 댔고, 역시 흑인 학생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했고, 그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러시아 황제를 비판했다. 기독교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그는 특히 기독교회의 해외 선교가 사실상 제국주의 침탈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 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트웨인이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은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공개하지 않으려 했다. 트웨인은 프리메이슨 단원이기도 했다.
핼리 혜성과 함께 지구에 태어나 핼리 혜성을 따라 세상을 떠나다
1896년 트웨인의 딸 수지가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04년에는 아내 올리비아가 세상을 떠났고 1909년에는 딸 진이 세상을 떠났다. 수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트웨인은 의기소침과 우울에 시달렸다. 1909년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1835년 핼리 혜성과 함께 태어났다(1835년 핼리 혜성이 지구에 근접한 날로부터 2주 뒤에 태어남). 이제 내년에 핼리 혜성이 다시 온다. 나는 혜성과 함께 떠나고 싶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 인생 최대의 실망을 느낄 것 같다.” 1910년 4월 21일, 핼리 혜성이 지구에 근접한 다음 날 마크 트웨인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의 말이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 진정으로 지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 그의 유머는 분명 미국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고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았다. 그와 그의 작품들은 미국 문학에서 영속적인 유산으로 지속될 것이다.”
▶1903년 러시아군, 용암포 강점
▶ 1898년 미국, 쿠바독립 승인
▶ 1864년 독일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 출생
▶ 1838년 자연주의 철학자-작가 존 무어 출생
▶ 1835년 미국의 면직공업 창시자 슬레이터 사망
▶ 1830년 영국 기어자전거 발명가 제임스 스탤리 출생
▶ 1816년 영국 소설가 샬롯 브론테 출생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
어려서 부모를 잃고 외숙부의 집에 맡겨진 소녀가 있다. 외숙부마저 죽어 버리자 소녀는 그야말로 군식구가 된다. 그런데도 고분고분하기는커녕 곧잘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결국 그 벌로 ‘붉은 방’에 갇힌다.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 하지만 외숙부가 그곳에서 임종을 맞은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 방, 불도 때지 않아 썰렁한 방, 유령이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방. 붉은 방의 어둠을 응시하며 소녀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고 외친다. 못생긴 데다 당돌하기까지 한 열 살짜리 소녀 제인 에어는 ‘못된’ 외숙모와 외사촌들 틈에서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제인 에어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팔 년을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열여덟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못생기고 키도 작고 비썩 마른 그녀 앞에 로체스터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로맨스도 없고 흥미도 없는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한 생활의 한 시간에 변화를 갖다 준 셈이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희구되었고 또 나는 그것을 부여하였다.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이 내게는 기뻤다. (중략) 게다가 그것은 새 얼굴이었고 흡사 기억의 화랑에 집어넣은 새 그림과 같았다. 이미 거기에 걸려 있는 딴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첫째, 남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둘째로는 사납고 씩씩하고 검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본격적으로 열정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수시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고딕소설 속의 성과 같은 손필드 저택, 미남도 아니고 성격도 괴팍하지만 어딘가 우수에 차 있는 남자, 가정교사와 부유한 귀족이라는 신분의 벽,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 이로써 연애소설의 요건이 갖추어진다. 사건의 흐름과 속도는 더 기막히다. 한밤중에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나고 제인은 그를 구한다. 파티 날, 로체스터는 점쟁이로 분장해 제인의 속마음을 떠본다. 외숙모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제인이 한 달간 손필드를 떠난다. 그리움이 그들의 사랑을 점검하도록 해 준다. 잉그램을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진전되면서 사랑은 더 깊어 간다. 그와 함께 손필드 저택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 아슬아슬한 긴장을 더한다. 애정의 표현 방식 역시 적절한 수위를 넘지 않으며 우리의 연애 욕망을 간질인다. 드디어, 제인과 로체스터의 결혼식. 그러나 뜻밖의 파국으로 인해 제인은 손필드를 도망치듯 떠난다. 다시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연인들은 재회하여 가정을 꾸린다. 인물들도 행복하고 독자도 행복한 결말이다. 가히 달콤한 낭만성을 무기로 내세운 최고의 연애소설답다.
이 러브 스토리를 재구성해 보자. 불쌍한 고아 소녀가 가난한 가정교사를 거쳐 대 저택의 어엿한 안주인이 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실현, 시쳇말로 ‘된장녀’ 이야기이다. 과연 그런가? 빅토리아조의 19세기 영국, 여성은 오직 ‘여자’의 길을 감으로써만, 즉 결혼, 출산, 육아, 살림 등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만 인간일 수 있었다. 물론 제인이 추구했고 또 손에 넣은 가치도 그것이다. 단, 그녀에게는 그럴 듯한 집안도, 미모도 없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똑똑히 알고서 세상의 법칙과 당당히 맞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은 이런 식으로 유지된다.
“제가 가난하고 미천하고 못생겼다고 해서 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혼도 있고 꼭 같은 감정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복이 있어 조금만 예쁘고 조금만 부유하게 태어났다면 저는 제가 지금 당신 곁을 떠나기가 괴로운 만큼, 당신이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지금 관습이나 인습을 매개로 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고 육신을 통해 말씀드리는 것도 아녜요. 제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두 영혼이 다 무덤 속을 지나 하느님 발밑에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자격으로 말이에요. 사실상 우리는 현재도 동등하지만 말이에요!”
“억울해! 정말 억울해!”라며 엉엉 울던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남자를 향해 대책 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결국 그 남자를 자기 품에 안음으로써 제인은 사랑 이상의 것을, 삶 자체를 쟁취한다. ‘로체스터 씨’가 아닌 그냥 ‘에드워드’, 원죄와도 같은 어두운 과거 때문에 눈이 멀고 쇠락한 한 남자. 첫눈에 반한 사랑이자 마지막까지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여성이 열정과 삶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 나아가 기록-문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은 비단 제인의 인생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사적 관점에서도 놀라운 성취이다. 물론 그것은 [제인 에어]의 작가가 이룩한 위업이기도 하다.
샬롯 브론테(샬럿 브론티)는 이십 대에 뼈아픈 사랑을 겪고 노처녀로 살다가 서른여덟에 결혼했다. 그리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임신한 상태에서 병사했다. 여자로서, 아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제법 처량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투영하여 만들어 낸 제인 에어는 ‘붉은 방’을 빠져나와 행복과 평온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다. 이만하면 브론테의 운명도 어느 정도 보상된 것이 아닐까.
일찍 부모님을 여읜 제인 에어는 외숙모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며 끊임없이 시련에 부닥치지만, 언제나 당돌할 정도로 당당하게 생활한다. 그녀는 로우드 자선 학교에서 팔 년이라는 시간을 불행하게 보낸 후 자유를 갈망하며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괴팍한 성격의 저택 주인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의 미친 부인이 저택 밀실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길로 집을 떠난다. 눈 쌓인 광야를 걷다가 지쳐서 빈사 상태에 있던 그녀를 세인트 존 리버스가 구조한다. 그에게 감동을 받은 제인 에어는 그와 결혼하여 인도로 가기로 결심한다. 그때 그녀는 환상 속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고 손필드로 달려간다. 저택에 불이 나 로체스터의 부인은 불에 타 죽고, 로체스터는 한쪽 팔에 화상을 입고 실명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인 에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고 그와 결혼한다.
샬롯 브론테(샬럿 브론티, Charlotte Brontë)
1816년 4월 영국 요크셔주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자매들과 함께 열악한 기숙학교에 다니다 두 언니마저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잃었다. 1825년부터 오 년 동안, 후일 [폭풍의 언덕]을 쓰는 동생 에밀리와 함께 집에서 독학했고, 이 시기부터 샬롯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31년 둘은 로헤드의 사립 기숙학교에 들어갔으나 에밀리는 심한 향수병으로 삼 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샬롯은 그곳에서 삼 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 건강을 해쳐 그만두었다. 스물여섯 살에 에밀리와 함께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 들어갔다가, 그곳의 교장 에제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다. 1843년부터 혼자 학교에 남아 조교로 일하기 시작한 샬롯은 우울하고 고독한 생활을 했다. 에제를 향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마음은 깊어 가지만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아내로부터 시샘을 받던 샬롯은 결국 1844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경험은 그녀에게 정서적으로나 내면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후일 에제는 [제인 에어]에 로체스터 씨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1846년 아버지의 백내장 수술을 위해 맨체스터로 동행한 샬롯은 그곳에서 [제인 에어]를 쓰기 시작했다. [제인 에어]는 1847년 출판되자마자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여동생 에밀리와 앤 그리고 남동생까지 모두 잃고 크게 상심한다. 또한 그사이에 몇몇 남성들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부목사인 아서 벨 니콜스로부터 네 번째로 청혼을 받고 서른여덟 살에 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늦은 나이에 임신한 상태에서 여러 가지 병이 겹쳐 결국 결혼 구 개월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 1782년 독일의 유치원 창시자, 교육개혁가인 프리드리히 프뢰벨 출생
▶ 1699년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 사망
▶ 1657년 신성로마제국 페르디난도 3세 사망
▶ 1571년 명종실록 인쇄
▶ 1142년 프랑스 스콜라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사망
https://youtu.be/5y7HB9C9PFM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